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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리포트


[5·18 민주화운동 38주년] 여전히 끝나지 않은 그날의 광주


[M이코노미뉴스 김선재 기자] 1980년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신군부에 의해 무참하게 탄압당한 5.18민주화운동은 억압당하면서도 불법적으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 세력에 끝까지 저항했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실패한 저항권’으로서 상당 기간 평가 절하됐을 뿐 아니라 광주 시민들은 많은 수모와 역경을 겪어야 했다. 지난 1988년 총선을 통한 ‘여소야대’ 국회 구성과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출범을 계기로 열린 ‘광주 청문회’는 당시 신군부 정부에 의해 왜곡·전파됐던 광주의 진실을 전 국민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정치적 야합에 의해 불과 3개월 만에 활동을 중단해야 했던 특별위원회. 과거 7번의 진상조사가 있었음에도 신군부의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에 대한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 38주년을 맞아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1987년 1월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이던 박종철 군이 경찰에 체포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가 사망(고문치사)한 사건과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4월13일 ‘호헌조치’를 계기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이 두 사건을 통해 마련된 현행 헌법에 대한 개헌 논의가 여전히 정치권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월20일 정부 개헌안을 공개하고 같은 달 22일까지 사흘간 개헌안의 주요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정부의 개헌안은 현재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되는 헌법 전문에 ‘부마(釜馬)항쟁’과 ‘5·18 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의 민주이념을 추가로 명시했다. 이에 대해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짐은 물론, 법적·제도적 공인이 이뤄진 역사적인 사건인 4·19혁명, 부마 항쟁과 5·18 민주화운동, 6·10 항쟁의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나열된 사건들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사건은 ‘5·18 민주화운동’이다. 다른 사건들과 달리 ‘5·18 민주화운동’은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신군부가 군대를 동원해 저항하던 광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는 점이 갖는 비극성과 시위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몇몇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및 이들 집권세력에 대한 처벌, 피해자 보상 등이 4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5·18 민주화운동 이후 8년 이 지난 1988년 13대 국회가 ‘여소야대’로 구성됨에 따라 ‘국회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가 구성돼 같은 해 11월부터 5·18 민주화운동 기간 발생한 신군부 세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등 진상규명을 위한 ‘광주 청문회’가 열렸지만, 위기를 느낀 집권세력 주도의 ‘3당 합당’으로 인해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활동은 불과 3개월 만에 중단됐다.


관련해서 올해 2월28일 국회는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하 5·18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 및 헌정질서 파괴행위 등의 진상조사가 이뤄질 수 있게 됐다. 진상조사는 오는 9월15일 시작되고, 국회의장이 추천하는 1명, 대통령이 소속되거나 소속됐던 정당의 교섭단체가 추천하는 4명, 그 외 교섭단체와 비교섭단체가 추천하는 4명 등 9명으로 구성된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를 통해 이뤄진다.


지난달 5일 국회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38주년 및 광주 청문회 3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다. 학술대회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의 성과와 과제, 광주 청문회의 성과 및 한계 등이 논의됐다.


김후식 5·18기념재단 이사장 직무대행은 “올해 우리는 38년 만에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으로 진상규명의 문이 다시 열리게 됐고, 헌법 전문에 5·18 운동을 명시해 헌법의 기본을 세우고자 한다”며 “1988~1989년까지 5·18 진상규명 특별위원회에서 광주 청문회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를 펼쳤으나 증인들은 변명과 모르쇠로 일관했고, 구체적인 보고서 없이 마무리됐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당시 광주 청문회는 5·18의 진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커다란 계기가 됐고, 5·18 특별법 제정의 사실적 근거가 됐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 직무대행은 “5·18 진상규명은 미완으로 남아있었고, 2007년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5·18 민주화운동 활동에 대한 진상규명활동이 진행됐으나 집단 발포, 암매장, 민간인 학살, 헬기사격, 교도소 습격사건 등 여전히 많은 의혹들이 남겨져야 했다”고 강하게 지적했다.


5·18 민주화운동…군부독재 세력의 총·칼과 맞선 시민들의 저항


‘5·18 민주화운동’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현 국군기무사령관)을 중심으로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현 수도방위사령관), 정호용 특수전사령관 등 신군부의 정권 장악에 대해 1980년 5월18~27일까지 광주시민들과 전라남도 지역의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운동을 말한다. 집권세력들은 계엄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을 공수부대 등 군대를 투입해 총·칼로 진압했고, 이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자연스럽게 무력저항으로 연결됐다.


