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18 (목)

  • -동두천 -0.5℃
  • -강릉 5.0℃
  • 흐림서울 0.8℃
  • 연무대전 1.3℃
  • 연무대구 5.2℃
  • 연무울산 4.6℃
  • 박무광주 3.4℃
  • 연무부산 7.1℃
  • -고창 0.3℃
  • 박무제주 6.9℃
  • -강화 -1.8℃
  • -보은 -0.3℃
  • -금산 -0.5℃
  • -강진군 2.5℃
  • -경주시 2.5℃
  • -거제 3.9℃
기상청 제공

피플&CEO

가재울 사람으로 살아온 32년 “이젠 제 고향입니다”

윤희식 국회입법정책연구회 수석연구위원

 

 

가재울은 서대문구 북가좌동에 있던 마을이다. 가재가 있고 산이 둘러싼 데서 유래된 이름인데 한자명으로는 가좌리(加 佐里)라 하며 이계말이라고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수도를 관 할하는 관청의 명칭인 한성부 북부 연희방(성외) 가좌동이었 다. 인구가 늘어나자 가좌1, 2계로 나눴다가 다시 남가좌동, 북 가좌동이 됐다. 서울이지만 서울 같지 않은 지역이라 아직은 이웃 간의 정도 남아 있다. 32년 전 이곳에 터전을 잡아온 윤 희식 국회입법정책연구회 수석연구원은 여기만큼 살기 좋은 곳이 없다고 말했다. 가재울을 사랑하는 남자, 그는 왜 여기에 발을 붙이고 살아왔을까?

 

가재울은 윤희식 수석연구위원에게 제2의 고향이다. 지난 86년 명지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이 지 역에 둥지를 튼 후 줄 곳 여기서 살았다. 벌써 32년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맑은 공기가 창문을 통해 들어 오는 이곳은 그에겐 포근한 엄마와도 같다. “정말로 정()이 많은 곳이죠. 도심 속의 시골이랄까. 아무튼 서울인데도 서울 같지 않은 그런 곳이에요(웃음).”

 

가재울이 자신에게 큰 행운을 안겨 준 곳이라서 더욱 정이 간다는 그는 전라남도 해남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던 아버지께서는 막내아들인 그를 유별나게 예뻐했다.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유년시절을 보내고 중학교를 졸업한 뒤 목포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객지생활을 시작한 그는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명지대학교로 진학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 중에 후기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두 군데였어요. 당시 명지대학교는 야간이었는데 어쨌든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오기 위해서는 진학해야 했었죠.”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게 됐다는 시골뜨기의 안도감과 미래의 꿈을 설계할 수 있다는 기대감은 그리 녹록치 않은 현실을 안겨줬다. 그가 대학에 진학한 86년 한국사회는 민주화 진전을 위한 사건 발생이 잦으면서 대학가에서는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했다.

 

입학서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학내분쟁과 민주화 투쟁을 시작해야 했죠. 무언가 바꿔야 한다는 젊은 혈기는 군사독재 정권과 맞서야 했습니다. 1, 2학년 때는 학교운영에 대한 민주적이고 투명한 운영을 요구하며 시위를 주도했었죠. 학점은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2학년을 마친 후 여러 이유로 1년간 휴학하고, 다시 복학해서 돌아와 보니까 1, 2학년 때 펑크 낸 점수를 때워야 하는 힘든 과정이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정말 힘들었죠. 3,4학년 때는 과대표를 맡아서 1, 2 학년 때 하지 못했던 것들을 보상이라도 하듯 열심히 했습니다. 명지대학교는 어떻게 보면 저희 세대들이 야간수업을 주간수업으로 바꿔나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봐야죠. 지금도 동문회에 나가서 후배들을 만나면 선배들의 투쟁을 잊지 말라면서 은근히 어깨에 힘을 주곤 합니다(웃음).”

