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왕조가 뛰어난 창업 군주를 포함해 두세 명의 명군을 내놓는다고 치면 대략 몇 년 정도 유지되고 난 뒤에 왕조 교체가 이뤄지는 게 적당할까. 중국 왕조의 교체 기간이 적절한 기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중국은 이민족이 침입하기 용이한 중국 대륙의 한 가운데에 있고 내부 모순이 극에 달하면 반란이 일어나기 좋을 만큼 인구도 많고 농사 지을 땅도 넓다. 주로 북방민족인 이민족과 반란세력 중에서 뛰어난 지도자가 나오면 중국 내부의 모순으로 인한 민심 이탈과 결합해 혁명을 통한 왕조 교체가 가능했다. 중국 역대왕조의 평균 교체 주기는 넉넉하게 잡아 250년 안팎이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 왕조는 5백 년이나 지속돼 중기부터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졌고 말기에는 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해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혁명이라고 함은 최소한 정치세력을 바꿔야 한다. 정치 세력도 그 교체 세력의 폭과 깊이에 따라 혁명의 철저성 이 달라질 것이다. 여기에다 정치사상을 바꾸어 체제를 바꿀 정도라면 진정한 혁명이라고 할 만하다.
조선 시대에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동학혁명을 유일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정여립의 거사 사건이 있었다. 정여립 거사는 사전에 발각됐으나 그가 주장한 정치사상이 가히 혁명사상이라고 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정여립 이전에 조광조의 개혁 사상이 있었다. 조광조는 성리학이 이루고자 했던 도덕 이상 국가의 철저한 실현을 주장하고 실행에 옮기려 했다. 그런 점에서 개혁사상가는 될지언정 혁명적 사상가는 아니었다.
정여립은 선조의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면서 선조의 인물됨을 파악하고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선조 왕을 몰아낼 혁명을 모의한 것으로 보인다. 선조 시대에 이르면 세금을 부담할 양인 보다 노비들의 숫자가 더 많았다.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땅을 늘려나가 세금을 부과할 전답도 줄어들었 다. 정치는 그야말로 상대의 말꼬리 잡기, 경전에 충실한 ‘근본주의적 교리’나 다름없는 상소문 올리기, 아니면 상대 당에 타격을 주기 위한 음해성 상소문들이 난무했다. 선조의 무능, 판단 실수, 신하에 대한 의심과 시기 등 조정의 공론을 주도적으로 어지럽히는 데에 일조했다. 이런 모습을 정여립은 봤을 것이다.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천하는 세습 왕의 소유물이 아니라 백성들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당시의 주류사상인 반주자학적 사상에 반기를 들어 충군 사상 자체를 부인하였다. 그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실제로 대동계를 조직하여 노비와 승려, 광대, 풍수, 무당, 점쟁이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교유했다.
정여립에 대한 인물됨이 조각조각 전해지고 있는데, 대체로 뛰어나긴 하나 ‘위험한’ 인물로 묘사되는 것이 많다. 본래 인물평이란 것이 주관적이다. 이이의 제자였다가 이이가 죽자 비판했다는 대목이나 선조가 언짢은 말을 하자 눈을 부릅뜨고 봤다거나 하는 평은 사실 여부도 분명하지 않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주자의 주장을 비판하고 당시로써는 이단이나 다름없는 순자의 사상을 동조하고 신분 차이를 거침없이 무시한 그가 ‘위험하게’ 보였을 것은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사화의 기록은 옥석을 구분하고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지지 않으면 사실에 근접하기 어려울 듯하다. 정여립 사건을 다룬 기축옥사 관련 기록은 첫째, 선조의 일방적인 판단이 전횡됐다. 둘째, 사실 규명보다는 동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으로 사건이 왜곡되고 확대됐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 곤장과 연좌제라는 참혹한 처벌의 위협에서 나온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원하는 답이 안 나오면 곤장을 때리니 없는 말도 지어냈을 것이다.
