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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관료들의 헌신 정신(전편)

한국 정신문화를 찾아서(44)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경제의 기적은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이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대통령에 못지않게 최선을 다하고 헌신한 경제관료들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대통령과 경제관료들의 콤비네이션이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냈고, 위기와 역풍의 고비마다 문제를 해결하는 아이디어와 정책을 만들고, 실행에 옮긴 것은 경제관료들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경제관료들의 역할을 세 가지 점에서 추출해 볼 수 있다. 첫째 박정희 대통령은 관료들에게 철저한 조사와 계획을 요구했다. 박 대통령은 치밀하고 객관적인 데이터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요즘처럼 국책 연구기관들이 거의 없었다. 대학의 연구개발 능력도 일천했던 시절이었다. 경제관료들이 발로 뛰어서 직접 조사하고 계획을 짜기 위해 날밤 새우기를 밥 먹듯 했다.

 

둘째, 대통령 자신이 아이디어를 낸 적이 있었지만, 대부분 아이디어는 경제관료들의 머리에서 나왔다. 대통령은 그 아이디어를 철저히 조사하게 한 뒤, 의사결정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내렸다. 당시 경제관료들은 대통령의 지시가 있기 전에 필요한 정책 아이디어를 낸 적이 많았다. 그만큼 적극적으로 일을 했다. 대통령은 관료들의 의견을 합당하다고 판단하면 서슴없이 받아들인 점도 높이 평가할 대목이다. 아마도 대통령의 그런 태도 때문에 경제관료들에게 능동적으로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 번째로 들 수 있는 점은 경제관료들의 우수한 행정업무 수행 능력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경제관료들은 당시 한국 인재들 중 최상급 수준이었다. 일본 식민지 고등교육을 충실히 받은 데다 미국과 유럽 대학과 연구 기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경험을 한 인재들이었다. 출신과 전공과 경험이 다양해서 이들이 모여 정책을 만들고 추진하는 데에 있어서 편향성과 오류는 줄이고 정책 효과는 높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정부 정책은 현실과 부딪치고 환경이 바뀌면 유연하게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시 경제관료들은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고, 정책과 법령의 타당성이 입증됐을 경우 원칙 있게 밀고 나갔다. 이것은 합리적 사고와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헌신 정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행동이었다. 정부주도 경제성장 방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관료들의 부패는 피할 수 없었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경제관료들이 상대적으로 가장 청렴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에서 한국 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인 홍제환 박사는 올해 4월에 「경제관료의 시대」(너머북스 간행)라는 제목의 저술을 펴냈다. 이 책을 자료로 삼아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시대까지 경제관료들의 역할을 살펴본다.

 

홍제환 박사는 1950년대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경제를 재건하고 추후 경제도약의 토대를 만든 경제관료로 백두진을 꼽는다. 조선은행에 근무하던 백두진은 1949년 재무부 국장을 시작으로 경제조정관, 재무부 장관을 지냈고, 나중에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백두진이 처음 정부 일을 맡은 직책은 외자총국 국장 자리였다. 1949년의 일이었다. 한국은 광복 이후부터 전쟁 중은 물론 1950년대까지 심지어 1960년대의 상당한 기간까지도 외국 원조에 의존했기 때문에 외자 관리는 무척이나 중요한 업무였고 청렴함과 공정함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백두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외자총국장을 맡도록 한 것이다.

 

백두진은 전쟁 중인 1951년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된다. 전시 인플레이션를 잡으라는 중대한 임무가 주어졌다. 토지세를 현금이 아니라 현물로 납부하도록 하는 임시토지수득세법을 채택했다. 이 법의 시행으로 정부가 관리하는 양곡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수매 시기에 방출되는 정부 자금도 줄여 통화팽창의 규모를 줄이는 효과를 얻었다. 백두진 장관은 일본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을 불하하는 방식에 경쟁입찰을 도입했다. 이 방식은 전시 재정적자의 폭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됐다고 홍 박사는 지적했다.

