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비린내 나던 6.25 격전지 백마고지로 가는 도보여행
도봉산역을 지나 동두천역으로 가는 1호선 전철 차창 밖으로 폭설을 뒤집어쓴 산들이 멀리서 지나가고 있었다. 크고 작은 산들은 능선을 따라 검고 굵은 선이 등골처럼 드러나 흑백으로 그린 대동여지도를 반쯤 세워놓은 것 같았다. 은퇴한 김00 교수와 나는 그날 오전 12시 50분에 종로3가역 플랫폼 7-2에서 만나서 이 전동차를 탔다. 차창 밖 설경을 바라보던 우리는 전동차에 경로 우대증을 지닌 나이 든 사람들뿐이라고 숙덕거렸다. 경로석에 앉은 우리 역시 비슷한 처지였으면서 말이다.
김 교수는 다른 점심 약속이 있었지만 나는 집에서 약속 시간에 맞춰 오다 보니 점심을 먹을 시간이 없었다. 종로3가역 통로 점포에서 2천 원짜리 야채 김밥과 1,300원짜리 인절미 한팩을 사서 먹을 만한 장소를 찾다가 플랫폼 벤치에 앉아 옆 사람 눈치를 보면서 점심 김밥을 먹으려고 했다.
차디찬 김밥의 포장을 벗기고 한 톨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밥알은 깁 밥 속과 달라붙어 떡이 되려고 했다. 혹시 오래된 김밥, 식중독? 그날 0시에 제조 표시가 된 것을 겨우 찾아내 확인하고 보니 이미 12시간이 지나있었다. 그래도 먹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한 줄을 다 먹었다.
나는 배낭에서 인절미 팩을 꺼내 김 교수에게 같이 먹자고 했다. 점심을 많이 먹었다면서 사양한 김 교수는 자신이 가져온 보온병 커피를 뚜껑에다 따라줬다. 예전에 기차 객석에서 먹었던 삶은 달걀, 오징어 땅콩과 달리 전동차에서의 취식은 왠지 공중도덕을 어기는 듯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평소라면 나도 전동차에서 음식을 먹을 정도로 근천을 떨지 않을 만큼 자존심을 먹고 사는 사람이었지만 오늘만 예외였다. 김 교수를 따라 버스의 도착 출발 시간을 정확히 계산하고 걸어서 강원도 철원군에 있는 6.25 격전지 ‘백마고지’에 도착하니까 중간에 점심 먹을 시간이 없었다.
그날따라 동두천역에서 연천역으로 연장 운행되는 전철이 끊겼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동두천역에서 39-2번 버스를 타고 1시간가량 달려 경기도 연천군 신탄리역에 오후 3시쯤 도착했고 거기에서부터 약 9.5km 떨어진 강원도 철원군의 백마고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걷는 동안 나는 꿈을 꾸는 듯했다. 주변은 인적이 뚝 끊긴 가운데 온통 흰 눈으로 덮인 산과 들이었고, 매서운 칼바람과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발자국 소리만이 귀에 들렸다. 간간이 길옆에 옛 경원선의 거무튀튀한 교각이 로마의 유적처럼 남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김 교수는 최근 필리핀에서 개인카드 번호가 들어있는 휴대폰을 분실했는데 걱정했던 일이 터졌다. 누군가 100달러를 결재했다는 자동 메시지가 뜬 것이다. 그는 걸으면서 새로 구입했다는 휴대폰으로 카드를 취소하느라 자동응답 지시에 따라 번호를 수없이 누르고 또 누르며 카드회사와 통화 했다. 그가 마침내 카드 취소에 성공했을 때였다. 멀리 높은 위치의 공중에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국민소득 3만 5천 달러에서 6만 달러 시대로 가려면? 전선의 호국 영령 묻다
“저곳이 6.25 당시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2개 사단과 교전하면서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24번이 바뀌었다는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 백마고지야,”
1952년 10월 6일부터 시작된 이 전투에서 중공군 2개 사단은 1만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와해됐다. 당시 포격과 전투가 어찌나 격렬했던지 고지는 흙먼지와 시체가 뒤섞여 원래의 모습을 잃고, 마치 백마가 옆으로 누워 있는 것 같았으므로 백마고지라고 불렀다.
나는 ‘백마고지 전투 전사자비’에 새겨진 국군 전몰장병들의 이름 앞에서 묵념을 올렸다.
