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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흙의 반란이 시작됐다(1)

윤영무 기자가 간다

인체는 곧 흙의 성분이다. 모든 생명은 흙이 키우는 식물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그러나 지난 200여 년 간 각종 오염물질과 공해, 그리고 무분별한 서식지 파괴로 흙의 미생물이 소멸했거나 감소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영양성분을 식물로부터 제대로 섭취하지 못해 각종 질병에 시달리며 기후위기의 닥쳐올 재앙을 체감하고 있다.

 

30억 년 전부터 칠흑 같은 공간에서 지구 생태계를 지켜온 박테리아(세균), 방선균(放線菌, 세균과 사상균의 중간 형태), 사상균(絲狀菌, 곰팡이) 등 그 수를 헤아릴 없는 미생물의 제국(帝國)들, 그 제국의 성원(成員)들이 더는 참지 못하고 생태계 파괴의 주범인 인간을 공격하고 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흙에 귀를 기울여 보면 들리는 저들의 아우성과 분노를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까? 인류 대 멸종을 향해 시작된 흙의 반란이 우리 앞에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dust of ground)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7

 

 

100년 전, 화학비료에 반기를 들고 조선에 온 미국의 토양과학자


한 뼘은 됨직한 긴 인중(人中) 위로 무성하게 자란 콧수염과 가슴까지 내려오는 턱수염을 손끝으로 더듬던 미국의 토양과학자 플랭클린 히람 킹(1848~1911)은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의자에 대고 깊숙이 들어간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으로 시골 농장에서 태어나서 위스콘신 화이트워터 주립 사범학교를 다니던 시절과 1888년에서 1902년까지 14년간 위스콘신-메이슨 대학에서 농업물리학 교수를 하고, 1902년~1904년까지 미 농무부 토양국 토양관리부에서 일했던 과거사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동안 물리학을 농업에 적용하는 연구와 교육을 통해 토양물리학의 아버지라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토양과학자로서 볼 때 인공 화학비료는 흙을 망치는 원인이라고 그토록 강조했건만 세상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려준다는 화학비료에 미쳐가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이대로 가면 토양의 미생물 생태계의 교란이 오고, 농토는 황폐화되어 지속적인 농업자체가 불가능할 터였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사하고 인류의 생존조차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과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가 태어난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세상은 의술이 발달하고 위생상태가 좋아져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농지의 규모가 줄어 농작물 수확량은 인구증가율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 화학자들은 한정된 토지에서 수확량을 많이 거둘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는데 그러다가 1840년 독일의 화학자인 리비히가 처음으로 해결의 문을 열었다.

 

리비히는 “어떤 땅에서는 식물이 잘 자라는데 다른 땅에서 왜 그렇지 않은가?”하는 의문을 품고 흙을 연구한 결과, 질소, 인산, 칼륨이 충분히 녹아 있는 흙에서 식물이 잘 자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뼛가루에 황산을 넣어 수용성 인산(물에 녹는 인산)을 만들어 흙에 뿌려 보고 식물이 훨씬 크고 튼튼하게 자란다는 것을 보여줬다.


화학비료는 흙속 미생물의 독약

 

리비히의 연구를 바탕으로 화학비료를 개발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1843년에 로이스와 길버트가 최초의 화학비료인 과인산석회를 만들었고, 1900년대 초에는 질소비료와 칼륨비료가 개발돼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런 화학비료는 잘 숙성된 거름이나 퇴비에 비해 물에 잘 녹아서 흙에 뿌려 주기만 하면 단번에 식물 뿌리에 의해 흡수되었다. 하지만 토양 과학자였던 그의 생각은 반대였다. 당장은 수확량을 늘려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화학비료는 지속적으로 쓸 경우 흙속의 미생물을 죽여 생태계를 파괴하는 독극물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화학비료의 주성분은 황산암모늄, 염화암모늄, 황산칼륨, 염화칼륨 등으로 이런 성분의 비료를 뿌려주면 식물은 성장에 도움이 되는 암모니아나 칼륨 같은 영양물질을 뿌리로 흡수할 뿐, 황산이나 염소같이 산성을 띤 나머지 물질은 흙속에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흙은 산성화로 인해 마치 동맥경화에 걸린 듯이 단단해지고 수분이 줄어들어 작물이 자랄 수가 없이 황폐(荒廢)한다. 이로 인해 흙속의 이로운 미생물은 죽고 해로운 미생물만 생겨나니, 식물이 걸핏하면 병충해와 질병의 피해를 입게 되는데 화학비료나 잘못된 퇴비를 쓰면 반드시 농약을 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었다.

