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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뉴욕타임스 서평 소개 미개인들의 왕은 어떤 리더십을 가졌을까(2)

 


저출산과 이민시대 다공(多孔)적이고 점진(漸進)적인 정체성과 충성심 필요  



제노 황제가 고민한 사안 가운데 하나는 ‘오도아케르’라는 이름을 가진 제국의 전직 장군과의  문제였다. ‘오도아케르’는 서로마 제국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때가 476년이었다. 역사 교과서들은 그 순간을 정확히 제국이 절반이 갈려져 끝난 해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황제인 제노는 그 순간을 자신의 대리인인 ‘오도아케르’와 함께 모든 것을 통치 할 수 있다는 자신만이 유일한 황제가 되는 기회로 간주하고 있었다. ‘오도아케르’는 마지못해 협조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황제 제노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그에 대해 짜증을 냈다. 그러자 그는 488년 테오데릭에게 ‘제국의 친구인 척하는 친구이자 적’인 오도아케르를 몰아내라는 임무를 주었다.   


테오테릭은 자신의 손으로 ‘오도아케르’를 살해하는 데 성공한 493년부터 로마군의 첫 번째 장군 이상 가는 거물이 되었다. 그는 로마 제국에 속해 있다고 보기에 애매할 뿐 아니라, 실제로 로마 제국과 떨어져 독립 왕국이라고 표시 된 이태리의 한 지역을 다스림으로써 이태리의 왕이 되었던 것이다.  


약 5백만 명에 이르는 테오테릭의 이태리 신민들은 로마인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10만 명 언저리가 고트족이었다. 고트족 대부분은 오래 전에 로마 문화의 많은 요소를 차용해 왔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었고 로마의 포도주를 마셨으며 로마의 식기(食器)를 사용했다. 라틴어도 조금 썼다.

 

그러나 그들 또한, 스스로 공유하고 있는 자신들의 역사와 가치를 가지고 이태리로 왔다. 테오테릭은 그들의 충성이 계속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땅과 지불금을 주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열망은 도전이 되어 그는 자신의 동포인 고트족에게 보상을 하고자 했다. 


고트족은 1세기 이상을 지정학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지냈고 그들보다 수적으로 우세한 로마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다른 민족이라면 로마의 본심을 알 수 없는 제국의 조직체에도 익숙해 있었다. 테오테릭은 화산 폭발이 있던 직후, 그들에게 세금을 면제해 줬고, 나이든 부유한 로마인 여러 가문에게는 그들이 기대했던 칭호를 부여했으며 그들의 송수로(送水路)를 수리해주고 늪의 물을 빼주었다. 


테오데릭은 고트족과 로마인들은 같은 왕국 내에서 서로 다른 것을 빚진 상태이며 서로 다른 형태의 지원이 필요한 동등한 주민(住民)으로 대우하려 했다. 저자인 위머 (Wiemer)는 그런 상태를  공유국가라고도 할 수 있는 ‘이원국가(dual state)’로 묘사하고 있다. 군 지도자로서 그리고 일만 아는 좀스러운 사람이란 양쪽의 특성을 가지고 있던 테오데릭은 통치의 본질을 다공(多孔)적이고 점진적인 정체성과 충성심에 맞췄다. 


융화했다가 분열하는 이민족, 통합을 위한 통치방식이 나올까?  



독자들은 Wiemer가 대중문화와 위키피디아에서 불충분하게 다룬 어떤 기간의 역사를 얼마나 깊이 들어가고 있는 지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다. 그의 글은 아카데믹하지만 내용이 풍부하다. 그의 책은 골동품이 된 고대 사회 말미의 서로 다른 계층을 지배해야 했던 한계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파악하고 있고, 테오데릭이 국가의 힘을 드러내면서 통치를 할 때 사회변화와 다른 계층들의 상호 적 응하는 미묘한 방식이나 느낌을 조심스럽게 포착하고 있다.  


이태리 고트족의 삶은 상당부분 고급 석관(石棺) 제조업 자들이나 부자들이 지나치게 많은 돈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만든 정부의 가격 상한선을 밀고 당기면서 형성되었다. 다양한 문화적 취향을 가진 공손한 청중들에게 딱 맞는 악기를 만든 창안한 가수들이 청중과 밀고 당기듯이 말이다. 저자인 Wiemer는 이 같은 과립(顆粒, 둥글고 잔 알갱이)형 서술을 선호하고 있다.

 

과립형 방식은 우리의 역사 서술에서 일찍이 없었던 획기적인 서술 작업(frameworks) 이다. 불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역사를 큰 그림으로 그리자면 저자인 Wiemer가 ‘문화적 각인’이라고 말하는, 다시 말해 독자 개개인의 시간과 장소를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기간 동안 마키아벨리는 테오도르의 왕 노릇을 훌륭한 통치의 사례로 들었다. 그는 고트족 장군이 전쟁의 시기와 평화의 시기 사이에서 어떻게 그처럼 효율적으로 전략을 바꿨는지에 대해 주로 묻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과 유럽의 작가들은 지금처럼 수렁에 빠진 우리들의 다문화주의에 필요한 교훈을 테오도르 왕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   

 

저자인 Wiemer가 보여주듯이 고대인들은 부패한 공무원 몰아내기, 가축 살찌우기, 공회당 다시 짓기와 같은 더 절박한 현실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휘몰아 치는 역사인식이 없었다는 게 아니므로 테오도르 왕의 통치로부터 ‘현대적인’ 무엇인가가 시작됐고, 로마의 ‘부활’이란 말을 떠올릴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테오도르는 늘그막에 자신에게 후계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유산(遺産)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걱정했다. 이 걱정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황제와 원로원 의원들이 자기 뒤에서 음모를 꾸밀 것이라는 단순한 의심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의심은 그가 보에티우스에 대해 적대감을 갖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는데 이를 눈치챈 이 철학자는 국면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정치적 운동장과 그 운동장에 거주하는 복합적인 신민들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지만 저자인 Wiemer은 일반인들이 테오데릭을 통치자로 확실히 간주할 것인지에 대해 확신하지는 않고 있다.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서 그의 통치 기간은 고무적일 수 있고 실망스러운 것일 수 있으며, 다른 지도자들과 똑같은 그저 그렇고 그런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가장 교묘하게 정체성이 애매하고 불분명한어떤 때는 융화하기도 하였다가 나뭇가지처럼 두 갈래로 갈라진-시대적 이미지를 극복하고 로마 안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 했다. 그가 죽고 나서 겨우 26년 뒤에 또 다른 로마 황제가 그 땅을 다시 정복한 것은 그가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동전에 새겨진 그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 턱수염이 난 것 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기른 것 같기도 하고 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임기응변에 능한 변신이 가능한 지도자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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