 

 

전시 재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는 유엔군의 활동 경비를 한국 정부가 대여해 주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재정 능력이 없었으므로 돈을 찍어서 유엔군대여금을 지급했다. 이것은 당연히 통화량을 급증시켰고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주요인이었다. 이 유엔군대여금을 조기에 상환받고 대여금을 달러로 받을 수 있으면 정부 재정에 큰 숨통을 트는 일이었다. 미국과 맺은 협정의 문구가 애매한 탓도 있어서 미국 측은 대여금이 아니라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었다.

 

백두진 장관은 미국 대사를 만나기도 하고 유엔군사령부와 접촉하기도 하면서 끈질기게 유엔군대여금 상환을 요구했다. 1953년 드디어 대여금을 달러로 완납 받게 된다. 백두진은 1953년 2월 건국 후 최초로 통화개혁을 실시하는 임무를 잘 처리했다. 1차 통화개혁은 전시 악성 인플레를 잡고 미국 당국의 신뢰를 얻어 유엔군대여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1950년대 부흥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한국경제의 초석을 놓았다는 점에서 한국경제의 공로자로 송인상을 빼놓을 수 없다. 식산은행에 다니고 있던 송인상은 1949년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관가에 발을 들여놓는다. 송인상 이재국장의 첫 번째 업적은 건국국채 발행을 꼽을 수 있다. 증세를 할 수 없는 형편에서 재정을 확보하는 방법은 국채가 용이했다. 송인상 국장이 장관에게 국채 발행을 제안해서 채택됐다. 1950년 2월 대한민국 최초의 국채가 발행됐으며 건국국채란 이름으로 1963년까지 17회 발행됐다.

 

 

송인상은 1952년부터 1957년까지 한국은행 부총재로 있으면서 국제통화기금(IMF)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 가입하는 데 기여했다. 이들 두 개의 국제금융기구 가입은 외환을 도입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판단해 정부에 건의했던 것이다. 송인상은 미 국무성과 IMF의 문을 수도 없이 두드렸다. 송인상의 노력에 힘입은바, 1955년 8월 한국은 IMF와 IBRD 가입에 성공하게 된다. 한국 정부는 이들 국제기구로부터 장기저리 자금을 빌려 경제발전 과정에 유용하게 활용됐다고 저자인 홍제환 박사는 말했다.

 

송인상은 1957년 부흥부 장관으로 입각한다. 그가 한 업적 중 비록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장기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도록 한 것은 주요 업적으로 꼽을 만하다. 송인상은 한국은행 부총재 시절 세계은행 부설 경제개발연구원에서 6개월 연수를 받았다. 이때 그는 인도의 5개년계획을 비롯해 경제개발계획을 소상히 공부한 바 있다.

 

이런 경험은 부흥부 장관으로서 최초의 경제개발계획을 성안하는데 큰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미국 오리건대의 교수 5명의 자문을 받는 등의 노력 끝에 1959년 3개년 경제개발계획이 신현확 재무장관 재임 때에 마련됐다. 3개년계획은 1960년 4월 국무회의를 통과했으나 4.19혁명 발발로 무산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5개년계획에서 부활함으로써 그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송인상은 재무부 장관 시절에 공무원 공개 시험을 도입했다. 그가 시작한 공무원 공개채용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와서 공식적으로 전체 공무원 시험제도로 채택된다.

 

 

장기영은 한국은행의 전설적인 조사부장 출신이다. 그는 한국은행 도쿄지점을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설치했다. 1950년 5월이었다. 한 달 후 6.25전쟁이 터지자, 한국은행 도쿄지점은 한국의 외화자산을 관리하고 전비 조달에 필요한 은행권을 인쇄했으며 민생물자를 긴급 수입하는 일을 돕는 등 전시경제의 핵심적인 업무를 담당했다고 홍 박사는 밝혔다. 한국은행 부총재로 근무하던 장기영은 한은 도쿄지점에서 인쇄된 은행권을 수송해 준 미국 항공사에게 운임으로 미군 군표를 지불하려다 적발된 사건으로 사임하게 된다. 은행을 떠난 장기영은 한국일보를 창간하고 사장이 된다.

