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고환율·고금리·고물가 3고(高)와 내란사태로 정치 불안 요소 악재까지 시달렸던 한국경제가 올해 내수경기 부진이 본격화되면서 시장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특히 내수 지표인 소매 판매가 2003년 ‘카드 대란’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줄어 21년 만에 최악의 ‘소비 절벽’이 나타났다.
이를 반영하듯 ‘고용 한파’ 속에 상용직 취업자 증가 폭이 22년 만에 최소를 기록하는 등 임금근로자 고용의 질이 나빠지고 소비 위축에 자영업자들의 폐업은 갈수록 늘고 있다.
지난해 10월 소상공인 폐업자 속출에 정신없이 바빴던 이호영 드림철거연합 실장은 올해 초에는 하루 10~15개 업체의 철거로 더 바빠졌다고 한다. 그는 “아직도 줄 서서 대기하는 자영업자들이 많다. 기존에 돈이 모자라 철거를 못한 분들도, 투잡을 뛰고 ‘영끌’해서 돈을 모은 자영업자도 늘면서 건수가 더 늘었다”며 “회사 수익은 증가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계속된 폐업자 증가는 차후에 엄청난 자영업자들이 사라져 철거 회사에도 좋은 일은 아니다”고 말한다.
●한계에 다다른 자영업자와 민간소비 위축...산업 생산 증가율 최악
5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과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자영업자는 565만7000명으로 전년보다 3만2000명 줄었다. 자영업자 규모는 2021년 이후 처음 감소했다. 2022년과 2023년에는 각각 11만9000명, 5만7000명 늘었다.
특히, 1인 자영업자 감소세가 두드러졌다.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는 전년보다 4만4000명 줄어든 422만5000명으로, 2018년 이후 처음 감소세로 전환했다. 2019년 8만1000명, 2020년 9만명, 2021년 4만7000명, 2022년 6만1000명 증가하다가 2023년에는 증가폭이 3000명으로 축소됐다.
전체 산업 생산 증가율도 1%대에 그치고 있다. 3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산업 생산은 전년보다 1.7% 증가했다. 전 산업 생산 증가율은 2022년 4.6%였으나 2023년 1%로 하락한 뒤 좀처럼 반등을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제조업 분야에서 생산과 투자는 ‘선방’했지만 소비 분야는 2.2% 감소하며 3년 연속 뒷걸음질했다. 1995년 통계를 집계한 이래 최장기간 마이너스 행진이다. 3고에 실질소득이 줄어든 데다 임금 역시 후퇴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임광현 의원이 비용으로 인정되는 기업의 ‘업무추진비’를 한시적으로 상향하자고 제안했다. 기업이 업무추진비로 돈을 쓰도록 유도해 침체된 내수 시장을 살려보자는 것이다.
임 의원은 “지금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이 ‘너무 어렵다, 코로나 때보다 더 힘들다’고 절규하고 있다”며 “실제 지난해 폐업사업자 수는 98만 5868명으로, 코로나가 절정이었던 2020년 89만 5379명보다 더 높은 수치다. 신규사업자 대비 폐업사업자 비율도 2023년 77.3%로 최근 4년 중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고 말했다.
민간의 소비지출 규모 역시 ‘제자리걸음’이다. 임 의원은 “2024년 4분기 가계 최종소비지출은 262조 3600억 원으로 전분기 262조 613억 원 대비 0.1% 증가하는데 그쳤다”면서 “2024년 3분기의 전분기 대비 증가율은 0.5%였는데 증가율이 1/5로 쪼그라든 것이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데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고 했다.
●소매판매액 최대폭 감소...유통·건설 경기도 찬바람 쌩쌩
대표적인 소비 지표인 소매판매액 역시 21년 만에 최대 폭으로 감소했다. 여기에 내란 정국과 트럼프 리스크 등 대내외 불확실성에 3년 연속 세수 결손에 대한 우려마저 커지면서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의 필요성이 커지는 모습이다.
또한 ‘골목상권’ 숙박·음식업 생산은 34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고꾸라졌다. 3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12월 및 연간 산업활동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재화소비를 뜻하는 소매판매액 지수는 전월보다 0.6% 줄었다.
더불어 지난해 소매판매액은 1년 전보다 2.2% 줄었다. 신용카드 대란 사태가 있던 2003년(-3.2%) 이후 최대 폭 감소다. 함께 소비 지표를 구성하는 서비스업 생산은 1.4% 증가했지만, 내수 밀접 업종인 숙박·음식업은 전년보다 1.7% 감소하는 등 내수 부진의 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는 장기 불황이 이어지자 소비자들의 지갑마저 닫은 것으로 분석된다. 소비심리가 뚝 떨어지면서 유통업계가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폐업 신고를 한 통신판매 업체가 총 9만4850곳으로 집계됐다.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던 전년(7만8580곳)보다 1만6270곳(20.7%) 급증한 수치다.
