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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최악의 운을 타고난 고아(孤兒)가 만든 억만장자의 제국

도미노피자 창업자 톰 모너건

우리가 아는, 그리고 사랑하는 도미노피자(Domino’s Pizza)가 오늘날 10억 달러의 제국이 되었지만, 이 제국은 맥도널드와 KFC 다음 순위로 등극하기까지 집이 없어 가게에서 잠을 자야 했던 주인이, 무료 배송의 귀재가 되고 나서부터 운명이 뒤바뀐, 원하지 않던 조그만 피자 가게로부터 시작되었다.

 

 

“집안 환경을 탓하지 말라”
“나는 4살에 아버지를 잃고 보육원에서 자랐다”

 

도미노피자의 창업자인 나, 톰 모너건(Tom Monaghan, 이하 나). 그는 1937년,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옆에 있는 앤 아버(Ann Arbor)에서 성 패트릭 기념일(3월 17일)에 태어났다. 그러나 내가 4살 때 아버지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안 계셔서 나와 동생을 양육할 수가 없던 어머니는 내가 6살 때 어린 동생 제임스와 함께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는 성 요셉 보육원으로 보냈다.

 

나는 성격이 포악한 듯했다. 보육원 생활 첫날부터 친구들과 싸웠다고 한다. 거의 7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어머니가 오셔서 우리 형제를 데려가 주시기를 갈망했다. 나중에 간호사가 되신 어머니는 우리를 부양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우리 형제는 보육원에서 나와 어머니와 함께 트래버스 시티(Traverse City)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나는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새 가톨릭 학교에서 Russell Passino 신부님을 만났다. 신부님은 우리 가족 상황을 잘 알고 계셨으므로, 내게 학교와 교회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시간당 35센트 짜리 잡일 거리를 주셨다.

 

제7학년(우리나라 중학교에 해당하는 junior high school의 첫해)을 마친 나는 학교를 옮겼지다. 하지만 계속해서 일하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살던 도시의 큰길을 오가면서 기회를 찾아보기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찾게 된 일이 신문을 파는 것이었고, 여름에는 버찌를 따는 일이었다. 그런데 버찌를 따는 작업은 힘이 들었고 지루하기까지 했다. 당시에 나는 버찌 따는 기계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무를 흔들어 떨어지는 버찌를 방수포에 담는 기계를 머리로 구상했다. 그건 아마 돈을 벌기 위해서 기업가처럼 생각하기 시작한 나의 첫 번째 아이디어였다.

 

 

나는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이집 저집 다니며 팔면서도 다른 더 좋은 아이디어가 없을까 생각했다. 워낙 근심 걱정하지 않는 편이고 기업가적 정신이 성장하면서, 나와 어머니와의 관계는 시들시들해졌다. 그래서 두 사람은 끊임없이 언쟁을 벌였고, 급기야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다시 위탁 보호소에 맡긴다고 결정했다. 나는 이 농장 저 농장을 전전하다가 결국에는 볼링장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곳에서 6시 반부터 자정까지 일주일에 5일간 일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다시 이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농장이었다. 겨울에는 서리와 햇빛이 벽의 틈새로 들여다보였다. 생활은 힘들었고, 내가 입은 옷은 낡아 헤어졌으며,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신발엔 항상 퇴비가 묻어 있어서 학교로 걸어가는 동안 발바닥을 땅에 바짝 붙이고 다니면서 다른 학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했다.

 

“너무 막막하다고?”
“나는 신학대학에서 쫓겨났지만, 제국을 꿈꿨다”

 

어느 날 나는 내 꼴이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목까지 차는 퇴비를 삽으로 뒤섞으면서 내가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보다가,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길로 빠져든 걸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졌다. 내가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성취해 보겠다고 결심한 건 바로 그때였다. 그래서 나는 신학대학에 지원했고, 어머니께서 저축한 돈으로 학비를 내겠다고 하셔서 다닐 수 있었다. 나는 신학대학에서 마음이 정말 편했다. 다른 녀석들처럼 향수병에 걸리지 않았다. 나는 다소 짓궂었기 때문에 베개 싸움을 했고, 자율 학습 시간에 수다를 떨곤 했지만, 결코 심각한 어떤 일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1년이 안 되어 그들은 나를 신학대학에서 쫓아내면서 내가 (목사직에 대한) 직업 소명을 갖지 못했다고 말했다.

 

목사가 되겠다는 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나중에 나는 거의 강제적으로 어머니의 집으로 옮겼으나 두 사람은 전처럼 끊임없이 언쟁을 벌였다. 어머니는 나를 포기하고, 내게 알리지도 않고 경찰을 불러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나를 붙잡아서 소년원으로 보내게 했다. 나는 죄인이 된 느낌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는 나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다른 길로 해서 소년원으로 갔기 때문에, 급우(級友)들은 내가 소년원에서 사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다행히 이모와 이모부가 내가 그렇다는 걸 알고 법원에 청원해서 소년원 대신 그들과 같이 살 수 있게 하였다.

