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했다는 소식이 국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지정배경을 놓고 정재계 여파가 확산되고 있다. 외교부는 앞서 미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국가 명단에 포함한 것은 “외교정책상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에 대한 보안관련 문제가 이유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지만 논란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17일(현지시간) 미국의회에 제출된 에너지부 감사관실 반기보고서에서 미국 아이다호국립연구소(INL)의 도급업체 직원이 수출통제 대상에 해당하는 정보를 소지한 채 한국으로 향하는 항공기에 탑승하려다 적발돼 해고된 사건이 주목됐다. 이 사건은 보고대상 기간인 2023년 10월 1일부터 2024년 3월 31일 사이에 발생된 것으로 적시됐다.
해당 직원이 한국으로 가져가려고 한 정보는 INL이 소유한 원자로 설계 소프트웨어 특허정보로 외국 정부와 소통한 후 이 같은 일을 벌인 것으로 파악됐다. 미국 측은 외교부에 한국 연구원들이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 등에 출장이나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보안규정을 어긴 사례가 적발돼 명단에 포함됐다는 취지로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한 것이 산하 연구소의 보안문제 때문인 것으로 정부가 공식발표했지만 정치권에서는 날선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의 핵무장론에 책임을 물었던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국민의힘은 ‘선동정치, 괴담유포’라고 역공했고 민주당은 핵비확산에 대해 미국의 신뢰를 잃은 현 정부와 여권에 책임이 있다고 맞받아쳤다. 민주당은 민감국가 지정에 여권의 핵무장론과 비상계엄선포로 미국의 신뢰를 저버린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 에너지부와 정부의 공식발표에도 ‘민감국가’ 지정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미 에너지부 자료와 국내 전문가들을 통해 논란이 되고 있는 핵심쟁점을 살펴봤다.
◇ 美 에너지부, 韓 민감국가 지정... 핵무장 사전차단?
미 에너지부(DOE)의 ‘민감국가’ 지정 소식이 알려지자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 것이 한국의 ‘핵무장론’이다. 로이터도 15일(현지시간) 미 정부가 오는 4월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한다고 보도하며 이는 독자 핵무장 우려를 반영한다고 분석했다.
이는 최근 국회 양당이 '독자 핵무장' 의제에 동의하고 있던 것과 윤석열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이 북한의 핵 프로그램과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에 대한 우려 속에서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한 미국의 우려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 에너지부는 이에 대해 선을 그었다. DOE는 국내 언론에 "현재 한국과의 양자간 과학·기술 협력에 대한 새로운 제한은 없다. 에너지부는 한국과 협력해 상호 이익을 증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하며 “많은 지정 국가가 에너지, 과학, 기술, 대테러, 비확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과 정기적으로 협력하는 국가들이다. 민감국가에 지정됐다고 기술협력을 금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문근식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도 이와 의견을 같이 했다. 그는 M이코노미뉴스와의 통화에서 “핵무장을 한다는 얘기는 어느 나라나 다 할 수 있다. 이런 말을 했다고 민감국가로 지정됐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비핵화와 관련된 지정이라면 우라늄 농축시설 등 근거가 확실할 때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핵문제와 더불어 국내에서 미국이 한국을 ‘민감국가’에 포함시킨 이유에 ‘비상계엄·탄핵정국’ 등 정치·정책적 측면도 거론되고 있다. 지난해 말 윤석렬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동맹국인 미국에 알리지 않아 약화된 한미동맹 때문에 발생됐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이도 확대 해석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한국의 민감국가 지정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국무부는 물론이며 에너지부 내에서 한국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도 한국 정부의 문의가 있을 때까지 지정 사실을 몰랐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이에 대해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분명한 것은 계엄 사태와 야당의 줄 탄핵 등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분명히 밝혀진 것 같다”고 말했다.