당시 한국 사회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장기 독재가 이뤄지던 중 1979년 10월4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에 대한 의원직 제명을 계기로 부산과 마산 등지에서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생긴 내부갈등으로 10월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현 국정원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을 틈타 12월12 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자신이 속한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전두환 등 육군사관학교 11기 주축)’와 함께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고, 1980년 5월 서울 등 전국에서 계엄 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오히려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국민을 억압하기에 이르렀다.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장은 “계엄군은 당초부터 총기에 착검을 한 채 시위진압에 나섰고, 청년뿐 아니라 부녀자 등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구타하고 찌르는 등 잔혹한 행동을 보였다”며 “계엄군의 무력 과잉진압은 시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시위를 확산시키고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19일에는 시민·학생 연대가 구성돼 단순한 학생 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됐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1980년 5월20일부터는 계엄군에게 실탄이 지급됐고, 같은 날 밤 무차별적인 발포가 이어지자 광주의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 21일 오전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와 군용차량을 탈취했다.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조준 사격을 시작했고, 결국 시위는 무장항쟁으로 확대됐다. 광주 시내에서 벌어진 계엄군과 시민들의 시가전으로 계엄군은 광주 외곽지역으로 퇴각했다가 27일 새벽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2만5,000여명의 병력과 탱크로 무장한 상태에서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펼쳤다. 이로 인해 27일 오전 5시22분 전남도청에 있던 시민군은 전원 사살되거나 연행됐고, 광주는 다시 계엄군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같은 해 8월27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의 의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 전두환 정권이 공식 출범했다.


김 소장은 “5·18 민주화운동은 1950년 6·25 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정치적 비극이었으며,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있어 가장 큰 사건의 하나였다”며 “이를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1970년대 지식인 중심의 반독 재민주화운동에서 1980년대 민중운동으로 변화됐고, 작전지휘권을 앚고 있던 미국이 계엄군의 진압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고 판단, 친미적인 민주화운동과는 다른 인식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날 광주의 진상규명을 위한 8년 만의 기회…3당 야합으로 좌절


군부에 의해 장악된 국가권력의 무자비한 폭력과 탄압에 짓밟힌 광주 시민들에 대한 피해 보상과 시위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불법 행위의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위한 조사를 제도권에서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1988년 ‘여소야대’의 13대 국회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그 이전에는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5년 6월 국방부가 제출 한 ‘광주사태 보고서’에 의해 5·18 민주화운동 직후 단 10일간 파악한 사망자의 유족 164명에게 1,430만원씩 지급하는 행위가 있었다. 정확한 조사를 통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등의 절차가 선행돼야 했지만, 제대로 된 법률 마련도 없이 임의적인 행정 행위에 의해 이뤄진 보상이었다. 김 소장은 “사건을 돈으로 때우려는 의도가 시작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다가 1988년 1월20일 민주화합추진위원회(이하 민화위)에서 ‘광주문제치유 대정부 건의안’을 만들었고, 이것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채택, 4월까지만 해도 ‘폭동’으로 불리던 5·18 민주화운동은 ‘광주학생과 시민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으로 개칭됐다. 4월26일 13대 총선에서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이하 민정당)이 과반보다 24석 부족한 125석을 차지하는데 그치면서 ‘여소야대’ 국회가 구성된다. 광주 문제를 제도권에서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것이다.


