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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만의 매뉴얼에 집중한다

맥도널드 「레이 크룩」 편-제2회

“지금 내 이야기가 너무 꿈같고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보는가?  지금 당장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다. 나 또한, 그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30년 긴긴 고통의 밤을 세운 내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렇더라도 깊이 호흡을 하고 하늘을 보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한국 속담을 생각해보자. 절실하면 하늘도 길을 내준다. 이 어려운 기회를 이용해 나만의 장사방식을 꼼꼼하게 정리 정돈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레이 크록은 매일 자신의 맥도널드 1호 매장에 출근해서 직접 청소도 하고 음식을 관리하면서 프랜차이즈 사업에 대한 매뉴얼을 정비했다. “완벽이란 성취하기 매우 어렵다. 하지만 맥도날드에는 목표로 하는 완벽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는 품질, 서비스, 청결, 가치의 명확하고도 완벽한 기준을 세웠다.

 

1955년 1호점을 연 뒤 1959년까지 4년 만에 100호점을 위스콘신주 퐁뒤라크에 문을 열었다. 매장 수는 늘었나도 그러나 영업 이익은 늘어나지 않았다. 각 프랜차이즈의 로열티가 너무 쌌기 때문이었다. 레이 크록은 방법을 바꿔 본사가 지역 매장을 매입하고 이를 점주에게 임대했다. 그러자 맥도날드 본사의 자산도 커지면서 임대 수입이 늘어났다.

 

1958년, 1억 번째 햄버거가 판매되었다. 그러자 맥도날드 지점을 내겠다는 점주들이 줄을 섰고 본점의 이익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는 본사, 가맹점, 재료 공급자의 비전이 공유되고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했고, 지점마다 똑같은 시스템, 서비스, 메뉴의 표준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맥도날드에서 ‘성경’이라 부르는 매뉴얼 북은 처음 70페이지에서 시작해 지금은 약 700페이지 분량으로 늘어났다. 맥도날드의 통일성, 표준화를 지탱하고 있는 힘이다. 「레이 크록」이 이처럼 맥도날드의 맛과 품질에 대한 표준화에 집착한 것은 ‘맛에 대한 이질감’을 없애기 위한 목표 때문이었다.

 

누구나 낯선 곳에서 먹는 음식에 대한 거부감과 부담감이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황금 아치의 맥도날드를 발견하는 순간, 대중들은 맥도날드의 보편적인 맛을 떠올리며 햄버거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지게 한다는 거였다. 바로 프랜차이즈의 가장 기본적인 생각을 실천하자 맥도날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61년 「레이 클록」은 맥도날드 형제와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맥도날드 형제가 그동안 브랜드 사용료로 매년 받던 매출의 0.5% 로열티를 포기하는 대신, 현금으로 270만 달러를 받는다는 조건이었다. 맥도날드 형제는 세후 각자 100만 달러씩 받을 수 있었다. 이 액수는 맥도날드 형제가 향후 15년 정도 받을 수 있는 로열티 금액이었다.

 

「레이 크록」의 변호사는 “너무 비싼 금액이다,”이라고 말렸지만, 그는 단박에 수락했다. 그리고 맥도날드 상표권, 황금 아치, 조리법 등을 비롯한 모든 권리를 형제로부터 인수했다. 최소한의 메뉴, 비용 절감의 시스템, 운영의 효율성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6년 주식을 상장하자 시가 총액은 한 달 만에 2배로 뛰었다. 그리고 좌석을 갖춘 매장도 늘리기 시작했다. TV 광고를 통해 맥도날드를 ‘백인 노동자의 식당’에서 ‘가족이 함께하는 식당’으로 이미지를 바꾸기 시작했다.

 

1967년 맥도날드의 최초 해외 지점이 푸에르트리코에 문을 열었다. 자신의 1호 매장을 연 지 12년 만에 맥도날드는 드디어 세계로 나갔다. 1976년 창립 20주년을 맞은 맥도날드는 22개국 약 4200여 개의 매장에서 10억 달러의 매출을 달성했다.

