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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에코경제학(5-2)】한강 선박 운항권을 두고 경쟁한 일본과 청나라

한강에서 이처럼 증기선의 왕래가 잦고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청나라는 자국의 상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892년에 계사국(稽査局)을 설치해 각 도선장(渡船場, 나루터)의 치안을 강화했다. 

 

청나라 거상이었던 동순태(同順泰)는 (1884년부터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간섭하기 위한 조선 주재 청나라 총리교섭통상사의로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뒤 귀국한) 원세개(袁世凱)의 권유에 따라 ‘한양호’라는 증기선을 사들여 제물포~용산 노선에 취항 시켰다.

 

100 톤급인 ‘한양호’는 8노트의 속도로 100명의 승객을 한 번에 수송할 수 있었다. 중국 양쯔강 내륙수로를 운행했던 경험을 토대로 설계된 덕택에 100톤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다른 증기선보다 성능이나 운용이 탁월했다. 이 배를 본 「위텔」 주교는 1893년 10월 23일자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새벽 4시, 나는 용산에서 배에 올랐다. 내가 탄 배는 정시에 출 발했으나 두세 번 모래톱 위에 올라 앉기도 하고 안개 때문에 멈추기도 했다. 그러다가 청나라 배인 ‘한양호’에 추월당했다. 내가 탄 배는 겨우 오후 4시 반이 되어서야 제물포에 도착했다.”

 

하지만 ‘한양호’ 역시 고장이 잦았고, 이따금 모래톱 위에 올라 앉아 운항시간이 길어졌다. 그리고 청일전쟁 때 징발되어 일본군에게 접수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 오사카에서 경매 처리 됐다고 한다. 「위텔」 주교는 자신의 일기장에 “일장기를 단 ‘한양호’를 보았을 때 환자와 부상병들이 타고 있는 것 같 았다”고 썼다. 


‘한양호’가 투입됨으로써 한강 증기선 사업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이 커지자 일본이 맞섰다. 일본은 ‘용산호’ 등의 선박을 취항하고, 청나라 전용인 소부두(小埠頭) 옆에 자기들의 부두를 설치하여 청나라와 경쟁했다. 일본은 1895년 ‘인천환’, ‘청중환’, ‘순명호’, ‘주강환’ 등 4척의 소형 증기선을 취항해 제물포와 행주, 마포, 용산 사이의 화물과 여객을 독점하다시피 운송했다.  

 

1900년쯤 한강에는 일본 범선도 등장했다. 청일전쟁, 러일 전쟁 이후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범선은 대개 30~40톤으로 철도화차 2~3량을 합친 것과 같았는데 운임은 톤당 1원 25전이었다. 이는 당시 철도운임의 3분 의 1수준으로 저렴했다. 범선은 철도로 인해 위축된 증기선 보다 경쟁력이 있는 편이었다.

 

일본 범선이 제물포에서 마포 까지 운항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은 한강 수위가 높은 사리 때 3일 이상 걸렸고, 조금 때는 행주 나루까지만 왔다. 1911년을 기준으로 제물포에서 마포나루를 출입했던 선박의 숫자는 2,115척. 사공, 선주, 객주, 어부, 그리고 시장 사람으로 행주 나루나 마포나루가 꽤 번성했다.

 

 

1940년에 찍은 마포항 풍경은 그런 정황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한강에서의 수운(水運)은 겨울철에 강이 얼어붙고, 강바닥에 쌓인 퇴적물로 강 수위가 낮은 상태여서 항행에 어려움이 많았다. 『조선과 그 이웃 나라』를 쓴 영국의 유명한 여행가인 「이 사벨라 버드 비숍」은 1894년 2월 말,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썼다. 


“나가사키에서 일본 국적의 증기선 「하고마루(一向丸)」를 타고 15시간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다시 뱃길로 3일 만에 제물포로 왔다. 제물포는 서울의 강 나루터인 마포로부터 90km 정도 떨어진 한강 하구에 있다. 그러나 한강은 물살이 강하면서 곳곳이 얕고, 모래톱이 조수(潮水)를 따라 옮겨 다닌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가지 않고, 6명의 가마꾼이 멘 교자(轎子)를 타고 7시간 만에 마포가 건너다 보이는 곳에 도착해 거룻배로 한강을 건너 비로소 서울로 들어섰다.”

