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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리포트


미지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생존 예술... 장사와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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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레스토랑 프랜차이즈로 평가받는 서브웨이(SUBWAY restaurants)의 창업주 프레드 드루카(Fred Deluca), 그는 존 P. 하이어스와 함께 쓴《Start Small, Finish Big, 작게 시작하여 크게 성공하라》에서 “사업이란, 규모가 크든지 작든지 상관없이 일단 뛰어들어 시작하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하나씩 부딪쳐가며 해결하는 영역이라면서, 사업의 성공 여부는 시작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창업을 시도한 20~30세대가 많다고 들리는데, 이들 역시 처음 예상과는 다른 상황에 봉착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낙심하지는 말라, 지금은 고인이 된 SUBWAY의 창업자인 드루카 회장도 샌드위치를 만들어 본 일도 없이 샌드위치 식당을 시작했지만, 실패에서 배우며 세계적인 기업인이 되었다. 샌드위치 하나로 세계 최고의 기업을 일으킨 그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고민이 있으면 속에 담아두지 말고, 주변 사람에게 솔직히 털어 놓아라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언제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1947년 프레드 드루카(이하 나)는 뉴욕 브루클린의 싸구려 지하 임대 아파트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아버지가 근무하는 회사를 따라 뉴욕주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했는데, 거기서 우리 가족은 피트 벅(Pete Buck)씨 부부와 절친한 이웃이 되었다. 나는 그를 아저씨라 불렀다. 피트 아저씨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능력 있는 물리 과학자였고,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전기설비 공장에 취직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없었을 것 같았는데 단짝이셨다. 

 

1965년 7월 어느 날이었다. 피트 아저씨는 새로 산 집들이를 바비큐 파티로 했는데, 코네티컷 주로 이사해 살던 우리 가족도 초청을 받았다. 아저씨와 내가 사업 관계를 맺게 된 건 바로 그 집들이 파티 때였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소년이었지만, 집안 형편이 안 좋다보니 대학 학자금 고민에 쌓여 있었다.

 

시간당 1달러 25센트를 받는 철물점의 점원으로 취직했으나, 거기서 받는 돈만으 로는 충분하지 않았으니 대학에 가고 싶다는 소망이 더 간절해졌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겠다는 궁리만 했다. 그런 나는 피터 아저씨의 저택으로 들어서면서 아저씨에게 돈 버는 방법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아저씨가 내게 돈을 빌려주고 졸업한 뒤에 갚으라고 얘기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내 말을 듣고 난 아저씨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말했다. 

 

“내 생각엔 말이다. 네가 대형 샌드위치 가게를 해 보는 게 어떨까 싶은데?”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람,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서 대답하지 못하다가 엉겹결에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아저씨가 샌드위치 가게를 설명해 주셨는데, 나는 아저씨가 말하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내가 일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본 아저씨가 말했다. 


“꽤 흥미가 있는 모양이구나, 만일 네가 이 일에 뛰어든다면 나도 기꺼이 네 동업자가 되어 주마” 


나는 ‘좋다’고 대답했다. 피트 아저씨는「마이크 대형 샌드위치」체인을 소개한 1년 전 신문기사를 내게 보여줬다. 창업자「마이클 데이비스」는 거의 무일푼으로 시작 해서 10년 뒤 32개의 대형 레스토랑과 수많은 샌드위치 체인으로 이루어진 작은 왕국을 건설한 인물이었다. 아저씨가 말했다. 


“마이클 데이비스가 성공했는데 우리가 못할 건 없지 않겠니?”

 

우리는 그날 저녁 10년 안에 32개의 샌드위치 체인을 설립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샌드위치 가격까지 정했다.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아저씨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수표를 가져와서 1000달러를 적어 내게 주었다. 그것이 우리 모험의 시작이었고, 서브웨이 왕국의 출발점이었다. 