 

화학비료 반대론자였던 그가 미 농무부 토양국으로부터 해고를 당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비료로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 수확량 증대를 가져와야 한다는 당시 미 농무부 토양 국장, Milton Whitnesy와는 다른 의견을 가졌으니까 말이다. 그는 화학비료의 성능을 앞세우는 그 누구와도 타협할 수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화학비료가 아닌 자연농법에 대한 책을 써서, 흙 속의 미생물과의 상생을 통해서야 만이 건강한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다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세상에 전파하고 싶었다. 하지만 화학비료를 통한 농업 생산량 증산이 대세인 미국이나 유럽에서 자신의 이론을 입증할 만한 농가(農家)를 찾기가 어려웠다.

 

조선의 똥오줌 농사에서 대안을 찾다


그는 무릎을 쳤다. “그래, 맞아. 동양 3국, 한국, 중국, 일본으로 가자, 그 나라엔 아직 화학비료가 없질 않은가. 4천년이상 자연 퇴비로만 농사를 지어오고 있으니, 그들 농부들이야말로 내
가 주장하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가서 농사짓는 법을 보고 오자”

 

그가 책을 쓰다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해가 1909년, 그의 나이 61살 때였다. 당시 교통수단이라야 선박과 기차 뿐이었고, 기차가 다니지 않는 농촌은 걸어가야 했고, 운이 좋으면 가마를 구해 타고 다녀야 하던 시절. 요즘 같이 편리한 세상이라도 여행보험을 70살까지만 받아주는 걸 감안한다면 그의 동양3국 농업 답사 여행은 반은 모험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중국은 1900년 의화단 운동 이후 열강의 침입이 한층 강화되고 있었고, 대중 운동이 전국으로 번져 입헌군주제 운동으로 발전했다. 쑨원은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중국동맹회)를 결성하고 삼민주의를 제창하는 가운데 반청(反淸)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합병 통치한다는 경술국치 협정이 맺어지기 한 해 전이었다.

 

그는 3국 정세에 신경 쓰지 않았다. 흙과 작물, 그리고 농법은 오히려 그들 3국이 근대화를 이루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국민이 먹고사는 식량의 문제였다. 농부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면서, 혹은 통역자를 대동하고 농부들과 대화를 시도할 생각이었다.

 

1909년, 시애틀 항을 떠난 그는 9개월간 배와 기차로 이동하고 때로는 걷거나 가마를 타고, 3국의 농촌지역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농부들을 만나 대화를 나눴고, 그들의 농사짓는 방식을 기록했다.

 

그는 생애에 걸쳐 모두 7권의 책을 썼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책이 바로 동양 3국을 여행하고 나서 쓴 『Farmers of Forty Centuries, or Permanent Agriculture in China, Korea, and Japan-4천년 동안의 농부들, 또는, 중국, 조선, 그리고 일본에서의 지속가능한 농업』 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 3년 뒤, 1911년 그가 사망한 뒤 그의 아내인 Carrie Baker King여사가 완성시켜 그가 죽은 해에 출간 됐다. 이 책은 오늘날 유기농업 혹은 지속가능한 농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동양 3국의 농부들이 농사를 짓는 자연농법에 대한 그의 소신에 찬 여행보고서다.

 

유기농업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Northbourne경(卿)은 이 책이야말로 농업이나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고전’이라고 했다.


