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안전법 제정으로 철도부문 안전강화를 위해 ‘형식승인제도’가 도입되면서 제작기간이 평균 12~15개월 이상 증가돼 중소 제작사들이 납품지연과 동시에 협력사들이 경영난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11년 KTX 광명역 탈선사고를 계기로 철도 안전에 대한 우려가 급속히 파급되면서 정부는 근본적·예방적 안전 강화를 위해 ‘형식승인제도’로 개편했다. 제작 전 설계검증이 추가됐고, 제작자의 품질관리 권한과 책임 강화와 함께 다양한 사후관리 수단이 마련됐다.
형식승인제도는 국내에 철도차량 또는 일부 철도용품을 새로 도입하여 사용하고자 할 때 국토교통부 장관이 철도의 안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핵심적인 설계사항에 대하여 사전에 검사하고 개선하도록 하는 제도다. 철도 부문에서는 국토부 산하 한국철도기술연구원에서 인증 절차를 맡고 있다.
이지하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은 “철도 형식승인제가 정착되면서 국내 철도 안전 및 철도 기술의 획기적인 향상을 이뤄나가고 있다”며 “앞으로 제도의 정착과 원활한 시행을 위해 산업계의 의견을 반영하고, 산·학·연 전문가의 연구를 통해 다양한 개선방안을 도출해 나갈 것이다”고 말했다.
◇ 형식승인제도 시행 배경과 중소 제작사의 납품지연 문제
현재 국내에선 대기업인 현대로템과 중견기업인 우진산전, 다원시스 등 3곳이 열차를 제작한다. 현대로템은 고속열차와 전동차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열차를 생산하고 있고, 우진산전과 다원시스는 일반열차와 전동차, 트램 등을 주로 만든다.
코레일(한국철도공사) 전동차 차종별 계약을 보면, ▲전동차(광역/도시철도)는 현대로템 448량(2019년, 1호선·3호선·과천선·분당선), 우진산전 490량(2020년 1·3호선), 2024년 12월 108량 입찰 예정(동해선, 1호선, 수인분당선) ▲간선형 전동차(EMU-150)는 다원시스 150량(2018년 경부·호남전라선), 다원시스 208량(2019년 경부·호남·전라선), 다원시스 116량(2024년 경부·호남·전라선) ▲고속전동차(EMU-250, EMU-320)는 현대로템 84량(2016년), 현대로템 136량(2023년), 현대로템 78량(2024년) 등이다.
문제는 통상 열차 납품계약을 맺은 뒤 제작사가 납품기일을 제때 맞추지 못하면 발주처에서는 이에 따른 벌금 형태의 배상금을 부과한다. 코레일의 경우 지체된 날에 비례해 계약금액의 0.1%씩, 최대 30%까지 부과한다.
3사 중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현대로템은 2011~2024년 기간에 수천억대(추정치)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중 단일 배상금 액수로는 ‘EMU-250’ 84량에 대한 납기지연의 책임을 물어 396억원을 부과한 경우도 있었다. 다만 현대로템는 큰 액수의 벌금 지불에도 충분히 감당할 사안으로 보고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다원시스는 서울교통공사가 2·3호선 전동차 169량 중 납품이 늦어진 72량에 대해 부과한 벌금 등이 약 500억원대로 불어났다. 우진산전은 2021년 이전에 부산 1호선 전동차 200량 가운데 64량이 기일을 넘긴 데 따른 54억원의 배상금을 지불한 이후에 코로나 팬데믹 기간 이외에는 배상금 납품 계약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특히, 중소 제작자들은 형식승인제도가 정착된 2018년 이후에 발주된 납품 또는 제작 중인 철도차량의 경우 제작기간이 약 20~30개월 이상 증가하면서, 인수검사 및 시운전 편성 문제 등 계약납기 조정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철도 안전 향상과 중소 제작자도 살리는 ‘윈윈 정책’ 필요
2010년 10월 제2차 경부고속철 개통에 따라 국내 기술로 생산된 KTX-산천선로의 장애가 잦아지면서 본격적으로 철도안전 실태 검사가 강화됐다. 철도공사와 감사원의 자료를 인용해 분석한 결과, 2004~2011년 KTX 철도사고 및 장애의 절반 가량(45%)이 차량에서 비롯됐다. 이밖에 인적 요인 11%, 외부 요인 26%, 신호 및 통신 문제가 14%로 조사됐다.