 

그때까지, 그러니까 이모가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를 위해 준비하시는 걸 보기 전까지 나는 고등학교 졸업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모님을 실망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졸업하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어떤 게 있는지 물었다. 선생님은 내 희곡을 제출하고 반에서 꼴등으로 졸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는 졸업앨범에 이렇게 썼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나는 더 나쁜 사람이 되었지만, 나는 감동적인 무언가를 했을 수 있다”라고.

 

 

그래도 나는 페리 주립대학을 다니면서 성적을 올린 뒤 미시간 대학에 지원했다. 미시간 대학에서 나를 받아주었지만, 수업료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학교를 떠나 해병대에 지원하였는데 군대 생활하면서 이제 더는 대학 졸업까지 남은 2년을 다닐 수가 없겠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상황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해병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것이든 다룰 수 있을 걸 알고 있었다. 훈련을 받는 동안 나는 나 자신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영감을 주는 책을 읽기 시작했으며 나 자신의 제국을 세우겠다고 상상하곤 했다.

 

“돈이 없어 가게에서 자고, 팝콘으로 연명했지만 나는 피자를 지켰다”

 

1959년에 내가 해병대에서 나왔을 때 대학 수업료를 내기 위해 저축해 두었던 2천 달러를 갖고 있었지만, 어느 구변 좋은 사업가를 만나서 그로부터 벼락부자가 될 수 있다는 계획에 투자하라는 꾐에 빠져 호주머니에 겨우 15달러만 건지고 모두 다 털려버렸다. 나는 샌디에이고에서 앤아버까지 남의 차를 얻어 타고 왔다. 나는 동생인 짐(Jim)과 함께 움직였고, 지역 신문 배달 감독 자리를 얻어 대학 수업료를 낼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닥닥 긁어모았으나, 3주 만에 중퇴하고 말았다. 나에겐 책을 살 돈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음 학기에 다시 도전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돈을 더 많이 모으기 위해서 신문 정기구독권을 팔면서 배달을 해 드리겠다고 함으로써 많은 손님을 모았다. 이 경험을 통해서 나는 배달의 매력이 무엇인지 보았고, 그런 기회를 붙잡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가게 문을 열고 첫날밤을 보낸 뒤, 동생은 가게를 운영하는 일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뒀다. 그래서 나는 대학으로 돌아가는 대신 가게를 인수하는 수밖에 달리 다른 도리가 없었다. 처음으로 나는 실망했지만, 이왕 가게를 하는 거니까 피자 사업을 하게 된다면, 나라에서 최고가 되자고 결심했다. 나는 크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 사업은 성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상 가게는 매주 적자를 보고 있었다. 돈이 고갈되어 버리자 나는 별도리 없이 찬장에서 찾은 팝콘만 먹고 일주일을 살아야만 했다.

 

나는 돈이 바닥이 나서 심지어 내가 만든 피자가 타버려 팔지 못할 때가 아니라면 그것을 사 먹을 돈이 없었다. 결국, 나는 집세를 낼 수가 없어서 무숙자가 되어, 가게에서 숙식했다. 나에게 있어서 행운은 하루가 지나갈수록 점점 더 악화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어느 날 저녁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절반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이 만들었던 피자의 종류를 제한하기로 하였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까지 장사해 온 날보다 가장 수익성이 높다는 게 판명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메뉴를 단순화하는 일을 계속하고 피자 가게 최초로 무료 배달을 해 주는 사람이 되었다. 도미노 가게가 수익성을 보이자 나는 두 번째 가게를 중앙 미시간 대학 근처의 마운트 플레전트(Mount Pleasant)에 열기로 했다. 계약서에 사인한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두려움에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째서 나는 첫 번째 가게가 잘 되고 있는데, 두 번째 가게를 열어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나는 약속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계약서에 서명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피자 제조 장비를 이미 구매했던 터였다. 다행히 그 위치에서는 이 나라에서 첫 번째 비즈니스 피자 가게가 된 가게와 함께 모험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게 판명되었다. 그 가게는 매주 수천 개의 피자를 팔았다. 대부분, 캠퍼스에 거주하는 학생들과 배달을 원하는 고객들로부터 주문을 받아 이루어진 장사였다.