이에 당시 제1야당이었던 평화민주당 주도로 같은 해 6월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이하 광주 특위)’가 구성됐고, 11월17일에는 광주 청문회가 개최됐다. 그러나 불과 3개월 만인 1989년 2월에 청문회는 중단되고 말았다. 김 소장은 “(그날의 광주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상당한 사실관 계가 청문회를 통해서 국민에게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집권 부 내부에서 상당한 위기의식이 조성됐고, ‘이 특위를 계속 가동해서는 안 된다’는 비상한 인식을 집권부가 하게 됐다. 고의적으로 사보타지(Sabotage)하게 되면서 광주 청문회는 사실상 중단됐다”며 “다만, 지속적으로 광주 유관단체를 비롯한 학생운동이나 시민사회운동의 성과로 인해 결국 1989년 12월31일 전두환이 국회에 출석해서 광주 특위의 질문에 일괄 답변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1990년 2월9일에는 노태우 민정당 총재, 김영삼 통일 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국 총재 등의 합의로 한 ‘3당 야합’에 따라 민주자유당(이하 민자당)이 태어남으로써 광주 특위는 표류하게 된다. 민자당은 같은 해 3월8일 진상규명 등 명예회복 부분이 흐지부지된 민자당안을 국회 법사위에 단독으로 제출하고 7월14일에는 날치기로 이 안을 본회의 에서 통과시킨다. 5월 관련 단체는 즉각 보상법 시효 가처분 신청을 하는 등 날치기로 통과된 보상법에 대해 무효화 투쟁을 전개했지만, 노태우 정부는 이 법안을 기초로 1990년 8월 17일부터 9월15일까지 신청자 2,690명 중 2,227명에게 1,426억7,500만원의 보상금이 지급된 피해보상을 강행(1차 보상) 했다.


김 소장은 “진상규명 없는 보상은 피해자간의 분열을 획책해 가해자가 숨어버리는 문제를 발생시키고, 5·18 민주화운동 을 광주의 지역 문제로 고립시켜 전 국민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인권 문제나 존엄성 문제로 인식되기는커녕 피해자 개별, 유가족 또는 보상자들의 개인적인 문제로 치환시키는 구도를 만들어버리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것”이라며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의회에 열린 민주화 공간을 여당이 의회 쿠데타를 통해서 사실상 원점으로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했다.



보고서 하나 남기지 못한 광주 청문회


이같은 정치적 야합으로 활동이 중단된 광주 특위와 광주 청문회는 조사 보고서조차 남기지 못하고 만다.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은 국회가 감사 및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했을 경우 감사 및 조사를 마친 때에는 지체 없이 감사 또는 조사 보고서를 작성해 국회의장에게 제출하고, 의장은 지체 없이 본회의에 보고, 국회는 본회의 의결로서 감사 및 조사 결과를 처리해야 한다고 명시했지만,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때문에 애당초 광주 특위가 목표로 했던 진상의 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합당한 보상의 순서가 지켜지지 않은 채 일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먼저 이뤄지는 비정상적인 행위가 이뤄지게 됐다.


김 소장은 “이해관계의 투쟁이 가치투쟁의 장을 만들고, 가치투쟁의 장에 의해서 세력투쟁이 발생하고, 세력투쟁의 장에서 승리한 세력이 정책을 독점·관할할 수 있는 권력이 생기는 것”이라면서 “광주 특위의 한계는 전체적인 사회세력 즉, 헤게모니(Hegemony)의 열세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5·18 가 해자 세력이 온전하고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는 구조를 하루아침에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광주 청문회는 진상규명에 있어 실패했지만, 진상규명이 이뤄졌다고 해도 정의에 부합한 사실관계의 조합과 배치가 필요한 것이 지 이와 상관없는 사실관계의 나열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광주 민주화운동으로부터 6월 항쟁이 비롯됐고, 6월 항쟁으로부터 촛불시민혁명이 있을 수 있었다. 여전히 모든 문제는 정치로 귀결되기 때문에 광주가 계속되고 있는 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게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잘못 끼운 첫 단추…계속되는 왜곡


올해 2월28일 국회는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 별법(이하 5·18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 및 헌정질서 파괴행위 등의 진상조사가 이뤄질 수 있게 됐다. 이로써 8번째 진상조사가 이뤄질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 진상조사는 오는 9월15일 시작된다.