 

지식으로 아는 것보다 실행하는 게 중요하다 

 

내가 샌드위치 가게를 연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의 말은 한결같았다. “잘못되면 어떡하려고 그래?” 지금도 그렇지만 누가 무슨 일을 하려면 그런 일을 왜 하느냐며, 부정적인 의견을 다는 사람들을 줄 세우면, 서울에서 뉴욕까지 갈 것이다. 피트 아저씨는 첫 단계로 조그만 가게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그런 가게를 찾아서 월세 165 달러에 임대하고 곧바로 실내 디자인 구상에 들어갔다. 가게 이름은《피트의 슈퍼 잠수함 샌드위치(Pete’s Super Submarines Sandwich)》. 

 

나중에 알았지만 가게 위치가 형편없는 곳이었다. 우리는 사업체를 만든다는 설렘으로 앞뒤 분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게를 찾아서 좀 더 많은 지역을 다녀봤어야 했고 계약서도 작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시작에만 집착했다. 우리가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길을 따져보기보다는 그저 행동으로 옮기는데 급급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피터 아저씨와 나는 문제를 세심하게 검토 하기 보다는 과감하게 결정하는 일에 익숙한 편이다.

 

그렇지만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남다른 장점이다. 때로는 “아는 것”보다 “실행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뭘 하겠는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듯이 실행하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심지어 나는 대형 샌드위치를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뛰어들었다. 그건 피트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사 먹는 데만 익숙했지, 손수 만들어 본 경험이 없었다. 우리는 뉴욕주에 있는「마이크 체인의 샌드위치」와 포틀랜드에 있는「아마토 샌드위치」등 여러 곳의 샌드위치를 비교, 조사하고 연구했다. 관찰이란 의미 있는 과정이다. 뭔가 잘 모르는 부분이 있을 때는 명확한 대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고, 실수하게 되면 그 실수를 만회하는 과정에서 발전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우리가 시작하려는 사업은 크지 않았다. 투자한 자본금도 얼마 되지 않았고, 따라서 크게 잃 을 것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모른다는 사실에 연연(戀 戀)하지 않고 가능하면 빨리 시도해보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어머니는 나와 함께 가게에서 반경 150km 안의 농장을 돌며, 빵과 포장지, 고기, 채소, 치즈 등을 공급해 줄 업체를 만났다. 내가 공급업체에 가당치 않은 이야기할 때에도 어머니가 옆에 있어서 공급업체를 설득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신문 광고란을 뒤적거리며 중고 설비를 찾아내, 빠듯한 예산을 쪼개고 쪼개 개업에 필요한 모든 설비를 갖출 수 있게 해줬다. 


이렇게 문을 연 나와 피터 아저씨는 첫날 321개의 샌드위치를 팔았다. 화려한 성공이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 했다. 식자재 구입(購入)부터 종업원 교육까지 20살도 안 된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다. 결국은 석 달 만에 돈을 다 날리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피터 아저씨가 다시 한번 구원의 손을 내밀어주셔서 두 번째 가게를 열었지만 실패 했다. 매출은 올라가는데 돈이 모이지 않는 것이었다. 

 

행동을 중단하면 더는 행동을 계속할 수 없다

 

두 번째 식당이 망했을 때, 나는 여러 번 이 일을 그만둘 까도 싶었지만, 지금까지 경험에다 뭔가 새로운 걸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 우세했고, 여기서 포기하면 죽도 밥도 아닐 듯해서 세 번째 식당에 도전하기로 했다.