 

증권사 분석가로 활동

 

대학 졸업 후 그는 현대증권에서 투자분석가로 일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출근해 기업실적을 예상하고 증권을 평가하는 것에서부터 증권의 가격변동과 수익률 추세 등을 분석 고객에게 투자정보를 제공하는 등 투자 방향에 대해 자문하는 역할이었다. “당시는 증권시장이 아주 좋았어요. 자고 일어나면 주가가 올라갈 정도로 호황이었으니까요. 일하는 것도 재미가 있었죠.” 그가 정치권과 인연을 맺은 건 그때 즈음이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박태영 전 장관님(1대 산업자원부 장관)께서 97년 대선에 합류해서 일을 도와달라고 하는 겁니다. 대선 때 그분이 새정치국민회의 재정금융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계셨는데, 승리를 위해 금융인들의 조직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간사역할을 맡아 달라는 겁니다. 증권사는 새벽 정보회의부터 업무가 일찍 시작해서 오후 3시가 되면 폐장을 하니까 시간도 있고 거부할 수도 없어서 합류를 하게 됐죠. 거기서 참 많은 걸 보고 배우게 됐습니다.” 대선 후 다른 사람들은 여기저기 자리를 찾아 다녔지만 그는 다시 증권사로 돌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당시는 증권시장이 워낙에 좋아서 저로선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웃음).”

 


남양알로에 대리점 운영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눈앞의 것만 쫒다 보면 정작 필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안목도 그랬다. 2년 후 급변하게 변하는 사회를 읽지 못했던 것이다.

 

증권시장이 점점 안 좋아지더니 2년 후에는 어렵게 되더라고요. 고민이 참 많이 됐죠. 그때 평소 알고 계시던 분(이름만 되면 알만한 정치인)이 남양알로에 대리점을 한 번 해보라는 겁니다. 그때는 주부들이 방문판매하는 업종이 호황을 누릴 때였어요. 집사람하고 둘이서 3개월 간 다니면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서대문에 약 80평 규모의 남양알로에 서대문지사를 차렸어요. 만만치 않더라고요. 가가호호 방문판매를 하는 주부사원들을 모집하고 관리해서 영업활동을 하게 해야 하는데 주부들의 성향과 심리를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사업이 될 리가 없죠. 고생도 정말 많이 한 것 같아요. 3년 반만에 아파트 두 채를 고스란히 날리고 접었습니다. 막막했죠. 증권 시장은 이미 안 좋아져서 갈 곳도 없고 다른 일은 해본 적이 없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요.”

 

그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다름 아닌 고향선배였다. 마침 재건축 재개발이 한창 붐을 일으킬 때인데 회사 내 행정관련 전문가가 없으니 기획실장으로 일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라서 흔쾌히 가겠노라고 한 후 4년 정도를 그곳에서 일했다. 지역 내에서는 열심히 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시의원에 출마해 보라는 권유도 많았다. 여건이 되질 않아서 결국 출마를 하지는 못 해지만 열심히 준비했다. 그러나 정치라는 게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느끼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

 

강한 정신력으로 신체장애 극복

 

장애와 세월을 극복해낸 거장, 이츠하크 펄먼은 4세 때 앓은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잃었지만 소아마비가 회복된 뒤 다섯 살의 그는 바이올린을 쥐었고 장애를 딛고 일어서 20세기를 대표하는 21세기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 윤희식 수석연구위원 또한 펄먼과 똑같은 나이 4세에 소아마비를 앓아 평생 한쪽 다리를 절며 살아야 했다. “어릴 때 고향에 큰 병이 돌아서 제 또래 아이들이 많이 목숨 을 잃었다고 해요. 아버지께서는 그나마 깨인 분이라 저를 살리기 위해 광주 등 도시에 있는 용한 의원을 찾아다니셨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죠. 그러다 4살 때 또 소아마비를 앓게 되면서 왼쪽 다리가 이렇게 된 겁니다.”

