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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위기에 선 미국 교육부


지난 3월 20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연방교육부 (United States Department of Education)를 폐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교육부가 막대한 자금을 사용하는 데도 관료주의에 매몰되어 막대한 예산을 사용하면서도  규제만 하지 실제 교육에는 성과를 내지 못하므로 폐지 하고 학부모, 주, 지역사회의 역할과 책임을 강화하여 교육의 성과를 제고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인 것 같다.

 

트럼프는 지난 제45대 대통령 선거기간 중에도 연방헌법에서 각 주의 권한으로 되어 있어 헌법상 연방정부의 관여가 허용되지 않는 교육사무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견해를 밝힌 바가 있다. 지난 2017년에는 공화당 하원의원이 2018년 12월 31일 자로 교육부를 폐지하는 법안을 제출한 바도 있어 연방정부의 행정기구로 창립되어 45년밖에 되지 않은 교육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그 향방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미국 교육부 탄생 비화

 

미국에서 연방정부의 각료조직(대통령 승계 순위 16위)으로 1979년에 설치된 교육부는 ▲교육에 대한 보조금 정책의 작성 및 배분, ▲미국 전역의 학교 데이터 수집·연구의 지도, 그 결과의 국민에 대한 공개, ▲교육에 관한 주요한 문제의 식별 및 중점적 시행, ▲차별금지 법령 강화 및 교육의 기회균등 등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연방제 국가인 미국의 헌법에는 연방이 교육에 관여할 수 있는 근거가 없으며 교육 사무는 주와 지방의 책임하에 있다. 연방정부가 직접 교육에 관여하지 않는 미국의 오랜 전통은 헌법상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런 연유에서 카터 정권에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교육부가 창설되기 이전(1908∼ 1975년)에도 교육부 형태의 중앙행정기관 설립에 관한 많은 법안이 있었지만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카터 정부가 교육부를 창설하게 된 배경에는 미국 최  규모의 교원단체인 전미교육협회(National Education Association, NEA)의 급속한 정치화와 교육에 대한 연방 단위의 존재감이 커졌던 것과 관련이 깊다. 지난 1972년에 NEA는 정치적 활동 위원회를 조직, 1975년에는 다른 조합과 연합하여 선거 캠페인을 위한 노동연합 정보센터(Labor Coalition Clearinghouse, LCC)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LCC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Need: A Cabinet Department of Education’을 공표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대통령 선거 후보자인 카터를 지지하기 위한 중요한 단계였다.

 

당시 NEA는 대통령 후보자 지명에 적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규모였다. LCC도 1976년의 민주당 전 국대회에 참가할 선거인단 3,000명 중 400명을 선발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NEA는 1976년에 카터가 백악관의 주인이 되는데 힘을 보탰으며, 이러한 연유로 교육은 카터 정권에게 가장 중요한 정책 우선순위가 되었다.

 

교육을 매우 중요한 문제로 생각했던 카터는 심사숙고 과정을 거친 후에 교육부를 창설하기로 결심하고 교육부 조직법(Department of Education Organization Act)안을 작성하여 의회에 제출하였다. 이 법안은 1977년과 1978년의 논의를 거쳐 통과하였다. 그리고 카터 대통령이 1979년 10월 17일 법안에 서명함에 따라 각료 단위의 교육 행정기구 창설을 위한 오랜 기간의 노력은 결실을 맺게 된다.

 

그렇다고 미국의 교육부 창설이 쉽게 된 것은 아니다. 카터 대통령이 제안한 교육부 신설안이 1979년 7월 11일 상하원 양원에서 가결되어 후생교육부의 교육행정부문, 국방부의 해외교육부문, 미국 인디언 문제국의 인디언 교육부문이 통합되었는데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교육부를 신설한 가장 큰 이유는 연방정부의 보조금 등을 충실하게 사용하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교육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원을 통과한 교육부 설치법은 연방정부가 주의 교육행정에 개입하는 것을 명확히 금지하고 있는 헌법 원칙과 ‘미국의 교사와 교실이 교육의 중앙집권화로 마비되어서는 안 된다’는 일부 의원의 반론 등 부정적 의견이 많아 하원의 표결에서는 찬성 210표, 반대 206표 겨우 4표 차로 가결되었다.

 

여성으로 미국의 최초 교육부장관이 된 셜리 허프스데일러(Shirley Hufstedler)는 연방재판소 재판관 출신이었는데, 그가 세운 교육부의 정책과제는 네 가지였다.

 

첫째 목표는 연방과 주와의 관계를 원활히 하고 강화하는 것이었는데, 허프스데일러는 학생에 대한 지원을 둘러싸고 복잡한 형태를 가진 모든 연방 프로그램에 대한 규제적인 관료주의 (regulatory red tape)를 줄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연방-주-지방의 협력은 교육적 이익단체가 아니라 개개인의 학생 에게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둘째 목표는 교육부가 규제적 법률을 강제하여 지방의 교육에 관한 권한을 침해하지 않을 것을 강조하였다. 대신에 교육부는 지역의 성공적 모델을 전국에 파급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또 셋째 목표는 교육의 기회균등 이슈에 중점을 두는 것이었고, 마지막 목표는 국가적으로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었다.

