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비디아가 ‘제 2의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상용화하기 위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메모리반도체 회사들과 비밀리에 접촉 협의한 사실이 확인됐다. 엔비디아가 ‘개인용 인공지능(AI) 슈퍼컴퓨터’ 대중화에 필요한 특수 D램 모듈을 만드는 데 성공할 경우, 메모리반도체 업계가 또다시 요동칠 전망이다.
17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자체 메모리 표준인 ‘SOCAMM’(소캠)을 만들고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테크놀로지 등과 '넥스트 HBM'으로 꼽히는 컴퓨트스프레스링크(CXL) 메모리 상용화 가능성을 협의하고 있다. 현재 엔비디아와 메모리 회사들이 SOCAMM 시제품을 교환하면서 성능 테스트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달 17~21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개최되는 세계 최대 AI 콘퍼런스 ‘GTC 2025’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삼성전자 고위급 경영진의 만남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CXL 메모리 상용화에 관한 구체적인 협의가 나오지 않겠느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SOCAMM(System-on-Chip with Advanced Memory Module)은 일반적으로 System on Chip(SOC)과 고급 메모리 모듈(Advanced Memory Module)이 결합된 기술을 의미한다. SOC는 CPU, GPU, 메모리, 기타 중요한 컴퓨팅 구성 요소들을 하나의 칩에 통합한 시스템이다.
소캠은 기존 소형PC·노트북용 D램 모듈 대비 가격 대비 높은 성능과 전력 효율성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무엇보다 ‘탈부착형 모듈’이기 때문에 사용자가 직접 메모리를 교체해 PC 성능을 지속적으로 향상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기존 HBM은 엔비디아의 AI용 GPU에서 필수적인 메모리로 자리 잡으며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구조를 재편했다. 만약 소캠이 개인용 AI 시장을 겨냥한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으면, 또 한 번 메모리 산업의 지각변동이 예상된다.

●엔비디아의 러브콜...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상용화 협의?
엔비디아가 소캠을 개발하는 이유는 ▲고속 데이터 처리 ▲저전력 설계로 에너지 효율성 증대 ▲소형화(똑같은 PC에 더 많은 메모리를 넣을 수 있음) ▲시스템최적화(하나의 칩에 모든 구성요소가 통합되어 시스템 설계) 등이 있다.
구체적으로 엔비디아는 소캠을 통해 ‘제 2의 HBM’을 만들길 원한다. 반도체 업계는 AI, 딥러닝, 자율주행차와 같은 분야에서 매우 높은 성능을 요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메모리 대역폭과 처리 속도가 매주 중요한데, 지금까지 GPU가 메모리 대역폭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기존의 메모리 시스템이 여기에 적합하지 않다.
엔비디아는 즉각적으로 소캠 기술을 기반으로 자율주행차, 데이터 센터, AI 및 머신 러닝 분야에서의 성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상용화 협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HBM에서 주도권 경쟁에서 밀렸던 삼성전자는 이번 소캠을 통해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할지 주목된다.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가 증가하면서 반도체업계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관련 인력 보강과 조직 개편에 집중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역시 올해 HBM 등 고부가 메모리 비중을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특히 메모리 수요 회복세가 올 2분기부터 본격화될 것이란 진단 하에 HBM 5세대인 HBM3E 개선제품을 1분기 말부터 양산·공급하고, 올해 전체 HBM 공급량은 전년 대비 2배 수준으로 확대한다는 전략이다.
SK하이닉스 역시 이번 주 중 내부적으로 청주 M15X 공장 파견 인력 규모를 확정 지었다. M15X는 SK하이닉스가 충북 청주 지역에 두고 있는 기존 팹 M15를 확장한 것으로, HBM(고대역폭메모리) 생산에 집중할 계획이다. 총 5조3000억원 규모를 투입하며 올해 4분기 준공해 내년 본격 양산에 들어갈 전망이다.