 

그에게 사춘기는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건 감내해야 할 인내를 필요로 했다. 가장 힘든 건 운동회였다. 친구들보다 더 잘 달리고 싶었지만 늘 꼴찌를 도맡아 해야 하는 그에게 운동시간은 죽기보다 싫은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해본 적은 없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까지 친구들이랑 등산도 자주 갔고 한라산 백록담 등반도 여러 차례 다녀왔습니다. 저는 친구들과 화합이 필요한 스포츠를 아주 좋아합니다. 대신 축구를 할 때는 골키퍼, 야구할 때는 투수와 같이 스피드가 덜 필요로 하는 포지션을 차지하죠(웃음).” 도전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는 신체적 조건이 아니라 그 사람의 노력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지금도 도전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45만원 짜리 구두만 신는 이유

 

그의 소지품 중 가장 비싼 것은 신발이다. 45만원 짜리 구두를 고수하는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불량 발 때문이죠. 기성화를 신어서 발이 익숙해지도록 습관을 들였어야 하는데 그걸 못한 겁니다. 너무 후회가 되죠. 대학 다닐 적만 해도 아무 신발이나 발에 맞으면 신었거든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다니까 아는 선배가 구두를 한 켤레 맞춰주겠다는 겁니다. 당시는 옷도 마찬가지지만 구두도 맞춰서 신는 수제구두가 유행했어요. 그때 구두 가게 사장님께서 저처럼 다리가 불편한 사람은 구두를 맞춰 신어야 다리가 보정된다는 겁니다. 그 후 수제구두를 고수해왔죠. 지금 생각해보면 참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결국 기성화를 신지 못하게 된 겁니다. 기성화를 신으면 너무 불편해서 오래 걸을 수가 없어요.”

 

그나마 멀쩡하던 한쪽 다리는 2년 전 사고를 당해 인대가 파열되면서 기증자 인대로 교체해 지금은 아주 소중하게 관리 중이다. “ 2년 반전에 3개월 가량 병원신세를 졌는데 불편한 왼쪽 다리 대신 터미네이터 역할을 해야 하는 오른쪽 다리가 힘들어지면 어떻게 하나 아찔했죠. 이후로 술도 끊고 열심히 운동도 하고 관리 하고 있습니다. 요즘같이 연말연시에는 술자리가 많지만 술 대신 음료수마시면서 대화하다 보면 크게 불편하지는 않더라고요.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킨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웃음)”




많은 걸 배운 국회 보좌관 경험

 

지난 2010년 당시 동북아전략연구소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해 온 그는 기왕 정치분야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까 끝까지 해보자는 생각으로 꽤 많은 선거에 참여했다. 그리고 2016년 총선 후 국회 보좌관으로도 일했다. “20164.13 총선이 끝나고 천정배 의원님께서는 국회보좌관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죠. 고향 국회의원께서 수석보좌관을 찾고 있는데 한 번 만나보라는 겁니다. 막상 만나보니까 아주 꼼꼼하신 분이시더라고요. 가장 인상적인 건 A4용지를 네 겹으로 접은 다음에 일일이 메모를 하시는데 제 프로필까지 꼼꼼하게 챙기더라고요. 13개월 정도 함께 일했는데 정말로 많은 걸 배웠습니다.”

 

정치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소통인 것 같다고 말한 그는, 정치인들이 어떤 형태로 정책을 펴고 예산을 만들어 나가는지에 대한 마인드 구성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힘들면서도 보람 있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이 이미 확정된 예산을 마치 자신이 노력해서 확보한 것처럼 지역민들에게 문자 보내고 홍보하잖아요. 그 예산은 누구라도 가져올 수 있는 예산이고 언제라도 가져올 수 있는 예산입니다. 정말로 정직하게 일하는 정치인들에게 지역민들이 응원을 보내고 격려해줘야 한다는 것도 국회 보좌관을 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입니다.”

 

그는 정치인들이 가장 중요시해야 하는 부분은 솔직함이라고 말했다. 국회의원이든 시의원이든 또 지자체장이든 정치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장 먼저 자신의 지역민을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성실해야 한다는 의미다.