4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고, 벌써 7번의 조사가 이뤄졌는데,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은 아직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2월7일 국방부 ‘5·18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가 육군이 헬기를 출격시켜 저항하던 광주 시민들을 향해서 사격을 가했고, 공군은 미사일을 장착한 전투기를, 해군과 해병대는 1개 대대의 병력을 대기시켰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것이 최근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정부가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이건리 특조위원장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육군은 광주에 출동한 40여대의 헬기 중 일부 공격헬기 500MD와 기동헬기 UH-1H를 이용해 5월21일과 27일 광주 시민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사격을 가했다”며 “공군은 수원 제10전투비행단 F-5 전투기들과 사천 제3훈련비행단 A-37 공격기들에 각각 MK-82 폭탄을 이례적으로 장착한 채 대기 시켰다”고 밝혔다. 이어 “해병대는 광주에 출동할 목적으로 5월18일부터 마산에서 해병 1사단 3연대 33대대 병력 448명 이 출동 대기 명령을 받은 다음 사흘간 대기했다가 출동 명령이 해제됐다”면서 “해군에서는 시위대의 선박을 통한 해상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해군함정 309편대를 출동시켜 목포항만에서 해경과 합동으로 해상봉쇄작전을 전개했던 사실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공군의 전투기들과 공격기에 대한 폭탄 장착대기의 목적이 광주를 폭격하려는 계획에 따른 것인지, 공군에 의한 광주 폭격이 포함된 5·18 민주화운동 진압 작전 계획이 검토됐는지 여부에 대한 종국적인 결론은 내리지 않았다. 이 위원장은 “현재 한국 공군에는 5·18과 관련된 당시의 자료가 거의 없고, 당시 공군 관계자들은 당시 상황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일부 공군 관계자는 건강 등의 사유로 조사에 불응하고 있다”며 “따라서 불가피하게 미국 공군과 미국 대사관의 자료를 포함한 국외 자료 조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부득이 중간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회에 입 법·발의돼 있는 ‘5·18 특별법’에 따른 특별기구의 조사에 의해서 수원과·사천의 공대지 폭탄 장착의 목적 등 5·18 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압 작전에서 공군 전투기와 공격기에 의한 폭격이 검토됐는지 여부가 명확하게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저희가 미국 공군과 미국 대사관 등에 요청한 자료들이 회신되면 위 특별기구에 인계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에서도 헬기를 출동시키고 전투기와 공격기, 해병대 1개 대대, 해군함정을 대기하도록 한 책임자를 찾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이 문제는 왜 이렇게 끝나지 않는가? 송선태 전 국무총리실 정무비서관은 “가해자 정권 때문에 잘 되지 않았다. 첫 단추부터 매우 잘못 끼워져 있었다”며 “제일 문제가 큰 것은 자료의 왜곡”이라고 지적했다. 송 전 비서관은 “왜곡은 주로 육군 본부의 ‘80대책위원회(이하 80대책위)’에서 했는데, 1988년 2월16일부터 3월30일까지 1차 왜곡을 하고 관련 자료를 해 당국에 배포한 다음 의견을 다시 받는 식으로 진행됐다”면서 “위원장은 당시 육군참모차장, 실무위원장은 민심부장(천용택 전 국방부장관)이었고, 자료팀을 총지휘했던 사람은 군사연구실장(조성태 전 국방부장관)이었다”고 말했다.


관련해서 지난달 17일 김종대 정의당 의원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대응 논리를 주도적으로 작성한 곳이 당 초 알려진 ‘511연구위원회(이하 511연구위)’가 아니라 80대책위라고 주장했다. 5·11연구위는 국회 광주 특위에 대응하기 위해 보안사령부,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한국국방연구원 (KIDA)로 구성된 조직이다. 김 의원은 이날 당 의원총회에서 “511연구위가 국회 대책을 세우기 이전에 이미 육군의 80대책위가 모든 대응 논리를 작성하고 관련 문서 왜곡과 은폐를 주도한 과정이 선행됐다”며 “이후 511연구위는 국회 대책에 불과한 실무적 역할에 국한됐다”고 말했다.



왜곡① - 발포 명령…지휘체계 이원화·자위권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왜곡 중 대표적인 것이 ‘발포 명령’에 대한 부분이다. 당시 계엄군에게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한 실탄이 지급됐고, 무차별적인 사격 및 조준 사격이 이뤄졌다. 이에 대해 이재익 박사는 “이 문제는 지휘체계 이원화와 관련돼 있다. 공식적인 지휘체계로 잘못을 떠넘기고 있는데, 실제로는 비공식적인 지휘체계를 통해 발포 명령을 내렸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면서 “그렇지 않고서는 백주대낮에 시민들을 그렇게 학살해놓고 발포 명령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군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 박사에 따르면 511연구위는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이 1988년 5월20일 민화위에 서면을 통해 “계엄군의 과잉진압이 직접적인 원인의 하나”라고 증언한 내용을 청문회에서 “젊은 군인들이 격렬한 난동 저지 임무를 수행했고, 시위 학생을 연행하던 중 다소 과민한 충돌이 있어 쌍방 간 부상자가 발생했다. 또한 악성 유언비어가 확산되면서 감정을 자극했다”고 수정해 발언하도록 유도했다.