 

한국일보 사장 겸 기자로 뛰던 장기영은 1964년 전격적으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임명된다. 장기영은 경제 수장 자리를 3년간 보냈는데, 물가안정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유례없는 역금리 정책으로 내자를 획기적으로 늘렸다. 그는 서독 정부로부터 차관을 제공 받는 등 외자 도입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1966년에는 그의 노력으로 한국의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IECOK(대한국제경제협의체)가 창설됐다. 이듬해 한일 각료 회담에서 새벽 4시까지 밤샘 담판을 벌인 끝에 2억 원의 추가 차관을 얻어내기도 했다.

 

 

김학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공로자로 평가받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해 장기영 부총리 등 내각 내에서 반대하는 장관들이 있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며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때 경제수석이었던 김학렬은 일본 자료 등을 참고하여 공사의 필요성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해 대통령의 결심을 이끌어냈다. 1969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되자,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될 때까지 사업 추진 과정을 챙겼다.

 

김학렬 부총리는 포항제철소 건설 사업에도 깊이 간여했다. 부총리 취임 즉시 종합 제철 건설 전담반을 꾸리게 했으며 일본이 제공키로 한 청구권자금의 일부를 포항제철 건설 자금으로 사용되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으며 건설공사에 대한 파격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포항제철은 박정희, 김학렬, 박태준 등 여러 사람의 노력에 힘입어 공사시작 3년 3개월 만에 완공됐다.

 

양윤세 경제기획원 외자총괄과장은 베트남 파병 이후 민간기업의 베트남 진출 길을 열어줌으로써 베트남 특수를 누리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다.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 진출을 통해 해외 사업의 노하우를 익히기 시작했고, 그같은 경험은 중동 진출, 세계 시장 진출로 이어지는 바탕이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양윤세는 1966년 국장급 자리인 투자 진흥관으로 승진했다.

 

양윤세는 이때부터 미국과 유럽을 누비며 본격적인 대한 투자 활동에 나서게 된다. 특히 미국의 민간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한국에 투자하도록 유도했다. 대한 경제협의체와 세계은행 연차총회 등에서 차관교섭을 벌였으며 투자교섭단장으로 유럽 각국을 돌며 투자유치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양윤세는, 투자진흥관 재임 4년간 종횡무진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한국경제에 필요한 외자를 들여오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 언론은 그를 ‘한국 정부의 대외창구’라고 칭했다.

 

황병태 경제기획원 공공 차관 과장은 1964년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의 호출로 청와대에 갔더니, 걸프사로부터 비료 공장 건설 차관을 유치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황병태 과장을 대통령특명 대사로 임명했다. 29살의 황 과장은 죽을 힘을 다해 대통령의 임무를 완성해야만 했다. 다행히 피츠버그 본사에서 걸프사 회장과의 면담이 이뤄져 긍정적인 답변을 얻고 귀국할 수 있었다.

 

이듬해, 황병태 과장은 이번에는 미국 정부가 우리 정부에게 주기로 약속한 1억 달러의 AID 차관을 조기에 받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황병태 과장은 매일 미국 국무부 담당자를 찾아가 매달리다시피 하며 차관을 앞당겨 집행해 줄 것을 교섭했다. 무려 3개월간이나 미국에 체류하면서 차관의 일부 금액을 받아냈다. 참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다.

 

한국 경제관료들은 위로는 장관에서부터 아래로는과장 까지 한국경제를 위해 발로 뛰었다. 그들의 간절한 말과 행동이 미국과 유럽, 일본, 국제기구 관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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