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을 계기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에 대한 관심이 높다.
당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 열사는 시국사건으로 수배 중인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경찰에 의해 참고인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돼 물고문을 받던 중 1월 14일 질식사했다.
박종철 열사가 사망하자 경찰은 서둘러 시신을 화장하고 사건을 덮으려고 했지만, 석간신문에 사망기사가 나가자 단순 쇼크사로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최초로 사체를 검안했던 오연상 중앙대학교 부속병원 의사에 의해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이 제기됐고, 경찰은 1월 19일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로 정정 발표 후 이에 가담한 경찰 2명을 구속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했다.
이후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고문에 가담한 경찰이 3명 더 있다고 폭로했고, 이들의 구속과 함께 5월 29일에는 범인 축소 조작에 나섰던 박처원 치안감 등 3명이 범임 도피죄로 구속됐다.
서울대학교에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박종철 열사를 기념하기 위해 1997년 6월 인문대학교 앞에 ‘민주열사 박종철의 비’와 ‘박종철 흉상’을 세웠다.
1987년 당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이었던 이한열 열사는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려져 27일간 생존을 위한 힘겨운 싸움을 하다 7월 5일 숨을 거뒀다.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행렬이 지났던 서울시청 광장에는 160만명 정도의 시민들이 모였다고 한다. 당시 정권은 시청주변의 모든 건물에 기자들의 접근을 철저하게 막았다.
그의 죽음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고, 6월 한달간 전국에서 500만명 넘는 시민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민주쟁취”를 외쳤고, 6월 29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을 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옆 ‘이한열 동산’에는 ‘이한열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2016년 6월 9일에는 이한열기념사업회와 연세대학교가 이한열 열사가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자리에 동판을 세겨 그의 희생을 기념했다.
‘이한열 기념비’는 1988년 9월 14일 세워졌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많이 손상돼 2015년 6월 9일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세워졌다.
기념비에는 ‘198769757922’이라는 숫자가 세겨져 있다. ‘1987’은 6월 민주항쟁이 있었던 때이고, ‘6975’는 이한열 열사가 6월 9일 경찰의 최루탄에 맞고 쓰러져 7월 5일 사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7922’는 7월 9일 장례식이 열렸던 때와 그가 사망했을 때 나이 22살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