발포 문제에 대해서는 공공시설 파괴, 무기 및 탄약 탈취, 교도소 공격 등 시위대의 과격시위에 대응해 합법적인 자위권을 행사(5월21일 19시30분 자유권보유 천명)한 것이고, 발포 명령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계엄군의 과도한 진압이 시민들의 분노를 자극했고, 자위권 천 명 이전인 20일 23시 광주역, 21일 13시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가 있었으며, 비공식 지휘라인을 통해 발포 명령이 결정돼 현장에 전달, 헬기 사격 및 조준 사격이 시행됐다. 집단 발포 및 헬기 사격 지시에 대해서는 이번 국방부 5·18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에서도 확인됐다.


이건리 위원장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사령부는 문서와 구두로 수차례 헬기 사격을 지시했다. 또한 헬기사격 목격자는 계엄군이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표해 수십 명의 시민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당한 5월21일과 계엄군이 전남도청과 전일빌딩, YWCA, 광주공원 등 광주시에 재진입해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한 5월27일에 많았다”며 “계엄군 측은 지금까지 5월21일 19시30분 계엄사령관의 자위권 보유 천명이 이뤄지기 전에는 무장헬기가 투입되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5월19일부터 31사단에 무장헬기 3대가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을 통해 밝혀냈다. 또한 광주 시내를 비행했던 헬기 조종사들로부터 헬기에 무장을 한 상태로 광주상공에서 비행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당시 공식 지휘체계는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투교육사령관-31사단장-공수여단장’이었지만, 실제로는 ‘보안사령관-특전사령관-공수여단장’으로 이어지는 비공식 지휘체계가 가동됐을 것이라는 추측된다.


이 박사는 “발포 명령과 관련해서 자위권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다. 자위권 논리로 발포 명령 자체를 포장 시켜 버린 것”이라며 “자료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발포 명령자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자위권 발동이라는 논리를 개발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서류를 거기에 맞췄다. 사방에서 서류가 조작됐다는 증가가 나왔고, 광주 청문회에서도 문제가 제기됐지만,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탓에 끝까지 쟁점화시키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던 것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검찰의 수사와 1997년 대법원 판결도 자위권을 합리화시키는 틀 속에서 진행됐고, 국민에게 이같은 인식을 심어주게 됐다”면서 “이번 진상규명을 위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이 틀을 깨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왜곡② - 북한개입설과 교도소 습격


5·18 민주화운동이 북한의 개입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으로 꾸미기 위해 ‘교도소 습격 사건’이 강조되는 것도 대표적인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 사례 중 하나다. 광주 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류락진의 처 신애덕과 동생 류영선이 시위에 가담해 교도소를 습격, 류락진을 구출하도록 선동했다는 것이다. 류락진은 한국전쟁 당시 남조선로동당에서 빨치산 활동을 벌이던 인물이다. 당시 31사단 전투상황보고에는 5월21일 19시30분 무장폭도들이 교도소를 장갑차 등 차량 9대로 기습, 수비병력과 교전을 벌인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광주 교도소 교무과장으로 근무했던 김근재 씨는 “당시 교도소 주변에서 총격사건이 몇 번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시민군이나 학생 등이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사실은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정웅 당시 31사단장이나 박준병 당시 20사단장은 “광주 교도소를 21일 오후 2시 이전의 31시단이나 23일 오후 7시 이후의 20사단 병력이 경비하고 있을 때는 습격을 받은 사실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왜곡③ - 5·18 왜곡의 최고봉…지만원·전두환