 

◇교육부 존폐의 정치경제학

 

카터 대통령이 1980년 선거에서 패배하고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불과 2년 전에 카터 정권에서 창설한 교육부는 폐지 위기를 맞게 된다. 레이건 대통령의 정치적 관점에서는 교육부가 담당하는 대부분의 기능을 주와 지방에 돌려주어도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레이건은 미국 헌법 제정자(Founding Fathers)의 의도, 즉 연방정부가 각 주의 권한을 존중하고자 의도한 것으로 주 정부와 지방의 사무인 교육에 연방정부가 관여하지 않는 것이 정당하므로 교육 부를 해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레이건 정권에서 교육부가 존속하는 것으로 공약이 변경되었다. 여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1981년에 레이건 정부의 초대 교육부 장관인 테릴 벨 (Terrel Bell)이었다.

 

벨은 보건교육복지부(Department of Health, Education and Welfare)가 교육사무를 관장할 때 3년간에 걸쳐 교육국장을 한 경력이 있었다. 벨의 처음 임무는 교육부를 해체하는 일을 주관하였지만, 교육에서 연방정부의 역할이 중요하고 교육부의 존속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부처는 유지하되 그 역할을 재조정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결과적으로 교육부는 존속하였지만 교육에서 레이건 정부가 선명히 한 작은 정부 정책의 영향으로 연방 정부의 관여는 크게 줄어들었다. 특정 목적 보조금을 포괄적 보조금으로 변경하는 등 전체적으로 보조금을 없애거나 줄이고 교육부의 역할을 창설 이전과 마찬가지로 통 계수집의 기능만을 담당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레이건 정부 말까지 연방정부의 교육예산은 크게 줄어 들었는데 초중등교육법 Title Ⅰ은 70억 달러가 삭감되고, 특별프로그램 포괄적 보조금은 8년간 28%가 감소하였다. 전반적으로 연방정부의 교육에 대한 관여는 줄었지만 벨의 지도하에 교육부는 존속되었으며 대통령이 목표로 하는 몇 가지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위기에 선 국가 보고서 

 

레이건 정부의 큰 업적 중 하나는 1983년에 발표한 ‘위기에 선 국가’이다. 이 보고서는 1981년 8월 26일 ‘탁월한 교육에 관한 국가위원회’(National Commission on Excellence in Education)가 구성되어 활동을 시작한지 18개월이 된 1983년 4월 26일 제출되었다. 이 보고서에서는 중대한 결함이 있는 미국의 교육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미국 전역에서 질 높은 교육을 실현할 국가의 책무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에 필요한 기술수준, 읽고 쓰기 능력, 교육수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성과에 맞는 만큼의 물질적인 보수를 받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국민생활에 참가할 기회조차 빼앗겨버린다’는 전제하에 국민이 높은 학력수준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위기에 선 국가’는 1960∼70년대의 교육조건의 평등을 학습결과(᷏ᅪ)의 평등으로 바꾼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는 많은 주에서 교육개혁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기에 선 국가’는 교육부의 존속에도 기여하였다. 1984년 정부 차원에서 예산 삭감이 논의되었을 때 교육부의 예산 삭감은 언급되지 않았던 것도 이 보고서의 영향이었다. 이후 미국은 교육기관의 설명책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으로 2001년에 초 중등교육법을 대폭 수정한 낙오아동방지법(No child Left Behind Act)이 있다.

 

 

지난 3월 11일에는 교육부가 연방정부 지출 삭감 방안의 일환으로 직원 수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당시 4,133명이던 직원을 절반 수준인 2,183명으로 줄인다는 계획이다. 오래전부터 교육부 폐지 의사를 밝혀온 트럼프 대통령이 앞으로 교육부 폐지 움직임을 가속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이번 행정명령으로 폐지 절차가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교육부 폐지 논쟁은 초대 교육부장관 셜리 허프스데일러가 내걸었던 ‘모든 연방 프로그램에 대한 규제적인 관료 주의의 최소화’라는 사명에 소홀히하여 제기된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전망하자면, 교육부가 실제 폐지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연방정부의 교육 보조금 등 적극적 행정을 위한 예산은 크게 줄어들겠지만, 미국 전역 교육데이터의 수집, 교육의 차별금지 정책 등 교육의 격차해소를 위하여 주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방 향으로 재편되어 존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나라도 2000년대 이후 정권교체기마다 교육부 폐지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교육부 폐지 논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국민의 교육권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정치보다 교육 현장의 편에 서서 학생 중심의 교육행정을 하고 있는지, 교육 경쟁이 격화되고 교육격차가 확대일로에 있는 현실을 정확히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정책과 대안을 가지고 있는지, 학생과 학부모, 국민에게 교육행정의 설명책임을 충실히 하고 있는지 등은 깊이 생각할 때이다.


김상규 박사

와세다대학 대학원에서 기초교육학을 전공하여 교육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현재는 학교법인 태재학원 법인처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민족교육(2017)', '교육의 대화(2017)', '교육의 폴리틱스·이코노믹스(2022, 문화체육관광부 2022년 세종도서 학술부분), '학교제도 : 미국·영국·일본(2023년, 문화체육관광부 2024년, 대한민국학술원 2024년 우수 학술도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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