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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술은 발전하는데 세계경제는 왜 힘들고 비관주의로 빠질까?

권두칼럼

 

북극이 녹는다고 심각하게 말하면 ’그거 큰일이야‘ 하면서도 돌아서서 잊어버리면 된다. 영국과 유럽이 더위에 녹고 있다는 보도를 보고도 그냥 덤덤한 표정을 짓기만 하면 된다. 코로나 펜데믹에 전 세계 70억 인구가 3년 이상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했고, 지금도 벗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는 데다 백신은 변이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러니 어쩌겠어, 조심해야지. 그나마 백신을 만드는 의학기술은 대단해’라고 하다가, 세계 경제가 엉망이 되고, 기후 위기가 찾아오고, 빈익빈 부익부 앞에서 체념하거나 비관하게 만든다. 연애, 결혼, 출산, 대인관계, 내 집 마련을 포기하는 등 N포 시대가 된 지 오래다.

 

1814년 탄광에서 일하던 스티븐슨이 석탄운반용 증기기관차를 만들어 운행한 이래 세상의 모든 사물과 정보의 이동 속도는 인터넷상에서 빛의 속도까지 빨라지고 인공지능으로 진화 중이다. 이처럼 유사 이래 첨단과학 기술의 시대가 되었는데 어째서 우리의 행복은 진화하지 않는 것일까? 인생 자체가 그런 거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휴대폰을 아무리 들여다 봤자 행복은 거기에 있지 않은 듯하다.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생각도 그런 것 같다.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그는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비관주의로 빠지고 있다고 했다.

 

기술 발전이 지고의 행복이라던 에드워드 벨라미의 예언

 

19세기의 베스트셀러 가운데 우리가 사변소설(思辨小說; 초자연적이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판타지적 초현실적인 문학작품)이라고 부르는 여러 작품 중 1888년에 출간된 「에드워드 벨라미, Edward Bellamy」의 『뒤돌아보기: 2000~1887』 이란 유토피아 소설이 있다. 당시 벨라미는 손꼽히는 저명인사들 가운데서도 첫 번째 가는 작가로, 급격한 기술적 진보가 현대 생활의 지속적인 특징이 될 것이라고 내다 본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보가 인간의 행복을 엄청나게 개선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 책 속의 어떤 장면에서 소설의 주인공은 어찌어찌하여 1880년대에서 120년 뒤인 2000년대로 이동했는데 누군가로부터 ‘음악을 듣겠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주인공에게 의향을 물은 누군가는 그를 초대한 안주인이었는데, 놀랍게도 스피커폰 (마이크와 스피커가 부착된 전화기)로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라이브로 들려주는 것이었다. 생으로 연주회를 멀리서 쉽게 들을 수 있다니, 그는 기술에 감탄하며 '이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끝'임을 암시했다.

 

 

과연 그럴까? 지난 며칠 사이, 여러 편의 쇼를 스마트 TV로 보았다는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아직 “Westword (HBO에서 2016년부터 방영된 TV 시리즈, 반 이상향의 과학 공상물)”의 새로운 시즌을 볼 건지 말 건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가운데 생음악공연만 몇 번 시청했다. 그는 말이 나온 김에 한다면서 스트리밍 오락물이나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주요 채널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으므로, 「벨라미」가 예측한 것처럼 자신이 행복한 상태여야 하는데 그다지 그런 것 같지 않다는 거였다.

 

정밀 장거리 미사일은 영상 스트리밍 기술, 대량 인명 살상 무기로 둔갑

 

영상을 전송하는 스트리밍 기술은 어떤 이에겐 즐거움과 휴식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혀 다른 목적으로 쓰이면 대단히 파괴적이고 살인적이다. 이를테면, 그런 기술로 유도되는 정밀 장거리 미사일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에서 두 나라 국경선 안쪽 깊숙이 위치한 목표물을 파괴한다. 크루그먼은 솔직히 자신은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편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 군대는 탄약 창고 같은 군 시설만 공격하는 데 러시아는 쇼핑몰 등 민간 시설을 공격하고 있으니까 말이다-이건 테러다. 그러니까 기술의 진보가 사람에 따라서 충분한 만족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형태의 파괴도 가능하다. 더구나 만물의 영장(靈長)이란 인간종은 유감스럽게도 기술진보에 따른 새로운 능력을 대규모 살상 무기를 만드는 데 이용해 왔다.

 

인구증가율에 묻힌 기술진보, 인류 역사의 97%

 

최근에 출간된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브래드 드롱」의 『Slouching toward Utopia (유토피아를 향한 구부정한 걸음)』에 「에드워드 벨라미」의 이야기가 나온다. 드롱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1870년에서부터 2010년까지”를 “기나긴 20세기”라고 부르며, 이 기간에 있었던 중량감 있는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기간은 압도적인 기술적 진보의 경제적 결과 때문에 형성된 시기라고 했다-이는 확실히 옳다.