 

다만 무언가를 바꿔 새롭게 하자고 결심했다. 일단, 피트의 슈퍼 잠수함 샌드위치(Pete’s Super Submarines Sandwich)라는 길고 복잡한 상호를 단순화했다. Submarines이라고 할까, 하다가 조금 거칠어 보여서 그냥 Sub-만 살리기로 하고 way를 붙였다. 상호를 그렇게 바꾸고 간판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초록색에서 강력한 노란색으로 바꿨다. 그리고 샌드위치의 내용물과 주문 형태를 변경하기로 마음 먹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패스트푸드라면 햄버거나 피자 정도를 떠올리는 시절이었다. 나는 그들과 다른 컨셉이 뭘까 고민하다가, 문득, 샌드위치 재료의 신선함과 건강함을 모토로 삼으면 되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업계 선두였던 맥도날드 햄버거의 경우, 맛과 편리함을 앞세운 마케팅을 하고 있었다. 건강식이라는 이미지가 약할 수밖에 없으니, 그들과 반대로 가면 될 듯 했다. 그래서 나는 피터 아저씨와 채소를 가미한, 요즘으로 치면 웰빙 건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건강 샌드위치를 만들어보자고 의견일치를 봤다. 

 

잠수함 모양의 빵에다 햄이나 칠면조 고기 외에 각종 채소와 양념 등을 고루 넣어주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Subway 레스토랑의 시작으로 내 생각은 적중해서 피터 아저씨와 나는 이 식당에서 당시로는 거액인 7천 달러를 벌었다.

 

창업한 지 8년째 되는 해, 직영 점포 수는 16개로 늘었다. 그러나 10년 안에 32개의 점포를 내겠다고 했던 목표의 절반에 그치고 있었다. 나는 밤을 새우면서 점포 확장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때, 머리를 스치는 아이디어, 맥도날드 햄버거가 도입 발전시킨 ‘프랜차이즈’ 개념을 이용하면 될 듯했다. 가맹점주를 통한 점포 확장이었다.

 

나는 우선 직영점 하나를 떼어 프랜차이즈 1호점으로 만들고, 친구인 딕슨에게 맡겼다. 하지만 이 친구는 다니는 회사가 있었던 데다 프랜차이즈 가맹사업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아시다시피 프랜차이즈는 1호점이 잘되어야 한다. 그런 걸 보고, 가맹점주들이 자기도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고 다른 장소에 가게를 내는 법이다.

 

그러나 모델이 되는 1호점이 돈을 벌지 못하면, 누가 프랜차이즈 계약을 하려 하겠는가. 그런데 기회가 왔다. 친구인 딕슨이 다니던 회사가 망하자, 그도 어쩔 수 없이 1호점에 전력투구했고, 나도 본격적으로 코네티컷주에 프랜차이즈 광고를 했다. 초기 투자비용은 1000달러로 했다. SUBWAY라는 이름을 사용할 권리와 교육비용만을 포함한 액수다. 나머지 재료비, 간판 등 내외부 장식은 점주가 부담하고 매출의 8%를 로열티로 본사에 내면 끝이었다.

 

이렇게 1년간 코네티컷주에서 모은 점포는 16개. 그다지 큰 성과는 아니었지만, 이듬해부터 입소문이 나기 시작해, 뉴욕주, 메인주 등에서 프랜차이즈 개설 신청이 밀려들었다. 광고 2년만인 1978년에 100개 점포, 미국 서부지역을 포함해 1984년 중동 바레인에 해외 첫 매장을 비롯해 캐나다, 하와이에도 진출하며 1987년 1000호 점포를 달성했다. 

 

끊임없이 개선하라

 

1990년 초반은 맥도널드, 버커킹, 피자헛 등 대형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들과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들은 SUBWAY 주력 상품인「서브마린 샌드위치」를 자신들의 메뉴에 추가했다. 나는 다급해졌다. 성장의 중요성을 이 때처럼 실감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경쟁업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나는 그런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매장을 더 늘려 외형을 키워야 경쟁업체로부터 밀리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대학, 편의점, 병원, 버스터미널, 기차역, 컨벤션센터 등 이전에는 매장을 개설 하지 않았던 장소에 주목했다. 또한, 주 고객층인 젊은 독신 남성에게서 벗어나 어린이에게도 주목했다. 어린이를 위한 메뉴를 만들어 학교 매장에도 진출했다. 무슬림, 힌두교도, 유대인 등의 식습관을 고려한, 소, 돼지고기 등을 재료로 사용하지 않는 매장도 개설했다. 