무엇보다 2012년 감사원의 ‘KTX 운영 및 안전관리실태’ 검사결과에서 KTX-산천선의 설계·제작의 결합이 70% 이상인 것으로 분석됐다. 이에 당시 주무관청인 국토해양부는 고속철도차량 제작검사기관이 차량의 설계·제작 기술 수준, 지도·관리 업무에 대한 엄중한 주의를 촉구했고 곧바로 형식승인제도가 만들어졌다.
철도 형식승인은 설계적합성 검사, 합치성 검사, 차량형식 시험 등을 통해 순차적인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검사 소요 기간은 최고 5개월부터 최장 15개월 정도로, 평균적으로 9~12개월 정도 걸린다. 이후에 신형 차량을 인수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속차량 50시간, 간선 EMU 47시간, 도시형 전동차 39시간이다. 이를 형식승인제도 도입 전의 고속 36시간, 간선 EMU 32시간, 도시형 전동차 22시간과 비교해 보면 큰 차이를 보인다.
산업계는 제작기간 증가와 품질 유지의 어려움을 우려하며 부품공급의 차질이 초래할 수도 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초도 편성용과 양산용 납품시점이 약 12~18개월 이상 차이가 나면서 비싼 외국산 부품을 구매해야 하는 번거로움, 부품 구매 발주사에 전가되는 수수료 등 비용 발생, 제작기간 불확실성을 이유로 들었다.
철도차량 제작자 다원시스 관계자는 “차종별·형식별로 소요시간이 상이하지만, 형식승인제도 도입 이전에 비해 프로젝트에 투입된 인력과 시간이 32% 정도 증가했다”며 “철도 차량을 제작하려면 발주하는 곳에서 타당성 검토를 제대로 해서 미리 발주를 하고, 제작사에게 충분한 제작 기간을 줘야 하는데 발주처에서 현실에 맞지 않는 제작 기간을 요구하니 결국 무너지는 곳은 우리 같은 영세한 철도차량 부품업체들이다”고 설명했다.
◇철도차량 표준절차 개선 여지는?...국토부 "지금도 고장 오류...안전기준 강화 필요"
기존 철도차량 구입 표준절차는 안건 제출→실무자 회의→투자심의 실무위원회→투자심의위원회 이사회를 거친다. 다원시스 측은 '투자심의 실무위원회' 폐지와 동시에 투자사업 사전회의 개최를 통한 간소화로 약 20일을 단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다원시스는 제작설명회 30→20일, 차량구매 요청 30→14일, 규격공고·일상감사 30→14일, 입찰공고 90→46일, 구매계약 30→16일 등의 개선안을 제시했다. 이처럼 표준절차를 개선할 경우, 기존 270일에서 120일이 단축된 150일에 철도차량 구입을 마무리할 수 있다고 다원시스는 주장했다.
무엇보다 다원시스와 우진산전은 "형식승인제도 도입으로 소요기간이 길고 비용이 많이든다"며 "중소 제작사의 애로사항을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다원시스 관계자는 "철도차량제작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대기업의 독점화 회귀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코레일은 2021년 노후 전동차 74량에 대한 장기패키지 사업을 하면서 현대로펌에 유리한 평가 기준을 설정해 여론의 비판을 받고 시행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고속철 분야에서도 1단계 기술 평가기준을 확대 적용해 중소 경쟁업체들은 SR 입찰과 같이 1단계 기술평가 부적격을 받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우진산전 측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는 형식승인제도로 인해 납품에 어느 정도 지장이 있었지만 지금은 철도차량 부품 및 전기버스 전환 등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어려움을 이겨 내고 있다”며 “안전 측면에서 형식승인제도의 정착은 중요하지만 똑같은 장치임에도 노선이 다르면 승인을 별도로 받아야하는 등 실용적인 면에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코레일과 국토부는 형식승인제도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코레일 측은 “철도 부문에서 형식승인제도는 차량·용품 형식 승인, 제작자 승인, 철도차량 완성·검사개조 승인 검사 등을 국토부 산하 한국철도기술연구원에서 인증 절차를 맡고 있다”며 “코레일은 승인된 내용에 대해 실질적인 안전 운행과 서비스 개선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고 전했다.
국토부 철도운행안전과 이동호 사무관은 "형식승인제도는 최소한의 안전기준이다. 제도의 강화로 인해 단가가 올라가면서 제작사 측에서 부담이 증대될 수 있지만, 지금 수준이 적정하다고 본다"고 했고, 국토부 철도운행안전과 A감독관은 "(형식승인제도의) 단계별 검증 절차는 안전상 반드시 필요하고 설계, 부품 고장, 전기신호 등 다양한 측면서에 오류가 날 수 있다. 그것보다 입찰 제도를 우선 손봐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