 

군사분계선으로 한강 뱃길 중단 

 

조선에 최초로 증기선을 도입한 독일은 1901년 인천~용산 간 항행을 위해 작성한 듯 보이는 ‘한강 항행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지도를 보면 한강을 항행하는 데는 하상 퇴적물과 갯벌을 요리조리 피해서 올라가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마치 거대한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가는 듯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말은 없다지만 정전 협상 때 군사분계선을 장산곶 까지 올렸더라도 당시 항행의 장애물쯤은 요즘 기술로 말끔 하게 정리되어 수심을 확보했을 터. 전 세계 바다의 문명이 가득 실린 배들이 한강을 따라 서울로 항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강 하류에 쌓인 퇴적물을 준설하고 암초를 제거하는 것 쯤이야 요즘 기술로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을 항구 도시에서 내륙의 고립된 도시가 된 이유가 여럿이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군사분계선이 한강 하류에 그어짐으로써 준설을 하지 못한 탓이 컸다.철도, 자동차의 육상 교통이 발달했고, 경쟁력이 없었다손 쳐도 남북이 합의해 바다로 나가고 들어오는 뱃길이 끊어지게 않도록 했어야만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었다. 

 

서울과 서해를 연결하는 경인 아라뱃길의 개통, 그러나 서울시는 반대

 

그렇게 군사분계선으로 막혔던 한강 뱃길은 59년 만인 2012 년, 인천 앞바다에서 김포시 한강까지 운하가 뚫림으로써 열렸다. 길이 18.7km, 수심 6.3m의 이 운하 -정식 이름이 경인 아라 뱃길, 국토해양부 고시 제2011-3호에 의하여 아라천 이라는 국가하천으로 지정됐다- 를 이용하면 서해에서 출발한 배가 서해 쪽 갑문을 통해 경인 운하로 들어오고, 김포시 쪽 갑문(閘門)을 통과해 한강으로 진입함으로써 여의도 한강 유람선 선착장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 같은 코스를 이용해 2012년 7월, 현대 아일랜드호(37톤급 · 70인승) 가 여의도~아라 뱃길~덕적도 사이를 운항했다. 그러나 서울시가 생태계 훼손과 환경오염, 안전성 문제 등을 이유로 유람선의 한강 통과를 반대하자, 운영사는 결국, 취항 2년 만에 중단하고 말았다. 서울시가 이처럼 한강으로 진입하는 모든 선박의 통행을 금함으로써 2조6,759억 원을 들여 서울과 서해를 잇는다는 경인 아라 뱃길의 원래 취지도 무색해졌다.

 

아라뱃길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운하의 수심이 6.3m밖에 되지 않는데다 운하 중간 중간에 16m 높이의 교량 때문에 4,000톤급 이상의 선박(화물선 포함)이 다니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아라 뱃길은 이명박 정부의 대표적인 예산 낭비 사업이라는 비난을 개통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아라 뱃길 관련 자료와 기사를 찾아보던 중, 아라 뱃길을 통해 철도와 자동차로 운송하기 힘든, 서울 월드컵대교 건설을 위한 교량 상판과 당인리 화력 발전소 리모델링 공사를 위한 설비, 경기도 서북부의 민간 열병합 발전소에 들어가는 가스터빈과 같은 발전설비 부품 등을 바지선으로 한강 임시 선착장까지 운송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바지선은 주로 강과 운하 등에서 화물을 운반하기 위해 제작한 바닥이 평편한 선박을 말한다.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은 파도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바닥 이 삼각형 형태로 뾰족하지만, 강이나 하천을 다니는 배는 그렇지 않다. 수심이 낮은 강이나 하천에서 암초나 모래톱을 만나면 재빨리 방향을 틀어 비켜 가기 좋도록 배의 바닥을 평편하게 만든다. 이런 배를 평저선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4대 강을 따라 세곡(稅穀)을 운반하던 세곡선들의 바닥이 모두 바닥이 평편한 평저선(平底船)이었다. 