 

“나는 천 명이 넘는 채권자들을 상대하며 1년 만에 150만 달러의 빚을 갚았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 나는 해병대에서 훈련을 받고 있을 때 그렸던 것과 상당히 흡사한 나의 제국을 천천히 지었다. 내가 3번째 가게를 열자, 피자 닉스라는 가게 이름을 가진 전 주인은 나를 불러 자신들의 가게 이름을 더 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들의 손님들이 혼란해 빠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가게 이름을 우리의 운전기사 중 한 사람이 내게 말했던 도미노피자(Domino’s Pizza)로 정했다. 그 운전기사는 자기가 도미노피자에서 온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는 거였다. 그런데 이름을 쓰지 말라니 뭐라니 하는 것은 내게 있어 문제도 아니었다.

 

피자 배달이 늘어나면 날수록 부닥치는 문제가 더 많아지는 거였다. 재료의 균형을 최대한 지켜가도록 하고, 크러스트를 바삭하게 유지하는 게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제조사에 물결 모양으로 골이 진, 구멍이 뚫린 종이로 된 포장용 박스를 개발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한 박스라면 단열 효과를 좋게 하여 열을 더 길게 보존하여 피자가 식는 것을 막아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조업자들은 마지못해 만들긴 하였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미국의 기술은 궤도 위성을 쏘아 올리고 있는 판에, 골판지에 깨끗하게 구멍 하나 뚫을 수 없다는 게 말이냐 되냐면서 밀어붙였다.

 

 

내 아이디어는 결국 극히 싼 대량의 피자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게 하였다. 보온 주머니(heated pouch), 컨베이어 오븐(conveyor ovens), 도우 쟁반(dough trays), 중앙 집중식 음식 보급소 주방(commissaries)을 포함한 산업의 표준이 되는 더 많은 아이디어를 내게 떠오르도록 영감을 주었다. 1960년대 후반에 나는 보스턴 칼리지에서 열린 한 프랜차이즈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거기에서 맥도날드에서 온 Ray Kroc과 KFC에서 온 John Brown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한때 작은 가게였던 것을, 거대한 프랜차이즈로 바꿔 놓은 책임자들이었다. 그들은 프랜차이즈 사업의 주력으로 배달을 계속해야 한다는 영감을 내게 주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내가 배달로 돈을 벌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개의 장소(가게)는 (내장 고객이 많아) 서비스를 중단할 만큼 여유가 생겨야 비로소 단지 약간의 매출을 얻어 보고자 배달했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배달하지 못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내가 1969년까지 한 주에 가게 한곳을 열겠다는 야심한 포부를 세운 것도 그때였다. 나는 거의 그 목표에 이르렀다. 32개의 신규 매장을 열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 가게가 실패했고, 나는 150만 달러의 빚을 지고 은행 부도를 막기 위해 회사의 경영을 은행으로 넘겼다. 그들은 이른바 전문가를 영입했으나 전문가란 사람들은 가격을 올리고 품질을 떨어뜨림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딱 1년 만에 은행은 회사를 나에게 다시 양도했다. 그러나 내 회사는 소송에 걸린 프랜차이즈 본사 가운데 사상 최악의 재정 상태였고, 물건을 납품한 공급 업자들이 오랫동안 물품 대금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내게는 천 명이 넘는 채권자들이 있었고, 이들 가운데 150명으로부터 소송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달고 살면서 매일매일 그들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건 내 음식값과 집세를 내는 것이며, 그래야 내가 가게를 열고 장사를 해서 한꺼번에 돈을 드릴 수 있다는 말뿐이었다. 나는 느릿느릿 승리하며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와 딱 1년 만에 빚을 다 갚았다.

 

빚을 진 채로 당한 모든 소송을 통해, 나는 사업모델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프랜차이즈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기본 착수금을 내지 않아도 되게 하였다. 대신 프랜차이즈를 원하는 사람은 최소 1년 동안 매장을 성공적으로 관리하도록 했다. 내 아이디어는 제대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성공적이었음이 증명되었다. 1983년까지 도미노 매장은 천 개가 넘어 3000%의 신장세를 보였다.

 

 

회사는 내가 새로운 정책을 만들고 나서 급성장을 거듭했다. 만약 손님들이 30분 안에 그들이 주문했던 피자를 받지 못한다면,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한 것이었다. 겨우 1년이 지난 뒤 나는 5천 개가 넘는 매장을 열었으며, 도미노피자는 세상에서 가장 큰 피자 배달 회사가 되었다. 나는 또한 어떻게 해서든 미시간을 근거로 하는 프로야구팀, 디트로이트 타이거를 인수했다. 오늘날 도미노피자는 90억 달러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도미노피자는 최악의 운을 타고난 한 고아가 어떻게 피자 가게라는 단 하나의 품목으로 억만장자의 제국을 만들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당신은 흙수저인가? 그래서 포기할 것인가?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지금의 어려움과 난관은 내일의 여러분을 움직이게 하고 더 도전하게 만드는 에너지다. 나를 보시라. 그리고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어려움을 뒤집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시라.

 

MeCONOMY magazine January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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