“여러 호국 영령들의 죽음이 없었다면, 어찌 지금의 이 나라가 세계 10위권의 번영을 누리고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참으로 복을 받은 나라인 듯합니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우리나라가 더 강해지지 않는다면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입니다. 50여 일 되면 총선입니다. 어떤 정치인을 뽑아야 국민소득 3만 5천 달러를 넘어 6만 달러 시대로 이 나라가 재도약할 수 있을까요?”
묵념을 끝내는 나를 보고 김 교수가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 나왔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휴대폰에다 카드 번호를 적어 놨는지 모르겠어. 카드 번호만 알면 결제할 수 있는 게 많은데...항공기 티켓을 얼마든지 끊을 수 있고....그러고 보니 정치인은 휴대폰이야. 공약을 띄워놓고 휴대폰을 잃어버리듯 총선에서 지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이니까 말이야.”
그의 말이 맞다. 선거에서 지면 정치인은 모든 것을 잃는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정치인은 내일 당장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자신이 선거에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공천을 받느냐 못 받느냐-그 방법은 수백 가지가 있겠지만-에 사활을 걸고 덤비는 거겠지.” 내가 맞장구를 쳤다.
김 교수가 말했다. “그러니까 국가 안보나 외교를 정치인들에게 맡겨놓을 수가 없다니까. 그들에게 끌려다녀선 안 된다고. 지금 정치는 국민과 나라의 짐을 넘어서서 바이러스 같잖아”
우리는 백마고지를 뒤로하고 내리막길을 걸어서 묘장초등학교 버스 정류장까지 왔다. 6시 12분 버스를 타야 한다. 마침 정류장 옆에 빛바랜 ‘대마상회’ 간판이 눈에 띄어 안으로 들어가 기다리기로 했다. 가게 안은 장작 난로를 때서 훈훈했고 진열장에는 일반 슈퍼에서 파는 상품 종류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쥐죽은 듯 조용했다.
“라면, 국수 부탄가스 알루미늄 호일 .....없는 게 없네, 난리가 나도 한 달 이상 먹고 살겠어” 김 교수가 가게를 둘러보며 말했다. 깔끔한 표정의 여주인이 우리의 도보 여정을 듣더니 믹스커피를 타 주면서 몸을 녹이고 가시라고 친절하게 대했다. 우리는 스낵과 초콜릿 바를 사서 커피와 함께 먹으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나라의 앞날과 내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우리가 만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네. 사라호 태풍 피해를 입고 이주했다는 이 마을도 그렇고, 사람 만나기 힘드니....지방이 소멸하고 인구가 감소하는 곳이 이곳뿐이겠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정치인을 판단하려면 국가 안위, 인구 절벽, 기후 위기, 환경오염 문제 등과 같은 국가의 본질에 대해 그들이 어떤 일과 말을 해왔는지를 봐야 하는 거 아니겠어? 거기에다 지금 세계 각국이 기술 패권 전쟁을 치르고 있잖아. 그러니 이전처럼 감정적으로 투표하면 우리는 나쁜 정치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거야.”
우리는 귀로에 동두천역과 한 정거장 떨어진 보산역 주변의 터키식 퓨전 케밥 집에 들렀다. 소문난 맛집이어서 그런지 주변 미군 부대 군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간이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보면서 케밥을 먹던 나는 소설가 김진명(67) 씨와 인터뷰한 월간중앙의 기사를 읽었다.
김진명 작가는 “선거의 본질은 심판이고 정치는 나의 신념과 철학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포퓰리즘·중우정치와 다른 맥락에서) 국민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들어주고 동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나라 선거 구도에서 3분의 1은 민주당, 3분의 1은 국민의힘 편이다. 나머지 3분의 1은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감정적 측면에서 보면 민주당에 유리할 요소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180석을 가졌던 민주당은 해놓은 것이 없다. 특히 우리나라가 살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편인 (외교 국방 등)국제 관계에서 그랬다. 중도층 3분의 1은 이런 것들을 보는 눈길을 가졌다. 그러니 그리 쉽게 어느 한쪽의 완승을 점칠 수 없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밤 11시였다. 백마고지는 내가 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1박 2일 출장으로 다녀와야 할 먼 곳이었다. 그런 곳을 대중교통과 도보만으로 9시간에 갔다 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짧은 시간에도 2시간을 걸으면서 나라의 앞날과 내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투표함을 열어보기 전까지 그 결과는 귀신도 모른다는 선거라지만, 다가올 4월 10일 총선에서 누구를 찍어야 할지 이번 백마고지 도보여행을 통해 확실하게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