◇ 美 에너지부, 민감국가 지정 후 韓과 '원전협력 MOU'
그렇다면 미 에너지부는 왜 한국을 ‘민감국가’ 명단에 포함했을까. 일각에서는 한미 간 원자력 기술경쟁에 원인이 있다고 보고 있다. 미국 원전 기업인 웨스팅하우스가 체코 원전 수주전에서 고배를 마신 뒤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을 상대로 지식재산권 분쟁 등을 제기한 바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체코 원전을 비롯한 글로벌 원자력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도 설득력을 잃는다. 미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국가’에 지정한 것이 1월 초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1월 8일 미 국무부와 에너지부는 우리나라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와 더불어 원자력 수출 및 협력원칙에 관한 MOU를 맺었다. 양해각서에서 “양국은 핵 안전, 보안, 보호 및 확산 방지에 대한 가장 높은 국제표준에 따라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극대화하려는 상호 헌신을 반영한다”고 명시하며 “당사자들이 제3국에서 민간 핵에너지를 확대하는데 협력하고 민간 핵기술에 대한 수출통제를 각자 강화할 수 있는 프레임워크를 제공한다”고 밝혔다.
이후 16일에는 상호협력 각서에 이어 웨스팅하우스가 한국수력원자력에 대한 소송을 취하하며 화해협정을 체결했다. 미 에너지부는 협정에 대한 보도자료에서 “이 상업적 협정은 지난주에 체결한 원자력 수출 및 협력 원칙에 대한 정부 간 MOU와 함께 민간 원자력 에너지 협력을 한미 관계의 매우 강력하고 지속적인 요소로 촉진할 것”이라고 평화적 핵에너지 협력을 다시한번 공포했다.

조셉 윤 주한미국대사대리도 18일 주한미국상공회의소와 주한미국대사관이 공동주최한 좌담회에서 이와 같은 의견을 냈다.
윤 대사대리는 민감국가 사태와 관련해 "마치 큰 문제인 것처럼 상황이 통제 불능으로 된 것이 유감"이라며 "큰일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민감 국가 리스트라는 건 오로지 에너지부의 연구소에만 국한된 것"이라며 에너지부 산하에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 등 여러 연구소가 있고 작년의 경우 2000명이 넘는 한국 학생, 연구원, 공무원 등이 민감한 자료가 있는 연구실에 방문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연구하기 위해 실험실에 가는 한국인들이 너무 많아서 일부 사건이 있었고, 그래서 이 명단이 만들어졌다. 한국이 민감국가 명단에 오른 것은 일부 민감한 정보에 대한 취급 부주의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언론에서는 이를 정책 때문이고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협력 등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하는데 틀렸다"고 강조했다.
◇ 트럼프, 관세전쟁에 '민감국가' 이용할 우려... 韓 신중한 접근 필요
미 에너지부의 민감국가 지정이 산하 연구소에 국한된 조치라는 사실이 밝혀진 가운데 미국 정부는 앞으로도 한국에 여러 분야에서 협력을 요청해 올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시절부터 끊임없이 한국에 조선방산 분야 협력을 요청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미국 의회는 외국에서도 미군 함정을 유지·보수 할 수 있는 법안까지 손보고 있다.
윤 대사대리는 “이번 조치는 인공지능(AI) 및 바이오 기술 분야를 포함한 한미 간 협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다시한번 설명하며 “지난 1월 한미가 AI 확산 방지를 위한 협력을 맺으면서 한국이 ‘1등급’ 국가로 지정됐다. 이는 미국이 한국과의 협력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김재천 교수도 이제는 양국의 기술협력이 차질 없이 진행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제는 문제를 키우는 것보다 양국 간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트럼프 정부가 민감국가를 압박수단으로 활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단 관측과 함께 이에 대해 정부가 대미협상에 신중하게 나서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미 간 첨단기술 협력에 앞장서고 있는 과기정통부는 이 문제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과기부 산하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아이다호 국립연구소와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기술인 파이로 프로세싱 공동 개발을 하고 있으며,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은 로런스 리버모어 연구소, 아르곤 국립연구소, 브룩헤이븐 국립연구소와 이차전지, 재생에너지, 계산과학 분야에서 공동 연구를 진행 중이다. 또한,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은 로런스 버클리 연구소와 바이오 파운드리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관계자는 “한미 과학기술 협력에 있어 미래에 지장이 없도록 앞선 추측을 삼가며 신중을 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크리스 라이트 미 에너지부 장관을 만나 에너지 협력을 주된 의제로 협의하는 방안을 추진하기 위해 방미일정을 조정 중이다. 안 장관은 협의가 이뤄지면 한국을 ‘민감국가’ 목록에서 빼 달라는 요청도 할 것으로 알려졌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도 18일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차관들을 불러 대책 논의에 들어갔으며, 4월 15일 민감국가 명단이 공식 발효되기 전에 지정 해제를 위해 미국 정부와 협상을 이어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