 

나는 이런 신시장 전략으로 1992년 일본, 사우디아라비아에도 매장을 열었고, 1996년 콜롬비아, 덴마크, 과테말라, 쿠웨이트 남아공, 터키까지 진출했다. 2004년 대형할인점 월마트에 매장을 개설하자, 매장 수는 맥도날드를 웃돌기 시작했다. 내가 2015년 9월 죽기 전까지 이런 식으로 나는 전세계 111개국에 4만 4천여 개의 점포를 열었다. 이는 경쟁상대인 맥도널드 3만6천 곳, KFC 1만 8천 곳을 크게 웃도는 숫자다.

 

가난한 이탈리아계 공장 노동자의 아들이었던 내가 가진 자산은 35억 달러(우리 돈으로 약 4조 원)로,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나를 2007년 400대 미국 부호 가운데 242위에 이름을 올려줬다. 

 

SUBWAY가 미국 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 가장 많은 점포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우선 창업비용이 다른 경쟁업체보다 싸다는 부분이 한 몫 했을 것이다. 맥도널드의 경우, 넓은 매장과 10억 이상의 자본금이 필요하다. 반면 SUBWAY는 10평 정도의 매장과 1억원 정도의 초기 비용만으로 가능하다. (나는 프랜차이즈 참가비용으로 초기에 1000달러만 받았지만, 이 비용을 계속 인상했다.

 

2천년대 초반에는 8만 5천 달러였는데 창업에 대한 수요가 늘었고, SUBWAY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나는 외형을 확장하면서도 내실을 다졌다. 인원을 최소화하는 대신 능률을 최대한 낼 방안을 찾아냈다. SUBWAY의 빵과 속 재료를 투명한 진열장 안에 들여놓고, 손님들이 신선도를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주문은 아무리 바쁜 시간이라도 종업원 두 사람이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했다.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는 것처럼 고기 속을 넣은 빵이 옆 단계로 착착 넘어가게 만든 것이다. 나는, 또 1983년부터 각 매장에서 빵을 직접 구워 내 서비스 하게 했다. 초기에는 프랜차이즈 본부에 가까운 곳에 개설돼 직접 빵을 배달할 수 있었지만, 지역이 넓어지면서 그런 배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통밀빵 등 5가지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있는 빵은 항상 따끈따끈하게 오븐에 구워서 제공되어야만 한다. 

 

 

SUBWAY가 다른 프랜차이즈와 특화된 부분이 빵과 채소다. 창업 당시에도 그랬지만 SUBWAY는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패스트푸드를 만들자”는 슬로건(slogan) 하에 ‘건강과 선택’을 마케팅의 주요 요소로 하고 있다. 아울러 빵은 어떤 것으로 할지, 소스는 어떤 소스를 뿌릴 것인지, 또 양상추, 할라피뇨 등 속에 들어가는 15가지 종류의 채소는 어떻게 할 것인지, 하나 하나 모두 고객이 결정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를 고객주문방식(Order to be Made)이라고 해서 직접 만들어 먹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고기도 기름에 튀긴 것은 쓰지 않는다. 더운물에 데치거나 훈제로 요리하는 방식이다. 칼로리와 지방함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고기의 종류는 쇠고기부터 칠면조 고기까지 15가지 종류. 원하면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제공하지만 어쨌든 식용유는 들어가지 않는다. 

 

“오이는 넣지 말고 양상추를 많이 넣어주세요.” 이렇게 고객들이 자신의 기호나 니즈에 따라 구체적으로 주문하면, 전체적으로 200만 종류의 메뉴 조합이 이론적으로 나오는 등 관리하기가 무척 어렵지만, 복잡성을 체계화 하는 힘이 SUBWAY를 건강 패스트푸드 글로벌 프랜차이즈로 성장시킨 동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사업가는 예리한 칼날 위를 걷는 사람

 

기자가 내게 물었다. KFC보다 22년 늦은 1974년에 프랜차이즈를 시작했는데 후발주자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이 뭐였냐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점포를 낼 때 전통적으로 명당인 곳은 물론이고, 남이 쳐다보지 않지만 독특한 자리에는 꼭 입점하려고 했습니다. 놀이공원, 공항, 대학, 쇼핑몰 등 프랜차이즈라면 누구나 원하는 곳에 SUBWAY도 들어갔습니다. 특히 고객들이 제대로 된 음식점이 없을 거라고 생각되는 곳에도 간판을 걸었습니다.

