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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애민사상 어디서 왔는가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걸출한 왕의 후계자는 장남보다는 뛰어난 차남이나 셋째에게 넘어가는 사례가 많다.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일으킨 창업한 일등 공신이었다. 태조를 측근에서 보좌한 유학자 출신 관료들과는 달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형제들도 죽이고 정도전과 같은 거물 정적을 제거하고 처갓집도 멸족시켰다. 

 

양녕대군은 외갓집에서 자라 외삼촌 민무구, 민무질 등 4형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하며 자랐다. 그 외삼촌들이 세자 양녕대군을 왕위에 올려 놓으려는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이런 무서운 집념의 소유자이자 잔인한 아버지 밑의 장남인 양녕대군은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쳤다. 양녕대군은 공부도 게을리하고 주색을 가까이해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자주 들었다.

 

어느 집안이든 아버지와 장남 간 은 묘한 긴장 관계가 있다. 아버지는 장남에게 바라는 기준이 높기 때문이다. 왕조와 명문 가문, 부를 물려줘 야 하는 아버지로서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아버지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으면 순탄한 관계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보통 이상으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태종과 양녕대군의 관계가 점점 악화하기만 했다.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의 바로 위에는 한 살 많은 형님인 효령대군이 있었다. 나중에 태종이 충녕대군을 세종으로 앉힐 때, 효령대군을 나약하다는 이유로 세자 감으로 고려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충녕대군은 왕위가 자신에게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충녕대군은 천성적으로 총명하고 끈기가 있었고 학문을 좋아했다. 그는 태조와 태종 간의 갈등, 아버지의 무자비한 정적 제거, 양녕대군의 엇나간 행실 등을 지켜보면서 성장했다. 심지어 세종 즉위년에 상왕의 지시로 세종의 장인인 심온이 사약을 받고 죽는 일 까지 겪었다. 태종은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면서도 병권은 세종과 공유했다.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바로 첫해에 병조참판 강상인 등이 군사에 관한 사항을 세종에게는 보고하고 상왕에게는 보고하지 않았다. 상왕이 불같이 노했을 법하다. 왕위를 물려주고 나자 마자 자신을 감히 능멸하고 배반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상왕은 취조 과정에서 그들의 배후에 세종의 장인인 영의정 심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상왕은 심온에게 사약을 내리고 그의 아내와 형제들을 모두 관노로 만들었다. 죄인의 자식들이란 이유로 왕비도 폐위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으나 그것만은 허락되지 않았다. 세종은 유학자 출신 사대부들이 도저히 경험하지 못했을 환경을 겪으면서 그의 정신세계는 깊어지고 위대한 애민사상이 발아되는 바탕을 형성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폭넓은 학문 편력

 

세종의 학문에 관한 관심과 노력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도 극히 드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만인지상의 왕이 되면 일도 과중하고 나태함과 타락으로 이끌 유혹도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세종은 학문을 사랑하는 것도 모자라 본인이 적극적으로 배웠다. 고려 시대에 있었던 학술 기관인 집현전을 조선조에 들어와 처음으로 세움과 동시에 유학을 포함해 십학을 장려했다. 십학이라 함은 유학을 비롯해, 무학(무예학), 자학(문자학), 역학(통역학), 음양풍수학, 산학, 율학, 악학(음악학) 등을 말한다.

 

세종은 산학을 경연에서 직접 배우고 악학의 교과서 격인 「율려신서」를 습득했다. 산학은 백성들의 농사에 도움을 줄 천문역학의 발전과 새로운 세금 제도의 시행으로 나타났다. 악학에 대한 깊은 조예는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이바지하였음은 물론이다. 세종은 제왕학문으로서 사학의 중요성을 알고 깊이 이해하고 정사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성리학을 신조로 여긴 신하들과 정치의 최종 결정자이자 책임자임을 절감하고 있는 세종은 학문을 바라보는 데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세종이 신하들에게 사서를 읽도록 하자 집현전 학자인 윤회는 “옳지 않습니다. 대체로 경학이 우선이고, 사학은 그 다음이오니 오로지 사학만을 닦아서는 안됩니다.”라고 반대했다. (세종평전, 한영우, 82) 왕이 오직 사학만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사학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하였을 터인데, 그 당시 유신들의 꽉 막힌 사고를 드러내는 듯 하다. 세종은 사학에 대한 확신하고 많은 사서를 편찬케 하는 등 사학을 진작시키는 데 힘썼다.

 

세종은 기술학에 관한 여러 정책과 천문기기의 설치, 신분을 넘어서 파격적인 인사정책으로 과학기술을 발전 시켰다. 이것은 오로지 백성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고자 하는 애민사상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의 해박한 식견과 지혜로운 판단에 비해 신하들의 말들은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후대 사가들이 조선시대 역사를 평가함에 있어서 대체로 유학자 출신 사대부보다 왕들에 대한 평가가 인색함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한 사관들이 모두 유학자들이요, 허다한 사서와 문집들이 그들의 기록이다 보니 학자들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자료들을 많이 섭렵한 탓이라고 본다.

 

세종실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합리적이고 타당한 세종의 주장을 사사건건 트집 잡았음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이를 미루어 짐작해보면 조선조 역대 왕들이 고집스런 신하들의 반대로 제대로 뜻을 펼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해보게 된다.