 

그렇다면 드롱 교수는 어째서 1870년을 기준연도로 잡은 것일까? 그가 지적하고 있듯이, 그리고 우리가 대부분 알고 있듯이, 인류의 역사를 차지하는 장대한 기간-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첫 번째 도시가 출현하고 나서부터 오늘날까지 흘러온 역사 가운데 97%는 「맬서스」의 말이 옳았다. 수천 년 동안 많은 기술 혁신이 일어났었지만, 그 혜택은 항상 인구증가로 묻히고, 사람들의 삶은 최저생활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가끔, 한바탕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드롱 교수가 “맬서스의 악마”라고 불렀던 상황이 일시적으로 잠잠해지긴 했다-실제로 로마 시대 초기에는 개인소득 부문에서 의미 있는 진전이 있었다는 주장에 현대 학자들도 동조(同調)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례는 언제나 일시적일 뿐이었다. 1860년대 후반까지도 내로라한 관찰자들마저 산업혁명으로 인한 진보도 이전의 혁명처럼 물거품으로 끝난다는 것을 시간이 증명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부모 세대와 우리 세대의 차이를 만든 두 가지 수수께끼

 

그렇지만 1870년 언저리에 이르자 세상은 지속적인 급격한 기술 발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것은 이전에 발생했던 기술진보와는 사뭇 달랐다. 여러 세대가 대대로 이어지는 가운데 자신이 속한 세대는 이전 세대가 살던 세상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실제로 우리의 부모 세대가 태어났던 세대와 비교해 봐도 지금 우리가 사는 세대는 완전히 뒤바뀐 세상에서 살고 있다. 드롱 교수가 주장하듯이, 이러한 변화는 복잡하게 얽혀 내막을 쉽게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수수께끼는 부모 세대와 우리 세대와 차이를 만들어 낸 게 무엇이냐는 것이다. 드롱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3가지 “meta-innovation”(「폴 크루그먼」 교수가 만든 용어임) 때문이었다. 첫째가 거대한 기업의 등장이요, 둘째가 산업연구실에서 발명이 이루어졌음이요, 셋째가 세계화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세부적으로 논의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더 시급히 논의해 봐야 할 게 있다. 그것은 ‘급격한 기술진보의 엔진이 서서히 꺼져 갈 수도 있다’는 드롱 교수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드롱 교수라든가 다른 사람들은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지는 요즘 세상에서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일까? 무척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수수께끼는 ‘어째서 엄청난 기술적 진보를 이루었음에도 우리 사회는 왜 과거보다 행복하지 않냐? 하는 것이다. 기술적 진보를 이룩하고도 지고(至高)의 행복이 찾아오지 않는 이유를 드롱 교수가 쓴 『Slouching toward Utopia』를 읽어 봤지만, 「폴 크루그먼」 교수 자신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다만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지고의 행복은 어디까지가 한계인지를 자문(自問)했다.

 

 

단군왕검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대, 그런데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드롱 교수가 조사한 지난 140년 역사 가운데 미래를 낙관했던 때는 딱 두 번이었다. 첫 번째 시기는 1914년에 이르기까지의 40여 년간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진보가 이루어지는지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기술진보를 당연시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기술진보의 낙관주의가 팽배했던 그 시기에 기술적 진보가 공포(恐怖)를 완화(緩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조장함으로써 사람들은 화염(火焰), 피, 그리고 독재 치하에서 죽어가야 했다.

 

두 번째 시기는 “영광스러운 30년”이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수십 년간 이어진 이 시기에 민주사회-시장 경제의 거친 가장자리를 노동조합과 사회 안전망으로 매끄럽게 다듬으면-유토피아는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꽤 괜찮은 사회를 만들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시기 역시 주로 경제적 퇴보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곧장 민주주의는 위기에 빠졌다. 환경오염, 펜데믹과 인플레이션, 식량 위기, 물 부족, 격렬한 정치집단의 등장과 국제전쟁, 게다가 세계 기후 변화 위기까지 지구의 종말을 재촉하는 수많은 위험요소가 시시각각 우리의 생존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1870년 이래 믿기 힘들 만큼의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졌는데도 나아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면 바보일 것이다. 삶의 많은 부문에서 오늘날 미국 중산층은 중세 길드(Guild) 시대에 살았던 부유한 귀족들보다 더 나은 생활을 누리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단군왕검 이래 가장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져 주문자 스트리밍 기술로 원하는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거나,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이 되는 건 절대 아니었다.

 

드롱 교수는 이 같은 기술진보와 만족스러운 삶의 단절(斷絶)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 약간 설명하고 있다. 그의 설명은 흥미롭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체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건 아니라고 「폴 크루그먼」 교수는 부연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크루그먼 교수는 “드롱 교수의 책이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올바른 질문을 하는 건 분명하다면서, 질문 과정에서 많은 중요한 역사를 우리가 알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하였다.

 

출퇴근 시간 전동차 안에서 모든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 화면을 주시하고 있다. 그들의 얼굴에 미소를 보이거나 행복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거의 찾지 못했다. ‘산속 자연에 산다’는 이들보다 낫다는 보장은 없지만....그래도 기술이 발전한 만큼 산속에 사는 이들보다 우리의 행복이 늘어났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MeCONOMY magazine August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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