넷째, 물적 증거가 거의 없이 주로 진술에만 의존했다. 물적 증거라는 편지 등 문서류도 왕과 심판관이 판단하는 대로 편파적으로 해석됐을 여지가 크다. 다섯 째, 사건의 진실을 논쟁으로 결정하려고 했다. 주장이 그럴듯하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사실로 인정되는 격이다. 여섯째, 그야말로 주관적일 수 있는 상소문들이 사건진실 규명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사건을 확대하는 요인이 됐을 것 같다. 오늘날 과거 기록을 유일한 사료로 삼아 새로운 글을 구성하는 역사학자와 작가들도 옥석을 가리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해 자칫 역사를 또 다시 왜곡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여립의 거사는 실행에 옮기기 전에 탄로 나서 결국 관군에게 내몰리자 자살로 마감했다. 정여립 거사가 실제로 실행됐다고 하더라도 성공하기는 어려웠을 듯하다. 혁명에 성공하려면 백성들과 권력 내부자의 호응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정황은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성리학이 공맹의 유학에서 진일보한 이론적 체계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왕에게 충성하는 사상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정여립의 사상은 당시 지배층과 백성들의 생각에 비해 너무 거리가 컸다. 혁명이 성공하려면 역사적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다.
혁명의 조건
진정한 혁명이 일어나려면 영국의 신흥 신사계층처럼 새로운 계급이 출현하여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그들의 권력 진출과 권리를 정당화하는 정치사상이 널리 공유돼야 한다. 조선은 망할 때까지 새로운 계급이 출현할 경제적 조건과 사회적 개혁이 시도된 적이 없었다. 오직 왕과 양반만 존재했다. 대동사상은 하나의 비전일 뿐, 정치사상이라기 보다는 구체성을 결여한 ‘이상론’이었다. 정여립 사건에 비해 동학혁명은 새로운 세력과 사상이란 면에서 ‘혁명’이란 이름에 근접하다.
그러나 동학혁명이 새 세상을 실제로 구현하기에는 외세의 힘이 너무 강했고 동학혁명 주도자들이 새 세상을 이끌어갈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을 것인지는 의문이 남는다. 동학혁명 정신은 일본식민지의 가혹한 통치 아래서 3.1 독립운동 정신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그리고 3.1 독립운동은 4·19혁명으로, 그 이후엔 민주화 혁명으로 계승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4·19혁명에서 민주화의 길로 착실히 발전하지 못하고 금방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뺏긴 것은 역시 통치역량을 갖춘 혁명 세력의 부재가 원인으로 지적된다고 하겠다.
새로운 정치사상의 선택
정치사상은 스스로 모순을 해결하는 창조성을 발휘하면 한국의 정신문화를 찾아서 이상적이고 그러지 못할 경우 선진적인 주류사상을 도입하는 방법이 바람직하다. 우리나라는 상해임시정부에서 공화정을 채택하고 광복 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자 경제 대국인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반면에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 사상을 채택했다. 그 결과, 남북한은 오늘날 국민의 행복 면이나 국력 면에서 극명하게 격차를 보여주고 있는 바다. 공산주의 사상은 본래의 고상한 정신과 별개로 실행 즉시 일당 독재와 소수 권력 독점, 1인 독재 체제로 변질하게 된다. 따라서 공산주의 체제는 그들이 그토록 싫어했던 왕조 체제의 새로운 버전에 불과 했다.
자유민주주의 사상은 그 자체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개인과 민간조직, 언론, 시민단체와 이익단체, 자발적인 커뮤니티, 시장경제, 소유 권 등을 활성화 시키기 때문에 자기 교정적이고 창조적이고 융합적 성질을 띠게 된다. 이 점이 극소수의 통치세력과 공적 조직에게만 의존하는 공산주의 체제보다 월등하게 되는 요인이다. 동양은 서양보다 개인과 민간 부분의 역량을 기를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 역사는 조선 중기 이래 근현대 역사 속에서 꾸준히 개인과 민간의 역량을 축적해왔다고 할 수 있고 그 덕분에 민주화의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혁명이 성공하고 안착하려면 사회 모순을 극복하려는 백성들의 염원이 상존해야 하고, 그 염원을 실현할 선구적인 정치가와 세력, 그들을 지탱해 주는 지식인 관료 집단들의 ‘거버넌스(Governance)’가 결집돼 있어야 한다.
세습 군주 체제에서는 백성들의 삶을 지속적으로 개선시킬 가능성이 전무하기 때문에 충군의 주자학을 부인했던 정여립의 생각에서 한국 민주화의 씨앗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민주화는 16세기 말부터 장장 4백 년의 정련 과정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MeCONOMY magazine September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