 

이를테면, 공사장, 유람선, 세탁소, 고등학교에도요. 샌드위치는 한 끼 식사로 훌륭하니까요. SUBWAY 는 모든 재료를 기름에 튀기지 않기 때문에 주방에 복잡한 설비가 필요하지 않은 게 장점입니다. 자연히 KFC, 맥도날드 등 경쟁하는 업체에 비해 입지를 선정하는데 제약이 줄어들고, 개점 비용과 운영비용이 적게 들어 가맹점주를 모집하기도 수월했습니다. 무엇보다 음식을 만들 때 노동력이 적게 듭니다. 건강과 편의성을 동시에 잡았기 때문이죠.” 

 

사업가는 예리한 날을 가진 2개의 칼 위를 걸어가는 사람과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문제가 터지고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나 역시 가맹점주들과의 소송, 새로 등장한 경쟁하는 업체들과 싸움, SUBWAY 음식을 먹고 100kg을 감량에 성공해서 회사의 광고모델로 쓴「자레드 포글」이 아동 포르노물 제작 유통 및 미성년자 성매매 협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일. 그로 인해 우리 회사가 감내했어야 할 크나큰 이미지 실추 등등,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러나 나는 어찌 됐든 이겨냈다. 원래 의학박사가 되는 게 꿈이었던 나였다.

그러나 샌드위치 사업에 흥미를 느끼고 대학에 들어간 뒤 주경야독(晝 耕夜讀)을 하면서, 사업에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다. 결국, 3학년 때 의대 과정을 포기하고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오로지 SUBWAY를 확장하는 데만 집중해 왔다. 제2의 SUBWAY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내게 성공의 원칙을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싶다. 

 

“나, 프레드 드루카는 2015년 9월 14일, 하늘의 부름을 받고, 향년 68세의 나이로 여러분 보다 먼저 세상과 작별했다. 난 천성적으로 사교성이 좋았으며 낡은 차에 몸을 싣고 매장을 찾아 다녔다. 가명으로 음식을 주문한 뒤 직접 음식의 품질을 점검했다. 매장 주인, 고객들과 대화하며 자신들이 보완해야 할 사안들을 챙겼다.

 

나의 경영철학은 작게 시작해서 크게 성공하는 것이다. 성공한 기업인이 되고 싶은가? 먼저 푼돈을 버는 법부터 배워라. 1원의 소중함을 아는 자만이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야심가처럼 사고하고 끊임없이 개선하고 직원들을 무조건 신뢰해야 한다. 소비자의 만족과 직원의 성장에 집중하라. 사업이 성장하기 위해선 돈을 버는게 아니라 고객을 벌어야만 한다.

 

또 직원은 당신의 대표이사이자 모든 고객과의 접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난 17살에 창업을 하면서 경험도 배움도 없이 시작했다. 시행착오(試行錯誤)를 통해 배웠다. 실수는 모두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쳐지게 마련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 부디 용기를 잃지 마시라.”

 

그는 젊은 창업가들에게 관심이 많아서 1996년 창업자 금을 빌려주는 비영리 투자법인 마일(MILE, the Micro Investment Lending Enterprise)을 설립했다. 2013년 7월, 백혈병 진단을 받고도 일선에서 물러나지 않는 열정을 보이다가 병세가 악화해 2015년 6월, 여동생인 수전 그레코 에게 CEO 자리를 넘겨줬다.

 

MeCONOMY magazine Novembe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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