대형 유통사도 예외가 아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의 조사를 보면, 이마트의 지난해 매출은 29조1658억원, 영업이익은 1499억원으로 추정된다. 롯데쇼핑 역시 지난해 3분기 전망치 대비 매출이 약 1200억원 줄었다. 신세계는 지난해 연 매출이 6조4942억원으로 약 2.2% 늘었지만 영업이익(5259억원)은 17.8%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면세점의 경우, 주요 업체 4곳(신라, 롯데, 신세계, 현대)은 모두 지난해 1~3분기 면세점 4개사의 누적 적자가 1355억원에 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건설업도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지난해 4분기 건설 실적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큰 폭으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4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건설기성액(불변)은 30조4492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10.1% 줄었다. 이는 4분기 기준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15.3%) 이후 16년 만에 가장 크게 감소한 것이다. 전체 분기를 통틀어서도 2011년 1분기(-11.1%) 이후 감소율이 가장 컸다.
●정치권 긴급 추경 필요성 공감대... 민생 추경 외 AI·반도체특별법도 시급
이창용 한은 총재는 이례적으로 통화정책 외에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을 통한 경기 부양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언급했다. 정부는 올해 경제정책방향에서 발표한 18조원 경기보강 패키지, 재정 신속집행 등을 통해 내수 회복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을 밝혔다.
국민의힘 김대식 원내수석대변인은 3일 “반도체 특별법을 처리하는 것은 단순한 법안 처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를 지키고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이재명 대표가 AI 추경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정작 실행은 미루는 모습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할 것이다”며 반도체 특별법에 집중하는 논평을 했다.
한편 추경보다 본예산을 1분기에 조기 집행하는 쪽에 무게를 뒀던 국민의힘도 기류가 달라지고 있기도 하다. 김상훈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4일 “추경 논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야당·정부와) 대화할 예정”이라며 “반도체특별법 주 52시간제 예외 조항이나 연금특위 가동 등 협의 조건이 원만하게 마무리되면, 추경을 편성할 수 있도록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5일 정부를 향해 긴급 추경 추진을 촉구했다. 이 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내 경제 상황이 너무 어렵다. 온 국민이 아우성치고 민생이 정말 나빠지고 있는데 우리 정부가 아무리 과도 정부라 해도 지나치게 덤덤한 것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나아가 이 대표는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향해 “말로는 내수 부진의 골이 깊어진다고 하는데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며 “18조원 규모의 경제 보강 패키지 개선 조치를 매주 1회 강구하겠다고 한다는데 추경을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고 날을 세웠다.
그러면서 추경보다는 반도체특별법에 집중하고 있는 국민의힘 지도부를 향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 가면서 무조건 반대, 일단 반대 이런 태도로 어떻게 나라 살림을 하냐”며 비판했다.
한 경제학자는 “한국경제를 둘러싼 적신호가 켜졌는데 실상은 이렇다 할 묘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한다”며 “여야 대립과 최상목 권한대행 체제로는 위기극복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안도걸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정부의 성장기여도를 보면 4분기는 제로, 연간으로는 0.4% 포인트에 불과했다”며 “이는 장기(2000~2023년) 평균 0.8% 포인트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수치다. 2년 연속 발생한 세수 손실과 건전재정 집착으로 재정이 제 역할을 못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꽁꽁 언 내수시장과 위기의 한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긴급 추경의 규모와 방식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20조원 규모의 AI(인공지능) 및 민생 추경을 긴급히 추진해야 한다”며 “AI 패권 전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AI 추경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고, 지금 골목상권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민생 추경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김현동 배제대 경영학과 교수 “최상목 권한대행과 여·야 정치권에서는 어느 정도 추경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지만 방식 측면에서 이견이 있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추경은 세금에 의한 증세와 국채 발생의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국채가 합리적인 대안이다. 정부 곳간을 고려해 보면 15~20억 원 규모의 추경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소비심리 위축과 자영업자 폐업 등 민생 경기 위기에 대해 김 교수는 “파격적인 대책이 나오기 힘든 상황이지만 자영업자에게 대출 상환 유예와 저리 대출, 채무 탕감 등 일시적 방안과 지역화폐 지원을 통해 중·장기적 소비 확대가 가능하다”며 “무엇보다 정치가 안정되고 장기적으로 잠재성장률을 높일 수 있는 정부 정책이 뒷받침돼야 서민 경제도 되살아날 수 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