흙에서 온 것을 소중히 쓰고 다시 흙으로 돌려보내는 순환농업


그는 동양3국 농부들로부터 “자연에서 얻은 모든 것을 소중히 쓰고 다시 땅으로 돌려보내고 있는 지혜를 확인했다” 고 했다. 그들 농부들이야말로 서양식 무기질비료나 화학물질을 전혀 쓰지 않으면서도 오로지 자연에 가까운 농사를 지어 5억 명에 가까운 인구를 먹여 살리고 있었다.

 

그것도 1인당 20에이커(1에이커는 4,047㎡=1224, 20에이커는 2만 4천 평이 넘는다)나 되는 넓은 땅을 가진 미국 농부들과 달리, 겨우 1인 당 2에이커(2천 평~) 안팎의 땅을 가지고 매년 농사를 지으면서도 먹고 살고, 비옥한 땅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그들 농부들의 자연 순환농법에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가 조선농부들의 똥오줌(인분과 가축 분) 농사를 으뜸의 지혜로 쳤다. 똥오줌을 발효시켜 원래 흙에서 온 것을 다시 흙속의 미생물에게 되돌려 주는 방식이야말로 흙을 살리면서 4천 년간 이어온 생명농업의 진수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토양 과학자였다. 똥오줌을 그대로 버리면 크나큰 오염원이지만 퇴비 발효 과정을 통해 땅에 되돌려 보내면서 흙속의 미생물과 상생을 꾀하는 천혜의 자원으로 만드는 조선 농부들의 지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는 “똥에는 천연 질소와 칼륨, 인이 풍부하게 담긴 소중한 것인데 미국과 유럽은 ‘위생’을 운운하며 자연에 내다버리는 것을 능사로 여긴다”며 한탄했다.

 

그는 한 연구결과를 들어, “미국과 영국인들은 1년에 국민 100만 명이 질소 579만4300~1200만 파운드, 칼륨 188만1900~415만1000파운드, 인 77만7200~305만7600파운드를 바다와 강, 또는 호수, 지하수에 내다버릴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니 한심하지 않은가. 우리는 내다버리는 배설물 처리법을 우리 문명의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썼다.


파리 떼가 없는 조선의 똥거름 퇴비기술


동양 3국의 농부들은 오늘날에도 집집마다, 농촌 마을마다, 심지어 177만 명이 반경 4마일(1마일=약1.6km)안에 인구가 몰려 살고 있는 한커우와 우창, 한양(漢陽,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도 배설물을 열심히 모으고 있었다.

 

이렇게 땅으로 되돌려 주는 배설물은 성인 4억 명이 1년에 15만 톤의 인(燐), 37만 6000톤의 칼륨, 115만8000톤의 질소 등 총 1억 8200만 톤이 넘을 것이라고 그는 추정했다.

 

더구나 “똥오줌을 재활용하고 있는 동북아시아 여행길 도중에 똥거름으로 인한 파리 떼를 거의 본 적이 없다”고 한 그는 그 이유를 여행의 막바지에 가서야 알아차렸다면서, “…모든 배설물은 쓰임새 있는 곳으로 가도록 항상 잘 관리감독하기 때문에 파리의 부화장소 자체를 파괴하는 효과를 내고 있었다. 나라가 앞장서서 배설물의 위생적인 처리 문제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위생관리가 철저하다는 미국에서는 지금도 똥오줌 농사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파리 떼로 골치를 썩이고 있다. 그렇다면 왜 동양3국의 똥오줌 농사에선 파리가 끓지 않았을까? 그가 본 것은 우리들이 흔히 아는 시골냄새-인분냄새가 나는 거름이 아니었던 것일까?

 

사실 제대로 숙성이 된 똥오줌 퇴비에선 향긋한 흙냄새가 난다. 인분 냄새가 나는 퇴비는 숙성이 잘못된 경우다. 그러니까 그가 조선에서 보았던 퇴비는 제대로 발효된 것이었던 셈이다.

