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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리포트


[경영자 이야기] 청년농부 편에 선 은행 설립자를 기다리며.....

- Bank of America(BOA) 설립자, 아마데오 피터 지아니니(Amadeo Peter Giannini)

 

은행에서 돈을 빌려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알 것이다. 하물며 담보물이 거의 없거나 신용이 시원치 않은 젊은이들일수록 은행 대출은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다. 특히 우리나라의 미래 농업을 짊어지기를 희망하는 젊은이들은 국가의 우대 정책이 있기는 하지만, 희망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농수산업과 이와 관련된 업종으로 부를 축적한 기업이나 기업인들이 미래청년농부를 위한 전문은행을 설립하면 어떨까? 돈이 없어서 자기의 꿈을 펼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없도록 말이다.  서민의 위한 저리 대출을 최초로 시도한 은행업계의 전사 (戰士), 「Bank of Ameraica」의 설립자, 아마데오 피터 지아니니(1870~1949)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런 은행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을까?

 

151년 전, 이탈리아계 미국 이민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농산물 거래를 기반으로 종잣돈을 모아 은행을 만든 그는, 20세기 최고의 은행가이다. 인구감소와 지방 소멸로 농촌이 붕괴 위기에 있는 우리나라에 그처럼 훌륭한 은행경영자가 나와 청년 농부은행을 만들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필자 주; 그에 대한 전기(傳記)는 『죽은 CEO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토드 부크홀츠 저, 최지아 옮김, 2009년 김영사』에서 요약 발췌했음을 밝혀둔다)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는 것을 지켜 본 6살 소년 


「Bank of America」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Bank of Italy」 가 있었고, 그 은행이 빛을 보기 전에는 캘리포니아주 산호세(San-Jose)에서 스위스 호텔을 운영하던 젊은 이탈리아인 부부가 있었다. 이 부부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아버지 루이지는 이탈리아 제노바 지역의 포도농장 주인의 아들이었고, 어머니 버지니아는 토스카주의 성곽도시인 루카 출신의 앳되고 아리따운 여성이었다.

 

아버지 루이지는 호텔을 운 영하면서 번 돈으로 그가 태어난 이듬해인 1871년, 붉고 탐스런 딸기와 체리가 열리는 과수원 5만 평을 사들였다. 덕분에 그는 일찍부터 농장을 거드는 법을 배웠고, 들판에서 친구들과 뛰노는 즐거움을 알았다. 

 


미국으로 건너온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숫자는 1890년대 크게 급증해서 1930년대에는 2~3세대 이탈리아인들이 미국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했다. 1850년대는 샌프란시스코에 금을 찾아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1870년대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의 돈벌이이란 오로지 고된 노동이 전부였다. 사람들은 금 조각을 걸려낼 체를 챙기는 대신 삽과 곡괭이를 짊어지고 새로운 대륙 횡단열차에 몸을 실었다.

 

땅에 묻힌 돈을 캐내려면 느슨한 허리를 움직여야 했다. 1870년대에서 1899년 사이에 미국의 전체 농장 숫자는 450만개로 80%가까이 뛰어올랐다. 농장의 재산가치도 덩달아 상승했다.  그는 알비소(Al-viso) 지역의 교실 한 칸짜리 학교에 다녔다. 프랑스와 독일, 아르메니아, 그리스 출신의 아이들도 있어서 시골 학교라기 보다는 일찍부터 글로벌 세상에 눈을 뜬 셈이었다.

 

1876년 8월 13일, 6살의 어린 그는 농산물을 가득 실은 마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집 앞에서 기다렸다. 그 때였다. 평소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었던 농장 인부 한 사람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났다. 임금 1달러가 화근이었다. 주인집 아들이 바로 옆에 있든 말든 인부는 허리에서 권총을 뽑아 아버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의붓아버지와 채소 과일 중개업에 뛰어든 15살의 ‘수학귀신’ 당시 22살이던 그의 어머니 버지니아는 강하고 꿋꿋한 여성이었다. 남편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모든 에너지와 지략을 생업에 쏟아 부었다. 그녀는 과수원을 운영하며 세 아이들을 먹여 살렸다. 결코 꾀를 부리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 없었고, 그와 함께 농장을 관리하면서 샌프란시스코 시장으로 가는 배편에 농작물을 실었다.

 

그러다가 도시의 농작물 도매상에 차로 농작물을 운반해 주는 로렌조 스카테나라는 젊은 남성을 만나 결혼을 했다. 자상한 성품의 로렌조는 지아니니 가족의 과수원으로 들어와 살면서 훌륭한 의붓아버지 노릇을 했다. 아이들은 평생 팝(pop, 아빠)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그의 어머니는 그가 12살 때 일생에서 가장 현명하고도 가장 무모한 결정을 했다. 가족 모두 대도시로 이주했던 것이다. 


그는 대도시 학교에서 수학귀신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하지만 학교는 그를 책상에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그가 부둣가에서 들려오는 상인들의 옥신각신 흥정하는 소리와 요란한 뱃고동 소리에 더 빠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채소와 과일 중개업을 하는 갤리 앤 컴퍼니(Galli and Company)에 일자리를 얻은 의붓아버지를 뒤따라 그도 그 바닥에 발을 들여놓았다. 의붓아버지가 그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회사를 만들자, 그는 밤마다 의붓아버지를 쫓아다니며 일했다.