 

1977년 그는 맥도날드의 선장 자리를 「프레드 터너」에게 물려주었다. 「프레드 터너」는 맥도날드 1호점의 종업원 출신이었다. 햄버거를 팔던 종업원이 맥도날드의 회장이 된 것이다. 이후에도 「레이 크록」은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휠체어를 타고 매일 사무실에 출근했다. 새로운 가맹점이 문을 열 때마다 첫날 실적을 보고 받는 것도 거르지 않았다. 1984년 1월 83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나만이 견뎌야 하는 30년의 기나긴 밤

 

1983년 미국의 잡지 《에스콰이어》는 ‘20세기 미국인의 생활방식에 기여(寄與)한 50명’ 가운데 한 사람인 레이 크록을 이렇게 썼다. 

 

“콜럼버스는 미국을 발견했고 제퍼슨은 미국을 건국했다. 그리고 레이 크록은 미국을 맥도날드화했다. 미국의 이미지를 만든 것은 컴퓨터도, 핵무기도, 예술도, 과학도 아니다. 바로 햄버거이다. 레이 크록은 미국인의 입맛을 맥도날드 햄버거로 표준화했지만, 그의 진정한 공로는 ‘ 맥도날드 시스템’이라는 프랜차이즈를 창조해 낸 것이다. 그는 시대의 리더이다. 이제 우주 비행사들조차 맥도날드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전 세계 3만 5천여 개의 매장, 하루에 약 7천만 명의 손님이 찾는 맥도널드도 그 시작은 시카고 변두리의 작은 햄버거 가게였다. “맥도날드가 (그 가게로부터)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공해 돈벼락을 맞았다는 건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그 뒤에는 (나만의) 30년에 걸친 긴긴밤이 있었다,”고 고백한 맥도널드 햄버거의 「레이 크록」, 타고난 재능, 학식보다 끈기와 인내를 더 큰 미덕으로 여겼기에 30년에 걸친 긴긴밤을 절망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를 보면 문득 2천3백 년 전에 했던 맹자의 말이 떠오른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굶주리게 하여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나니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 담금질을 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한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맹자 고자장구하, 告子章句下)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내며 폐업과 휴업의 벼랑에 선 소상공인들이여, 어쩌면, 더는 못 참겠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이미 좋아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가시 없는 왕관이 어디 있겠는가? 강하고 담대하게 난관을 뚫고 나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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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지역 독거 노인들에게 기력을 전하는 '사랑의 밥차'
수원시는 홀로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독거노인과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는 노숙자들을 위해 시와 수원시자원봉사센터가 연계해 역점사업으로 추진하는 소중한 사업이 있다. 독거노인과 노숙자들이 한끼 식사지만 마음껏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중식을 지원하는 '사랑의 밥차'가 바로 그것이다. '사랑의 밥차'는 지난 2013년부터 시작됐는데 이 사업이 10년을 넘으면서 수원지역내 독거노인과 노숙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소중한 사업이다. 수원시와 수원시자원봉사센터에 따르면 "지난 2013년부터 첫 삽을 뜬 '사랑의 밥차'는 수원지역내 독거노인과 노숙자들을 위해 1주일에 1회씩 매주 목요일에 운영해 나가고 있다"고 19일 밝혔다. '사랑의 밥차'는 취약계층으로부터 호응도가 높아서 밥차가 운영되는 현장에 적게는 200~300여 명, 많을때는 400~500여 명이 찾아올 정도로 뜨겁다. 때문에 무료로 지원하는 '사랑의 밥차'를 위한 운영비또한 만만치가 않은게 현실이다. 하지만 IBK기업은행이 '사랑의 밥차' 시작 원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넘게 재료비를 지원해 오고 있고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산하에 있는 수원지역 봉사단체가 봉사인력을 지원해 '사랑의 밥차'사업이 원활하게 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