 

사람들은 퇴비 악취가 심하다고 알고 있지만 완전 분해가 되어 숙성을 제대로 시킨 고품질의 유기질 자연 비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미생물에 의해 탄소가 적절히 분해되고, 발생하는 가스가 사라져, 퇴비 내의 탄소와 질소의 비율이 아주 잘 맞춰지고, 퇴비 자체의 유기물들이 잘 분해됐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똥오줌 퇴비에선 향긋한 흙냄새

 

그가 조선에서 본 것은 아마 풀을 베어다가 쌓아두고 인분을 뿌려 발효시키는 증분법(蒸糞法)이었던 것 같다. 그가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18세기 말 다산 정약용과 비견되는 조선의 최고 지성으로 풍석 서유구(1764~1845)라는 분이 있다.

 

그 분이 쓴 조선 최대 백과사전이 『임원경제지』인데 이 책에 똥오줌 퇴비를 비롯한 ‘흙 살리기의 퇴비 경제학’이 꼼꼼하게 기술되어 있다. 만약 그가 이 책을 보았더라면 조선의 자연퇴비기술 수준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임원경제지에 나오는 증분법은 ‘띠풀로 뒷간을 만들어 처마는 낮게 하여 바람과 비를 막고 여기에 불을 때고 얻은 재, 키로 까불러서 얻은 껍질과 쭉정이, 볏짚이나 낙엽 등을 안에 넣고 띠풀 집을 얽어매고 덮개를 덮어서 똥의 기운으로 발효시킨다’고 했다.


우리의 전통농업에서 중시한 증분법에 의한 퇴비에 파리가 끓지 않는 것은 퇴비가 발효되는 동안 발생하는 높은 온도(60~70도)에 의해 벌레가 사멸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좋은 퇴비를 만들기가 어려워서 어설프게 숙성된 똥을 밭에 뿌릴 때가 많았다. 시골에 갔을 때 풍기는 악취를 시골의 냄새라고 하면서 웃어넘기지만 사실 미숙 퇴비를 썼기 때문이다. 베테랑 농부는 그런 퇴비를 만들지도 않고 쓰지도 않았다. 

 

그에 의하면 조선에서는 부엌 아궁이에서 나오는 재를 젖지 않도록 헛간에 모아두고 카리(K)성분의 비료로 사용하기도 하며, 부엌의 설거지물을 받아 두엄(가축분과 볏짚을 혼합한 퇴비) 위에 뿌려 발효를 촉진하고 있었다. 

 

농부들이 화학비료를 선호하는 요인 중에 하나가 바로 냄새가 덜하고, 퇴비를 만드는 노력이 적게 든다는 점일 것이다.

 


화학비료 투여 20여 년 만에 시작된 흙의 복수


하지만 그가 극찬해 마지않던 동양식 농법은 100년 만에 설 자리를 잃었다. 기계와 화학비료에 의존하는 생산량과 수익 위주의 서구식 농법에 의해 완전히 밀려났다.

 

그런데 그 결과는 지금 어떤가? 농업 생산량은 늘어났지만 농토는 동맥경화를 앓는 환자처럼 흙이 딱딱해지는 경화(硬化)현상이 심각하고, 농약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흙속의 미생물 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되어 가는 중이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낭비적인 오물 생산자다. 인간은 그의 손길이 닿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그 자신까지도 황폐화시켰다. 그의 파괴의 빗자루는 세대를 거치면서 통제력을 잃었고, 모든 생명의 토대가 되는 땅의 비옥함을 앗아가 향후 수백 년 정도 밖에 지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그의 말처럼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는 세계의 농토가 몸살을 앓고 있다.

 

더구나 농산물의 수확량이 늘어났다지만 그로 인해 파괴된 흙의 생태계로 인해 인간이 식물에서 섭취해야 할 모든 영양소의 함유량이 크게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36년, 미국 상원은 화학비료와 농약을 농토에 투여해 온지 20여 년 만에 미 국민의 99%가 심각한 미네랄 부족 상태라고 발표했다. 과일과 야채를 아무리 먹어도 필수적인 영양 결핍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미네랄을 공급하는 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MeCONOMY magazine January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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