관련해서 2012년에는 ‘5·18 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고,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며, 북한의 대남사업부 전문가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주장을 전 국민적으로 확산시킨 일이 있었다. 2008년 지만원이라는 극우 인사는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이같은 내용의 주장을 담을 글을 올렸고, 5·18 관련 단체들이나 유가족들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게 됐다. 대법원은 2012년 12월27일 지만원의 게시물에 대한 명예훼손 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지만원이 섰던 게시물에 의한 5·18 민주화 유공자들에 대한 비난이 개개인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집단 표시의 명예훼손죄’와 관련된 법률인데, 집단을 구성한 수가 굉장히 많기 때문 에 비난을 하더라도 개개인에 이르러서는 비난의 정도가 약해지기 때문에 명예훼손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홍지은 변호사는 “법원에서 이런 판결을 내린 것은 지만원이 주장했던 북한군 개입설이 사실이라는 취지가 아니고, 허위 사실이기는 하지만, 명예훼손에 이를 정도는 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보면 되는데, 판결 자체는 현실적인 상황판단이 안일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판결 이후 5·18에 대한 무차별적인 역사왜곡이나 당시 피해자 유가족들에 대한 명예훼손, 모욕 같은 행위가 온라인상에 무차별적으로 유포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지적했다. 지 씨는 2015년에는 ‘뉴스타운’이라는 언론사를 세우고 ‘광수(광주에 나타난 북한 특수군) 시리즈’를 연재하는가 하면 이를 실제로 10만부씩 3회에 걸쳐 발행, 광주 시청과 전남도청 등 전국 각지에 배포 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2017년 4월에는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들을 학살했던 전두환이 이를 정당화하는 취지의 회고록을 내놔 세간을 경악하게 했다. 회고록에서 전두환은 5·18 민주화운동을 ‘북한군 개입에 의한 폭동’으로 정의하고, 다수의 목격자들에 의해 증언으로 확인되고 있는 ‘헬기 사격’ 및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사격 지시’ 자체를 부인했다. 또한 전두환은 회고록을 통해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법원의 판 결과 수사기록 등의 일부를 교묘하게 발췌·편집하는 방식으로 사실을 호도하기도 했다.


홍 변호사는 “‘북한군 개입설’을 전두환이 적극적으로 주장하는데, 굉장히 아이러니한 사실은 전두환이 회고록을 발간하기 1년 전 월간 ‘신동아’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지만원을 언급하며 5·18 당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에 대해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면서 “하지만 1년 후 내놓은 회고록에서는 5·18 당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북한군을 도와 내란 범죄를 저지르고도 국가로부터 보상금을 받는 존재로 규정되는 등 수인한도를 넘는 비방과 허위사실로 인해 수십 년째 가늠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다”며 “국회는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오래된 법언의 뜻을 무겁게 받아들여 더이상 1988년 5·18 광주 특위의 과오를 반복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역사적 현실에서의 민주주의


김세균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한국 현대사에 있어 한의 거대한 비극적 서사시와 같다”면서 “그러나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그 비극이 안고 있는 심대한 의미를 이후의 사람들이 되새길 수 있고, 그 비극을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 위대한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한 사건으로서 민주화운동의 최고봉”이라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광주 민주화운동은 기본적으로 민주항쟁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정의하며 ▲‘저항권의 행사가 민주주의 행사의 기반이자 최후의 보루다’라고 하는 관점과 ▲‘민중봉기·민중반란 등으로 표현된 민의의 보편적 민중 해방 염원이 우리가 갈구하는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다’는 관점 ▲‘이상으로 서의 민주주의 관점에서 역사상 나타난 모든 민주주의는 결 손을 가진 미완성의 민주주의다’ ▲‘역사적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민의 투쟁, 민의 민주화운동은 어떤 조건에서도 나타날 수밖에 없는 절대적 운동’ 등 4가지 관점을 통해 민주주의를 설명하고 5·18 민주화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의와 미래적 가치를 살폈다.


