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 선고 판결문인데 내용이 너무 길고 복잡해. 알기 쉽게,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다 반영해서 분석·요약해줘”
얼마 전 법조인들을 대상으로 어느 법률사무소의 AI 강의에서 위와 같은 명령어를 AI에 입력하자 60장에 달하는 판결문이 5초 만에 분석되어 나왔다.
AI의 분석은 판결문을 목차별로 나눠 '사건의 개요' '본안에 대한 판단' '결론' 등으로 구분해 의견을 제시했고, 사건 발생 원인과 진행 과정, 법원의 판단과 그 이유, 결론까지 전체적인 흐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AI에게 ‘패소를 했을 때 재심을 요구하면 승소할 가능성을 다른 판결문을 참고해 '최대한 객관적인 관점'에서 판단하는 의견서를 작성해 달라’고 하자 역시 5초 만에 답변을 내놓았다.
AI의 답은 "종합적 사정을 고려해볼 때 승소 가능성을 장담할 수는 없으나, 현재로서는 항소를 제기해 볼 만한 사안으로 사료된다,"는 의견이었다.
AI 활용법 심화 강의를 듣는 법조인들은 "의견서의 최종 버전으로 사용할 만큼 100%의 완성도는 아니지만 초안으로 활용하기에는 충분하다"며 감탄을 쏟아냈다.
사회 전반에서 쓰임이 늘고 있는 AI가 법조계에서도 점점 더 사용 비중이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AI를 적절히 활용하면 업무 효율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만큼 남는 시간을 다른 업무에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가 기존의 방식으로 소장 작성과 판결문 분석, 항소 실익 판단을 비롯한 업무를 처리하려면 보통 사건 한 개당 하루를 통째로 써야 한다. 재판을 준비할 때는 상대방이 제출한 수십 장의 준비서면을 일일이 검토하고 이에 대한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법원에 제출하기 위한 서류를 작성하는 데만 짧게는 3~4시간이 걸린다. 사건 난이도나 진행 상황에 따라 길게는 며칠이 소요되기도 한다. 이 같은 방식으로 근무하는 변호사 한 명이 맡는 사건은 한 달에 평균 40~50건이다. 많은 경우 1인당 평균 60~70건까지도 맡는다. 업무가 밀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변호사의 집중력과 체력은 물론 업무 효율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블룸버그의 법률 리서치 서비스인 '블룸버그 로'는 최근, 변호사가 AI를 활용할 경우 업무에서 40~60%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법무법인을 위한 업무용 솔루션을 제공하는 '클리오'는 변호사가 AI를 쓰면 법률 업무 시간을 최대 50%까지 단축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이 같은 해외의 연구결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법조계에서 AI 도입은 아직 꿈같은 이야기다. 수년 동안 사법시험과 로스쿨 시험을 준비하고 평생을 법률시장에 몸담아온 법조인들이 주류인 한국 법조계는 대표적인 '보수적 조직'으로 꼽힌다.
다른 분야에서 AI 도입을 시작하면서 성능 등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들었지만, 법률 분야에서는 '아직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변호사들이 몸담고 있는 법무법인이 워낙 보수적인 조직이고 평생을 우직하게 법률 공부만 한 사람들이 많아 오히려 AI를 '돌연변이'로 치부하는 경우도 많다"며 "주변을 둘러봐도 변호사들이 '기계가 뭘 아느냐'는 말만 할 뿐, 법률 업무에 AI를 활용하는 경우는 아직 거의 없다"고 말했다.
법조인들은 특히 AI 활용으로 인한 '할루시네이션, hallucination, 인공 지능 알고리즘에 의해 그럴 법하게 사실처럼 생성된 정보)를 가장 우려한다. 만약 AI가 근거가 없는 허위 법령 등을 제시할 경우 업무에 큰 차질을 빚을 수 있고 종국에는 패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법조인 개개인의 'AI 숙련도'에 따라 할루시네이션을 피할 수 있는 노하우도 마련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대표적으로 특정 법령에 대해 질문할 때 단순히 '알려 달라'고만 하지 말고, '답변의 근거가 되는 법령을 명시해 달라'거나 '근거가 불확실하다면 추측이나 개인적 의견은 자제하라'는 식으로 구체적 명령어를 추가하는 방법이 있다.
AI 심화과정 강의를 들은 한 변호사는 "강의에서 실제 업무와 관련한 AI 활용법을 접하고 다음 날 바로 회의에서 사용할 자료를 시험 삼아 만들었는데 굉장히 의미 있는 초안이 나왔다"며 "어떤 정보를 어떻게 입력하느냐에 따라 활용 범위가 광범위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