 

지역에 필요한 사업도 지역민들과 소통해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어떤 형태로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죠. 또 우선순위로 추진될 수 있도록 정부 또는 지자체에 예산을 올려서 받아내야 하고요. 정치인의 진짜 실력은 여기서 나온다고 봅니다. 제가 모시던 의원님께서는 자기 지역구에 필요한 사업은 어떻게든 예산을 받아내시더라고요. 일에 대한 욕심이 많으셔서 국토교통위원회 소속으로 당에서 정조위원장을 맡아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등 폭넓은 활동 하시면서 일일이 세심히 관여해서 일도 챙기고요. 대한민국에는 이런 분들이 필요하잖아요. 지난해에는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으로 계시면서 12월 마지막 날까지도 예산을 가지고 대응하시는 걸 보면서 힘들지만 참 행복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늘 새벽 5시에 일어나 사우나에서 바로 국회 사무실에 출근하면 7시가 못 되서 도착 일을 챙겨야 했지만요(웃음).”


 


낙후지역의 교통 개선 시급

 

그가 사는 지역은 서울에서 손꼽힐 정도로 낙후지역이다. 그러다 보니 출퇴근 시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많은 불편이 따른다. 은평구 쪽으로 가는 전철 6호선과 홍제동 끝을 가로질러 종로 쪽으로 가는 3호선, 그리고 가좌역 쪽으로 가는 경인선도 있지만 모두 이 지역을 비켜갈 뿐 서대문을 가로지르는 전철이 없다.


저는 대체로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집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을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죠. 우리 지역 사람들에게 지하철개통은 숙원사업이나 마찬가지라고 봐야죠. 지난번에 우리 지역 국회의원께서 8개 구간을 오가는 서대문지하철을 추진하겠다고 하셨고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온 서부경전철은 3년 후에 착공한다고 했는데 하루 빨리 공사가 들어가야 합니다.”

 

32년 전 고향에서 올라와 이곳에 터전을 자리를 잡았을 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그는 지역개발을 위해 아파트 단지가 하나 둘 들어서고는 있지만 기존 구시가지의 정비사업도 빨리 추진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우리 지역은 재래시장 정비 사업도 시급히 추진돼야 하는 지역입니다. 특히 모래내시장, 서중시장은 정비를 해서 가좌지하철역과 입구가 맞물리도록 해야 지역상권이 살아난다고 봐요. 어쨌든 지역이 발전하려면 교통이라든가 경제적인 측면이 살아나야 하잖아요.”

 

그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정치인들이 지역민들과 많은 소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역민들이 직접 만나 소통하고 싶어 하는 정치인들과의 거리감이 크게 되면 현실과 떨어진 정치로 이어지게 된다는 지적이다. “제가 국회 보좌관으로 일해 보니까 민원을 제기하시는 분들은 자신이 제기한 민원이 꼭 해결되지 않더라도 어떻게 되어 가는지 자세히 알고 싶어 해요. 해결이 어렵다면 왜 안 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면 충분히 설득이 되더라고요. 민원인들이 억지를 부리는 것은 답답하기 때문입니다. 지역민들이 자신들을 대신해서 지역의 현안을 해결해 주고 잘 살게 해달라고 뽑아줬으면 그 기간만큼은 최선을 다해야 되는 것이죠. 아직도 이런 부분을 착각하는 분들이 많잖아요.”

 



북가좌초등학교 출신의 동갑내기 아내와 92년도에 결혼해 두 딸을 둔 그는 인터뷰 내내 가재울 자랑을 늘어놓았다. 정감이 가는 지역이라는 말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아내의 고향이면서 제2고향인 가재울을 한 번도 떠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그는, 지역발전을 위한 일꾼이 되겠다며 두 번이나 시의원 출마를 준비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나서지는 못했다. 여전히 지역에 대한 사랑만큼은 가슴에서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는 그에게 2018년 새해는 또 어떤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된다.


MeCONOMY magazine January 2018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