먼저 저항권 행사로서의 민주주의 측면에서 민주주의는 가장 단순하게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리를 사회구성 원리로 수용하는 정치제도’ 내지는 ‘그것을 옹호하는 이념’이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오늘날은 민주주의를 수용하기 때문에 당연히 권력은 민으로부터 나와야 된다는 입장을 취하지만, 과거에 주권재민의 원리라는 것은 한마디로 민중 반란을 옹호하는 이념, 폭도들의 반역사상, 민들이 만들어낸 우민정(愚民政)이고 결국 폭민정(暴民政)으로 흘러 기존의 모든 사회 질서를 뒤흔드는 반역이라고 인정돼 왔다”면서 “따라서 주권재민 사상을 부정하는 체제에서 밑으로부터의 주권재민을, 민중의 움직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폭력적으로 진압해왔다”고 말했다. 이어 “따라서 주권재민의 원리는 민중 자신의 피나는 투쟁을 통해서만 그 원리가 사회적으로 수용됐다는 것”이라며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은 이런 의미”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관점은 사회의 모든 민들이 모두 수평적이고 우호적 관계를 맺는 가운데, 치자(治者)가 동시에 피치자(被治者), 피치자가 동시에 치자가 되는, 권력을 통한 치자와 피치자의 구분이 전혀 없는 민 자신의 전면적인 자기 통치체계로서의 민주주의다. 김 교수는 이것이 민의의 보편적 민중 해방 염원이 갈구하는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 ‘주권재민의 원리가 온전 한 형태로 실행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관련해서 J.보댕은 군주에게 있어서의 주권에 대해 ‘지상에 있는 모든 권력을 넘어서는 최고의 권력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사람이 자기의 권력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온전한 주권자 역할을 못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말하는 대의제 민주주의나 간접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민 자신이 주권적 권력을 우리들의 대표자에게 위임하는 것이고, 권력을 위임받은 대표자가 민 위에 군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삼권분립을 통해 분할시켰기 때문에 전면적인 민들의 자기통치체계가 구축되지 않는 이상 온전한 의미의 민주주의,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 구현에는 한계가 있고 결손이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우리가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통해서 쟁취한 것이라고 해도 그 민주주의는 결손이 있고, 불완전하며, 많은 한계를 지니기 때문에 절대 그 민주주의를 이상화하지 말고 이것을 확 대·심화하는 길, 민주주의를 더욱더 민주화하는 것이 영원한 정치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김 교수는 역사적 현실 속 민주주의는 결손과 한계를 지니기 때문에 어떤 조건 속에 서도 출연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 운동이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을 언급하며 역사적 민주주의 관점에서의 민주화운동에 대해 설명했다.


5·18 민주화운동, 한국 민주화운동의 금자탑


김 교수는 5·18 민주화운동에서 완벽한 형태의 저항권 행사가 이뤄졌다는 점을 들어 ‘한국 민주화운동의 금자탑’이라고 평가했다. 계엄군들이 폭력적으로 진압했을 때 거기에 맞서 대항폭력의 조직화를 통해서 싸웠고, 그를 통해 계엄군을 광주 시내에서 쫓아냈고, 그 과정에서 잠시지만 광주 시내가 처음으로 해방을 맞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계엄군을 광주 시내에서 쫓아낸 다음 광주 시내가 처음으로 광주 시민과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새로운 해방공간이 됐다”며 “이 해방공간에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 이상과 가장 유사한 민주적 공동체가 형성됐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것은 5·18 이후의 한국 민주화운동에 엄청난 의미를 갖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절차적 민주주의, 최소 민주주의 수준을 넘어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사고하고, 그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커 다란 동력을 줬다”고 평가했다.


또한 “한국의 정치체제는 크게 1987년 6월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는데, 4월 혁명이나 그 이전의 민주화 투쟁이 이승만 차제의 권위주의적인 경찰체제, 박정희의 군부 파시즘 체제에 파열을 냈지만, 그것에 직접적인 거대한 타격을 주지 못 해 결국 그와 같은 권위주의 체제의 재수립을 막지 못했다”며 “광주 민주화운동은 이후의 민주화운동, 특히 1987년 6 월 민주화 투쟁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돼 한국의 민주주의가 전진하지 못하고 후퇴할지라도 그 후퇴가 1987년 6월 이 전의 체제로 되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비가역적 전환점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이어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군부가 저질렀던 만행이 군부체제의 정당성을 훼손시켜서 더이상 군을 동원한 사회의 개입을 스스로 할 수 없도록 했고, 전두환 체제가 자유화 조치 등을 통해 부족한 정통성을 보충하려 했던 이완된 파시즘 체제로 나타난 계기를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이승우 가천대학교 명예교수 역시 저항권 측면에서 무자비한 처벌과 탄압을 이기고 민주화운동으로 승화시켜 성공한 가장 의미 있는 저항정신의 상징으로 5·18 민주화운동을 평가했다. 이 교수는 “5·18 민주화운동은 전형적인 저항권 운동이었는데, 저항행위는 대부분 헌법 침해의 주체인 국가권력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고, 국가권력은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무자비하게 탄압·억압한다. 이 저항행위가 사후에 역사적으로 정당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재심을 통해 사면복권 되는 경우가 전형적인 저항권에 해당한다”며 “5·18 민주화운동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헌법 침해에 항거한 저항권이다. 헌법의 적으로부터 헌법을 지키겠다면서 저항한 것인데, 문제는 5·18 경우만 유일하게 당시에는 실패한 저항권 행사가 되면서 무차별적인 탄압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 만 5·18 민주화운동은 저항운동에 그치지 않고,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낸 다음에는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1996년 국가기념 민주화운동으로 정식 입법화되면서 비소로 성공한 저항권이 된다. 그러나 아직 진정으로 5·18에 대한 진상규명이 되지 않고서는 아직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미래지향적인 민주주의로의 발전


