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필자가 듣는 고전강독 시간에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팔순의 훈장은 자신의 집에 쥐가 들어와 겁을 먹은 아내가 주방에 들어가질 못한다는 거였다. 방역업체까지 불렀지만 정작 쥐는 잡지 못하고, 쥐구멍 두 개를 막는 데 출장비만 20만 원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80대 중반의 수강생 한 분이 웃으며 말했다. “군 오징어 미끼로 쥐덫을 놓아보세요” 그 한마디에 교실은 금세 어린 시절 이야기로 번졌다.
천장에서 쥐들이 밤마다 뛰어다니며 운동회를 열던 시절이 있었다. 누구는 비료 포대로 천장을 막아 쥐를 몰아 잡았고, 또 누구는 쥐꼬리를 묶어 학교에 가져가야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쥐는 그저 불쾌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식량을 축내는 ‘적’이었다. 그 시절의 농촌은 쥐와의 전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켜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쥐보다 더 큰 문제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근 뉴욕타임스는 『인구 폭탄, The Population Bomb』의 저자로 유명한 미 스탠포드 대학교 생물학 교수였던 폴 R 얼리치(Paul R. Ehrlich)가 9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기사를 전했다. 그는 인구 폭증이 식량 위기를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했던 생태학자였다. 그의 주장은 한때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이후 과장된 비관론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말년에 이르러서는 “지금이라면 더 종말론적으로 말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그의 경고는 틀렸을까? 아니면 우리가 잠시 잊고 있는 것일까? 훈장은 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은 농약 때문인지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남한강가에서 자란 그는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요란한 개구리울음이 기억 속의 풍경이 되었다고 했다. 생태계의 작은 변화가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이르는 것은 아니겠냐는 그의 말끝에는 깊은 한숨이 묻어 있었다.
쥐는 줄어든 것 같지만-사실은 그렇지 않다. 도심에서 새벽 2시쯤 되면 고양이 크기의 쥐들이 돌아다니며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개구리도 함께 사라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풍경의 변화가 아니다.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다. 한쪽에서는 과거처럼 쥐가 식량을 갉아 먹는 일이 줄어든 듯 보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농약과 개발로 인해 생명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으니 우리는 어쩌면 더 근본적인 것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식량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쥐와 싸워 곡식을 지켜야 했다면, 이제는 기후 변화와 토양 황폐화, 그리고 농업 인구의 감소가 더 큰 위협이 되고 있으니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이 오히려 커지는 셈이다.
폴 얼리치 교수의 경고는 단순히 ‘인구가 많아진다’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인간이 자연의 한계를 넘어서려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더 절박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고전강독 시간의 쥐 이야기는 한낱 옛날이야기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우리가 지나온 시간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마주할 미래가 함께 담겨 있었다. 쥐를 잡던 손,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던 귀,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던 감각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말이다.
봄이 왔으나 자연의 소리는 멈췄다. 그렇게 흔하던 호랑나비나 노랑나비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종달새의 지저귐마저 사라진 들판에서 요란한 농기계 소리만 울린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잃고 있으며, 무엇을 지켜야 하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