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기를 품은 서늘한 바람, “아, 이렇게 좋을 수가. 천국이 따로 없어” 라며 막 잠이 들려는 순간, 윙윙 대며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 나는 갑자기 “어라? 만약 지금 정전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세상의 모든 전기가 끊어져 벌어지는 일본 영화 『서바이벌 패밀리』가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사는 낙이라고는 텔레비전 보는 일이 전부인 남편, 생선 손질도 못하고 벌레도 못 잡는 겁 많은 아 내, 헤드폰 소리가 일상이 된 대학생 아들, 스마트폰 중독인 여고생 딸. 도쿄에 사는 스즈키 일가는 말이 좋아서 가족일 뿐 실상은 각자의 삶을 사느라 대화가 단절된 전형적인 핵가족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의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긴다. 전기가 끊긴 것이다. 이른 아침, 멈춰버린 시계 때문에 늦잠을 잔 스즈키는 허둥지둥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형광등도 켜지지 않았고 밥솥도 작동 하지 않아 아침밥도 먹을 수 없었다. 결국 온 가족이 굶은 채로 집을 나섰지만,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멈춰서 높은 층을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할 때도 단순한 해프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순간, 금세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는다. 차에 시동이 안 걸리는 바람에 자동차와 택시는 물론이고 버스와 지하철도 운행을 하지 않았다. 간신히 도착한 회사에서는 출입문이 열리지 않아 유리를 깨부수고 들어와야 했고 사무실에선 컴퓨터 가 작동하지 않아 기본적인 업무도 볼 수 없었다. 결국 상부에서는 전기가 복구될 때까지 회사 운영을 중지하고 건물을 봉쇄했다.
엄마는 빵이라도 사 오려고 했지만, 정전으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들면서 식품 재고가 절대적으로 모자란 상황이었다. 이후 스즈키는 가고시마로 가기로 했고 철없는 딸 유이는 이런 와중에도 시골은 죽어도 못 간다며 툴툴댔지만, 상황이 여의찮았기에 군소리 없이 따라나섰다.
하지만 비행기마저 이륙하지 않는 상황. 결국 스즈키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가고시마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자는 것. 이번엔 아들 겐지 마저도 난감해했지만, 방법은 없 었기에 가족들은 유례없는 대모험을 시작한다. 그러는 사이 나라의 물가는 점점 폭등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돈 은 쓸데없는 종이 뭉치가 되어버렸고 당장 쓸 수 있는 식 품과 약품의 값어치가 높아지면서 일본 일대는 혼란에 빠진다.」
◇지구 대멸종의 공포 영화에 출연하는 엑스트라들
잠이 달아난 나는 좌우로 뒹굴뒹굴하면서 지구촌 80억 인구가 지금 ‘지구 대멸종’이라는 공포 영화에 출연하는 엑스트라가 아닐까 하는 몽상에 빠졌다. 날씨가 지금보다 더 더워져 전 세계인들이 일제히 에어컨을 켰다가 어느 한 나라에서 시작된 에너지 장애가 전 세계로 쓰나미처럼 번져나가는 지구의 대재앙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원전 4곳은 내년에 수명이 종료되고 예방 정비를 고려할 땐 최악의 경우 8기를 동시에 중단시켜야 한다고 한다. 연일 40도를 웃도는 날씨에 인도의 한 방송사는 에너지 수급 문제로 에어컨을 틀지 못하고 방송하다 앵커가 방송 도중 실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4월부터 폭염에 시달리는 베트남의 하노이, 호찌민 등은 고온과 강수량 부족으로 저수지와 하천에 물이 마르고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해 코를 막지 않으면 안 될 심각한 악취가 발생했다.
베이징은 연일 40도를 넘는 날씨를 기록하여 일사병, 열사병 같은 온열질환자들이 응급실로 대거 밀려들었다. 산둥성 지역은 지표 기온이 75도까지 상승하여 신발을 신지 않으면 화상을 입을 정도여서 반려동물의 외출을 자제하라는 경고가 나왔다.
지금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폭염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지만 유럽, 북미, 그리고 남미까지 그 어느 대륙 하나 빠짐없이 혹독한 공포의 여름을 보냈다.
◇첨단기술이나 정치구호보다 정상적인 계절의 순환 우선돼야
만약 지금과 같은 경제시스템이 계속돼 지구의 생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내년 여름은 지금보다 훨씬 더 극한의 폭염이 올 것이다. 그래서 어느 과학자는 아프리카를 떠난 최초의 인류 호모에렉투스가 지금까지 30만 년 동안 올여름이 가장 시원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아, 이 열기 봐라!” 아침이 되어 에어컨을 밤새워 가동한 안방에서 거실로 나오시던 어머니가 거실의 열기에 놀라서 하신 첫 마디였다.
“그러니까 어머니, 낮에 에어컨을 틀어 놓고 계세요. 전기료 아낀다고 하지 마시고요, 안 그러면 더위에 죽어요, 죽어” 내가 겁을 주듯 말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에어컨을 틀어 놓고 있는지 아닌지 낮에 확인 전화를 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뿐이 아니라 동생들도 에어컨 틀라고 난리를 쳐서 지금 틀어 놓고 있는 중이다”
저의 어머니처럼 지구는 기후변화로 인해 에어컨을 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날씨가 되었다. 그래서 이대로 기온이 더 올라가면 백 20여 년 전, 감자 탄저병이 돌아 감자를 주식으로 삼던 아일랜드인 100만 명이 굶어 죽었듯이 지구에 심각한 가뭄이 들고 병충해와 전염병이 만연해 물과 식량부족으로 인 해 전 인류가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다가 서서히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기후변화로 인해 올해 역시 여름이 길어지고 겨울이 짧아져 가을은 11월이나 되어야 시작될 것만 같다.
인공지능, 반도체, 전기자동차, 배터리, 휴대폰, 우주 로켓과 같은 첨단기술이나 기후변화 대책과는 전혀 동떨어진 정치구호도 중요하겠지만 지금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부채하나로 여름을 보내고 귀뚜라미 우는 가을밤을 정상적으로 맞이하도록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