김귀옥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희 상임의장(한성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은 5·18 민주화운동이 생존권적인 저항운동이었지만, 평화적인 가치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통일 이후 미래지향적인 민주주의로 발전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김 의장은 “분명히 폭력이라는 것이 존재했지만 생존을 위한 무장이었고, 5·18 민중들이 보여줬던 모습은 철저하게 한계의 문턱을 정해둠으로써 국가의 폭력에 대한 저항이 테러리즘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큰 틀에서 평화적으로 저항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며 “국민의 한계를 넘어서 서민의 가치와 함께 동아시아 민중 연대적 가치, 세계 시민적 가치를 시사해 1980년 당시 반미무풍지대로서의 대한민국 개념을 깨고 제3세계 민중들의 반독재, 반외세, 민주화운동에 연대할 수 있는 운동의 가치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타자성(他者性,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극복하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핍박받는 상황에서도 서로 끌어안고, 대동세 상(大同世上,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을 꿈꿨다는 것, 너와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을 공동체적인 가치로서 보여줬다는 점에서 평화적인 민주주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전히 진행 중인 5·18 민주화운동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국면 당시 국방부가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군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지 검토했고, 이 과정에서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지를 따져봤다는 내부 문서가 공개됐다. 3월21일 이철희 국회 국방위원회 간사(더불어민주당)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2월 국방부는 당시 한민구 장관 지시로 ‘위수령에 대한 이해’와 ‘군의 질서 유지를 위한 병력출동 문제 검토’라는 제목의 문건을 작성했다.


‘위수령에 대한 이해’에 따르면 ‘위수(Garrison)’는 군의 주둔지를 지킨다는 뜻으로, 군부대가 일정한 지역에 주둔하면서 군부대 조직의 효과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모든 의도적 활동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활동을 말한다. ‘위수령’이란 육군 부대가 한 지역에 계속 주둔하면서 그 지역의 경비, 군대의 질서 및 군기 감시와 시설물 보호를 하기 위해 제정된 대통령령으로, 육군 부대가 특정한 지구에 주둔하게 하면서 부대 질서와 시설에 대한 외부 침해를 방어하고 예방하는 경비 활동을 목적으로 한다. 문건은 “위수령은 육군 각 부대의 질서유지(경비)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근거로 대외적, 일반적 구속력을 갖는 법규명령에 해당한다”면서 “위수 근무자는 적극적, 공격적인 병기사용은 불가능하고, 소극적인 자위 목적에 한해 사용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한 전 장관의 추가 지시로 작성된 ‘군의 질서유지를 위한 병력출동 관련 문제 검토’ 문건에는 병력이 출동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법·위 헌·불법 논란을 고려해 법적인 보장을 받는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병력이 출동했을 때 어느 정도까지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뤘다.


이 의원은 “촛불집회가 열리던 당시 국방부가 병력동원을 검토했다는 것을 선의로 해석하기 어렵다”며 “의심이 든다”고 말했다. 군 인권센터는 “군의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병력 투입, 친위 쿠데타 음모의 진상이 관련 문건을 통해 낱낱이 밝혀졌다”면서 관계자 전원에 대한 즉각적인 강제 수사를 촉구하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실체적 진실과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5·18 민주화운동이 남겨놓은 잘못된 유산을 과연 제대로 극복했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5·18 민주화운동이 우리에게 남긴 시대적 유산을 민주화와 부합시켜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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