 

 

한 회계사는 그가 보통 꼬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성실했고 중개업에 무척 관심이 많았으며, 대차대조표를 읽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회사와 학교를 병행할 수 없었던 그 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붓아버지 회사에서 종일 일 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인근 경영학교에서 3개월짜리 회계학 과정을 들었다, 

 

농장에서 자란 경험을 살린 육감적인 농산물 거래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와 근육질 몸매를 가진 15살 사내로 성장한 그는, 농작물을 직접 보고 자란 농장 경험 덕분에 농작물 거래업에 종사하는 다양한 국적 출신들과 떠들어대고 흥정하고 옥신각신하는 일을 좋아했다. 그는 처음에 의붓아버지와 새크라멘토 강을 오가며 우수 농작물에 입찰하는 일을 했지만 나중엔 혼자서 다녔다. 어느 때인가 그는 복숭아 공급량이 모자랄 것이라고 예상하고 복숭아 값이 2배로 뛰기 전에 복숭아를 있는 대로 사들였다.

 

저에겐 커다란 도박이었지만 제 예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 때 거래로 5만 달러를 벌어들였지요”


그가 21살이 되자 의붓아버지는 뛰어난 사업수완을 보인 그에게 자신의 회사 절반을 떼어주었고 그때부터 회사는 매년 수십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번창했다. 


1,000만 달러의 종자돈으로 새로운 도전 

 

그는 일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말쑥한 차림이었다. “건달에서 멋쟁이 신사로”를 외치던 뮤지컬 배우 스티븐 손드하임처럼 최신형 모자와 장갑, 금장을 두른 지팡이로 한껏 멋을 내고 새해 첫날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21살인 그는 시내 최고의 갑부이자 이탈리아 이민자의 딸인 클로린다 쿠네오라는 젊은 여성을 만났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이미 유럽에 있는 약혼자가 준 반지를 끼고 있었지만, 그는 그녀에게 구혼을 해서 마침내 사랑을 얻었다.

 

고국에 남겨진 약혼자만 가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났고, 그와 의붓아버지의 주머니는 날이 갈수록 두둑해졌다. 그는 의붓아버지를 따라 부동산에 투자했다. 의붓아버지와 일한지 15년쯤 지났을 때, 그는 농작물을 취급하는 일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31살이던 그에게 의붓아버지 회사는 이미 커질 만큼 커져 더 이상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워 보였기에 그로써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자  의붓아버지는 그의 지분을 10만 달러에 사들였고, 그는 자기 지분 외에 30만 달러를 따로 챙겨둔 상태였다. 오늘날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1,000만 달러가 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그는 이 종자돈으로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은행업의 틈새시장을 파고들다


그는 부동산업, 투자업, 그리고 은행업에 미래가 있다고 믿었다. 이미 그는 농산물 사업에서 손에 떼기 전부터 은행업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음 철 농작물 재배를 계획하는 가운데 종자와 농기구, 일손에 지급할 비용 선급금을 농부들이 문의해 오면서 은행 일이 시작되었다. 의붓아버지의 회사는 대출금에 이자를 요구하는 대신 수확 농작물에 낮은 가격을 지불했다.

 

사람 보는 안목과 농사 기술에 대한 날카로운 판단력을 갖춘 덕분에 두 남자는 손익 계산서에 차질을 빚는 일이 없이 대출금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가 실질적으로 은행업에 진출한 것은 그의 장인인 조셉 쿠네오가 1902년 92살의 나이로 타계하면서 본격화 됐다. 조셉은 똑똑한 투자가이긴 했지만 꼼꼼한 편이 아니었던지 11 명의 자녀들에게 유언장 하나 남겨두지 않았다.

 

다만 연필로 적어둔 기록을 남겼는데 자신의 재산 집행인으로 그를 지목한 것이었다. 조셉은 부동산업이 아닌 「콜럼버스저축대출 조합」이라는 지역 은행의 중역으로 재직했었다. 은행 일을 간절하게 바라던 그는 결국 장인이 일하던 그 조합은행의 중역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에게는 다양한 아이디어와 그동안 쌓아온 인맥이 있었다. 그리고 은행 확장을 위해 간부들과 의논할 광고 문구도 의욕적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그곳은 목소리 크고 힘센 사람이 이기는 부둣가가 아니었다.

 

조합은행은 이탈리아 이민자들에 의해 운용되기는 했어도 JP모건과 같은 활력 없는 원칙들을 고수하던 곳이었다. 뉴욕에 기반을 둔 JP모건의 모건은 은행의 기본을 확립한 인물이었다. 땅딸막한 체구의 젊은이에서 늙은이가 된 모건은 경쟁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모건은행을 흉내 내고 있던 그 조합은행은 돈을 빌려주는 대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물론 개발업자들은 예외였고 성공한 거물들은 언제든지 대환영을 받았다. 그렇다면 작은 식품점이나 모자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은 어쩐다지? 그들은 별다른 미래도 없고, 대출금을 갚기 힘들만큼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없을까? 그는 늘 목소리를 높이고 동료 중역들을 귀찮게 하는 존재였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는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기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는 전문가인 「American National Bank」의 부사장 제임스 J. 페이건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페이건은 몸집이 왜소해도 활기가 넘치며, 한눈에 봐도 아일랜드 출신임을 알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자랑스럽고 든든한 친구이자 동지였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천하는 방법을 페이건에게 물었다. 


“지아코모(Giacomo) 은행을 열려고 하는데 방법을 가르쳐 주시오”


페이건은 눈을 껌벅거리더니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은행만으로도 숫자는 충분하다”고 충고했다. 전문가들은 으레 그랬다. 어떤 아이디어를 가져가면 항상 부정적이었다. 그는 페이건의 말에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은행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조언을 부탁했던 것이었으므로 페이건이 부정적이라고 해서 의지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당장 기존의 은행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은행을 시작할 작정이었다. 


(다음 편에서는 지아니니가 평범한 시민들에게서 발견한 5가지 은행 혁명을 소개합니다)

 

MeCONOMY magazine Septembe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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