 

주제에서 약간 벗어나긴 하지만, 우리나라 조선기술의 전통에 따라 건조된 거북선도 평저선이었다. 바닥이 평편하다 보니, 전황에 따라 방향 전환을 빠르게 해서 그때 그때 포 사격이 가능했던 거였다. 반면 왜의 선박은 바다를 다니는 바닥이 삼각형 모양으로 방향 전환이 쉽지 않았다. 

 

1,900톤급 서울함은 바다를 무대로 활동하던 바닥이 삼각형 모양인 선박이다. 서울함이 깊이 6.3m의 아라 뱃길을 여유 있게 통과 했지만, 한강에서 좌초될 위기를 맞았던 이유는 그 배의 바닥과 한강 바닥에 쌓인 퇴적물이 맞닿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강의 깊이가 퇴적물이 쌓여 아라 뱃길처럼 깊지가 않았던 것이었다. 

 

10년간 준설을 하지 않는 한강, 퇴적물로 수심 1~2m도 안 돼 

 

당시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바른 정당 홍철호 의원(경기 김포을)이 국토교통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07년부터 10년간 한강의 하상변동조사는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강 하구의 준설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아라 뱃길 운하를 통과했던 군함이 한강 바닥에 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필자는 지난 호(號) 〔에코 경제학〕에서 1886년 프랑스 군함 3척이 한강을 항행해 양화진까지 온 것을 근거로, 당시 한강의 수심은 서해 밀물 때 최소 6m 이상이었다고 추정했다. 행주대교 아래 신곡수중보는 한강에 유람선을 띄우기 위해 물을 가둬 놓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수중보의 높이가 2.3m이므로 한강 수심은 깊어 봐야 1~2m밖에 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고도 했다. 이런 정도의 높이인데도 군함이 다닐 수 있다고 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한강 수위가 낮아진 근본 원인은 강바닥에 퇴적물이 쌓였기 때문이다. 한강 바닥에 퇴적물이 쌓여 가는 현상은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강 둔치에 물이 찼다가 빠졌을 때 보면 오니 퇴적물이 사람 무릎 높이까지 쌓인다.

 

국토가 황폐화 했던 시기를 포함해 한강 상류로부터 밀려온 퇴적물이 한강 중하류에 쌓인 지 100여 년, 게다가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천(支川) -서울시에 등록된 한강 지천만 중랑천, 안양천, 홍제천 탄천 등 36개에 이른다- 에도 퇴적물이 쌓여 물이 거의 흐르지 않는 건천이 되어, 한강으로 흘러드는 물이 없으니 한강의 수량도 줄어들어 수심은 더 얕아졌다. 


예전에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강물이나 하천이 마르지 않고 언제나 물이 흘렀다. 한강도 그러했다. 100년 전에는 상류에서 오물을 버렸다손 쳐도 수량이 풍부하여 자정(自淨) 작용이 활발했기 때문에 여의도, 노량진의 한강 물은 식수로 사용할 정도였다.

 

한강 물로 차를 끓여 먹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한강 주변이 도시화 되면서 빗물이 강이나 하천으로 유입되지 못하고 배수구를 통해 일시에 강으로 빠져나가고 지하로 유입되는 양이 없다 보니, 비가 오지 않으면 한강 지천의 물이 마르고, 한강으로 유입되는 물도 줄게 되어 한강의 수심은 그만큼 얕아지게 된다.

 

서울시가 선박을 아라 뱃길의 김포 갑문을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이유는 한강 바닥의 퇴적물이 쌓였다는 불편한 진실 때문이다. 한강의 수심이 이렇게 얕아서야 무슨 배가 안심하고 다닐 수 있겠는가. →3편(http://www.m-economynews.com/news/article.html?no=34561)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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