하지만 삼성전자·SK하이닉스 관계자는 “아직은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말 할 수는 없다”고 전했다.

●AI PC 시대 임박...국내 반도체 업계의 주목할 분야는
엔비디아의 소캠 추진은 AI PC 시대를 앞당기려는 젠슨 황 CEO의 전략과 맞물려 있다. 그는 지난달 ‘CES 2025’에서 개인용 AI PC ‘디지츠(Digits)’를 공개하며 “이제 AI 없이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며 “데이터 과학자와 AI 연구자 책상에 AI 슈퍼컴퓨터를 갖다놓을 수 있다면 이들이 ‘AI 시대’를 형성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현재 AI 개발자들은 아마존(AWS) 등 대형 클라우드 기업의 서버를 이용해 모델을 훈련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엔비디아는 소캠 기반의 AI PC를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솔루션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한다. 엔비디아는 디지츠 첫 제품에는 개별 LPDDR(저전력 더블데이터레이트)을 활용하고, 차기 제품에 4개의 소캠 모듈을 적용하는 전략을 세운 것으로 분석된다.
반면 중국 업체는 생성형 인공지능 딥시크가 몰고 온 ‘저비용 고효율’의 AI 트렌드로 저사양 업체들의 수혜를 기대하고 있다.
시스템반도체 설계 IP 기술 개발 업체인 오픈엣지테크놀로지는 “고대역폭메모리(HBM)보다 상대적으로 저사양인 칩에서 AI 구현이 가능하다는 컨센서스가 형성되면서 LPDDR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이종욱 삼성증권 연구원은 “AI 시장이 학습에서 추론 시장으로 확산하며 속도 8.5Gbps(초당 기가비트) 이상의 하이엔드 LPDDR 수요가 높아질 것으로 전망한다”라며 “최선단 노드를 확보하지 못한 AI, 자율주행, 디바이스 고객사가 추론용 주문형 반도체(ASIC) 생산이 늘어날 것이다”고 설명했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 소캠이 상용화되면 HBM에 버금가는 반도체 업계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기존 HBM은 앞서 엔비디아의 AI용 GPU에서 필수적인 메모리로 자리 잡으며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구조를 재편했다.
한편, 이날 ‘제2의 HBM’ 소캠 관련 양산 소식에 코스피는 삼성전자 장중 56500원(0.89%), SK하이닉스 21600원(2.85%)까지 상승세를 탔고 티엘피, 심텍 등 기판 업체들의 주가가 급등했다. 자체 메모리 표준인 ‘소캠’을 만드는 엔비디아에 기판 공급을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이란 소식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날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반도체용 인쇄회로기판 개발업체 심텍의 주가는 3,240원(20.9%) 오른 1만8,690원에 거래됐다. 키움증권은 투자의견 ‘매수’로 설정하고, 목표가를 2만3,000원으로 상향 수정했다. 또한 티엘비의 주가는 전 거래일 대비 3,390원(18.2%) 오른 2만1,950원에 마쳤다. 티엘피는 다수의 PCB 업체들과 달리 메모리 모듈 PCB을 주력으로 하고 있어 경쟁사들과 1년 이상의 기술 격차를 확보하고 있다.
이 밖에 국내에서 유일하게 'LPDDR5 5G IoT 솔루션'을 제공하는 쓰리에이로직스는 엔비디아의 '저전력 LPDDR' 자체 메모리 구축 소식에 급등했다. 이날 쓰리에이로직스는 29.9%가 오른 8,210원을 기록하며 상한가를 쳤다.
정형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선임연구위원는 “AI PC 시대를 앞두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업체가 엔비디아 측의 ‘제 2의 HBM’ 개발이 오가고 있는 것 자체가 긍정적인 요소는 분명하다”며 “앞으로 저가 칩 분야는 중국에게 내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HBM 등 고부가가치의 반도체 개발 분야는 국내업체가 주도권을 확실히 다지는 것이 향후 미래 먹을거리를 확보하는 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