 

단군의 홍익 정신을 귀히 여기다

 

세종 이전에 우리나라에는 평양에 기자 사당이 있어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 구월산에는 환인과 환웅, 단군을 기리는 삼성사가 있었는데 민간들이 와서 제사를 봉행했다. 명나라 사신은 조선에 들어와 평양에 이르면 기자 사당을 참배하는 것이 관례였다. 태종 12년 하륜은 명나라 사신이 기자에게만 참배하는 것이 당치 않다고 하여 단군 위패를 함께 모셨다. 다만 기자 위패를 북쪽에서 남향으로 향하게 하여 주신으로 삼고 단군 위패를 서향으로 해서 위상을 낮게 배치했다.

 

세종대에 사온서 주부 정척이 우연히 평양 기자 사당에 들렀다가 단군 위패가 기자 위패보다 낮은 위치에 있음을 발견했다. 세종 7년 정척은 이를 바로 잡아 달라고 임금에게 건의했다. 정척에 따르면 단군이 기자보다 1230여 년이나 앞서 나라를 건국했고 《향단군진설도》에서 단군 위패를 남향으로 했던 점, 또 단군 위패를 기자 사당에 모신 것이 잘못됐다는 지적이었다. 세종은 이를 옳게 여겼고 내친김에 삼국의 시조 사당을 세우는 것을 검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세종의 삼국 사당 건립에 대해 예조판서 신상은 이견을 냈다. “주나라 말년에 7국이 자웅을 다투어 법을 정하지 못했었는데, 우리 동방도 통일되기 전까지는 삼국의 아귀 다툼이 마치 주나라 7국 시대와 같지 않습니까?” 이에 임금은 놀라운 식견을 보이는 논점으로 응답했다. “그렇지 않다. 옛일을 상고해 보면 우리 동방은 삼국의 시조가 있기 전에는 12한과 9한이 있어서 나라의 경계가 분분했으나, 삼국의 시조가 다소 이를 합쳐 놓은 것은 그 공로가 진실로 적지 않다. 마땅히 의사(사당)를 세워서 그 공을 보답해야 할 것이다.

 

단군 사당과 삼국 사당에 관해 설왕설래 하다가 드디어 세종 11년에 평양의 기자 사당 남쪽에 단군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합사했다. (세종평전, 258-262, 358) 세종은 단군 사당과 삼국 사당을 논함에서 상고사에 대한 주체적 사관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세종이 삼국 사당 건립의 정당성을 명쾌하게 전개한 점으로 봐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을 익히 알고 있었으리라고 본다. 세종은 반드시 옛것을 참조케 하여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국가 주체의식을 함양할 수 있게 했다.

 

 

불교의 영향

 

세종은 처음엔 불교를 믿지 않았으나 만년에는 불교에 크게 기대었다. 할아버지 태조는 불교를 신봉했고 태종도 불교를 내치지는 않았다. 세종은 이런 환경 속에 자랐고 학문적 호기심이 컸던 까닭에 불교 사상에도 깊은 이해가 일찍부터 있었으리라고 본다. 세종이 불교에 기울어진 것은 만년에 두 아들을 잃고 왕비마저 저세상으로 보내자 슬프고 허망한 마음을 달래려고 한 이유를 들고 있다.

 

신앙적으로 보면 그런 해석도 타당한 듯하나, 세종의 남다른 애민 사상은 불교 가르침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년에 행한 불사를 통해 전국의 승려들과 걸인들이 찾아왔 다. 소헌왕후 심 씨의 장례행사에 참여한 승려가 8-9천명, 거지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과 자비심이 세종의 애민사상의 뿌리가 됐을 것이다.

 

세종의 애민사상, 새로운 세금제도를 ‘여론조사’로 결정

 

조선시대 백성들의 가장 큰 고통은 경작세의 수탈이었다. 힘 있는 전주들이 세금을 정하는 관리들과 짜고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는 일이었다. 세종은 경작세를 전주와 세금을 매기는 관리들의 자의적 잣대와 횡포를 막기 위해 정액제에 가까운 공법을 시행하고자 했다. 임금은 공법의 시행 여부를 신하와 백성들에게 물었다. 그 숫자가 17만 명에 이른다.

 

세종 12년 호조의 보고에 따르면 공법의 가부에 대해 서울에서는 1,428명에게 물었다. 그 결과 211명은 글로써 의견을 답했고, 나머지 1,212명 중 찬성이 702명, 반대가 510명이었다. 여론조사 참가자가 경기도 17,346명, 평안도 29,841명, 경상도 36,710명, 전라도 29,816명, 충청도 21,056명 등 17만 명에 달했다.

 

여론조사에서 토지가 상대적으로 비옥해 세금을 많이 냈던 경상도와 전라도, 경기도는 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토지가 척박한 평안도와 함길도는 반대가 훨씬 컸다. 공법 제도는 갑작스러운 제도 변경으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해 차츰 시행하다가 세종 26년에 가서 정식으로 시행 됐다.(위 책, 340-342)

 

한글 창제와 백성을 굶어 죽게 한 수령에게 곤장을 때린 일, 노비와 여성, 노인, 고아에 대한 우대 정책 등 세종의 거의 모든 행위는 애민사상에 기초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다. 특히 새로운 조세제도를 실시하면서 여론조사를 하게 한 점은 그가 우리나라에 민주주의 제도의 씨앗을 뿌린 위대한 정치 사상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MeCONOMY magazine August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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