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돈(chaos)의 사유
사유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처럼 고요하고 조용한 상태가 아닌 충격의 발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일이 지난해 12월 3일 조용한 밤에 일어났다. 저항하는 보좌진과 시민들, 그리고 신속하게 이뤄진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요구 결의안 가결로 다행히 충돌없이 계엄군은 물러났다. 우발성에 직면하면서 사유가 시작된다지만 평온하던 일상의 균형이 깨지는 혼란을 겪으면서 새로운 사유의 여 지를 가지게 되었다.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무질서한 사태를 헌법에 따라 수습 하려는 진영과 계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자들의 명분이 충돌하면서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혐오의 감정으로 분열되었다. 헌법의 가치와 규범을 훼손하는 퇴행이 이어지고, 상식이나 정의에 따른 논리보다는 아무 말이나 가능 해진 상황에 당혹스럽다.
계엄령 선포 이후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은 에너지를 얻은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이데아’처럼 끝도 없이 변화하고 움직이고 생성하는 생명체, 꿈틀거림 그 자체다. 보이지 않았던 것을 새롭게 보여주거나 들리지 않았던 것을 들려주는 예술의 과제를 표방하듯 그 동안 우리가 인식하지 않았던 것을 새롭게 사유하도록 이끄는 창작 행위처럼 보인다.
정의와 진실보다는 부조리함과 무의미함이 가치를 얻어가는 이상한 상황이 뉴스를 장식한다. 대다수 사람을 속였던 ‘캡틴 아메리카’, 정당 대표의 암살을 기원하는 지식인, 음모론을 펼치거나 민주주의를 말하며 독재를 향하는 의심스러운 선동가들로 아스팔트는 연일 뜨겁다. 사실 온갖 우스꽝스러운 부조리로 가득찬 사이비 주장인 ‘파타피직 스’가 어느새 우리 곁에 스며들었음이다.

◇뫼비우스의 띠, 동어반복
한동안 헌법재판소는 초현실적인 말들이 오가던 공간이 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니 내란이 아니라는 파타 파직스한 말들로 장황했던 탄핵 심판 절차는 마무리되었으나 후폭풍이 거셀 수밖에 없다. ‘인원’이란 말을 써 본 적이 없다고 주장하던 피청구인은 뒤이은 변론에서 반복적으로 그 단어를 사용하는 자가당착의 실수를 연발하기도 했다.
‘파라독스(paradox)’나 이율배반의 논리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딜레마(dilemma) 또한 양립할 수 없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를 지닌 상황을 일컫는다. 역설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동시성을 함축한다. 취사선택의 가능성도 있지만 말하고 싶은 것만으로 진실에 다가설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파라독스의 사유를 제시하던 현대 화가 중에 ‘에셔’와 ‘마그리트’가 있다. 네덜란드 판화가 에셔(1898~1972)가 문법 자체를 거부하는 방식이라면, 벨기에 화가 마그리트(1898~1967)의 작품은 문법을 수용하나 내용은 모순적이다. 보편적인 논리와 의미를 해체하는 ‘카오스 미학’의 화가들이다. 에셔는 ‘테셀레이션(tessellation)’이란 형식의 작품을 남겼다.
일정한 형상이 평면에 여백 없이 겹치지 않게 채워져 가는 방식의 그림이다. 1941년 작품은 천사와 악마가 같은 공간에 배열한다. 첫눈에 천사를 바라보던 감상자가 다시금 그림을 바라보는 순간 배경에 악마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도 악마를 처음부터 본 사람은 곧 천사를 보게 될 것이지만 악마나 천사 만을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같은 사태를 두고 어떤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신념이나 가치판단이 갈라선다. 관점의 차이가 결국 자기합리화의 도구로 전락하면서 자기주장은 선동으로 변하고 다름을 인정할 수 없기에 혐오의 폭력이 수반된다.
에셔의 (1948)이란 작품이 있다. 오른손이 왼팔의 소매를 그리고 있고, 왼손은 오른팔의 소매를 동시에 그리고 있는 시각적인 모순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두 개의 손을 그리는 또 하나의 화가의 손이 있다. 자신이 행하는 일이 논리적인 모순이 있음에도 벗어나지 못한 채 꼬리를 물 듯 반복적으 로 행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림 안에 선 바라본다면 논리적 오류를 정확하게 인식하기는 불가능하다. 에셔는 ‘그들이 되기 전에는 절대 그 이상을 볼 수 없다’라고 말한다.
또 다른 에셔의 (1960) 작품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계단을 무한히 오르고 내려가기를 반복 하는 인간의 모순을 은유적으로 살필 수 있다. 마술사가 부리는 마법처럼 혼돈의 상황은 낯설다. 그는 ‘우리는 질서를 만들고 싶어서 혼돈을 사랑한다’라 는 말도 전한다. 혼돈의 시기에 질서를 회복해야 하는 절실한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다.
◇계몽령 시대의 마그리트
마그리트의 작품 중 (1929)라는 그림이 있다. 담배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지만 그것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회화 이전의 그림은 외부의 사물이나 사태를 지시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마그리트는 사실적으로 묘사한 사물을 그렸지만, 그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상징적인 이미지나 문자에 의해 의미가 좌절되는 형식이다. 보편의 가치를 지닌 이름은 소통의 언어일 뿐이지 개별적인 속성을 지시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림 속 파이프는 사물의 외 연일 뿐이지 실재는 아니라는 가치를 함축한다. 마그리트도 ‘오브제는 결코 그것의 이름이나 이미지와 같은 방식 으로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마그리트의 작품 중 <하울의 성>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피레네산맥의 성>(1959)은 육중한 바위 정상에 중세의 성이 솟아있고, 그 성을 받드는 거대한 바위는 해변 위로 구름처럼 떠 오른다. 꿈꾸는 사태가 현실에서 일어난 듯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계엄 선포도 깃털처럼 가벼운 사태라는 역설이다.
뉴스를 통해 정황상 장기적으로 준비되었을 것이란 증거가 수집된 상황에서 계엄이 입법독재 집단에 겁을 주기 위한 퍼포먼스였다는 말을 믿으란 건가. ‘이것은 계엄이지만 계엄이 아니다’라는 말이 의심스럽다. 소름이 끼치도록 오싹한 선언과 현실 사이엔 감돌았던 공포도 예술적인 퍼포먼스로 취급한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지만 자고 일어나니 꿈처럼 사라졌다는 계몽령이다. 마그리트의 작품이 떠오르는 유사한 상황이다.
권력이 자신의 방식으로 유지될 것이란 생각을 가졌던 몽상가들이 출현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에 개인적으로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계엄 이후 혼돈의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변 론 최후 진술도 마무리되었지만, 헌법 재판소의 판결은 더디다. 국민의 피로 감이 누적되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소모적이고 어정쩡한 상황이 연일 반복되고 있다. 판결이 이뤄지고 정치 권력이 파괴한 일상이 역주행이란 악몽에서 벗어나 속히 회복하길 바랄 뿐 이다.
폭력은 혼돈을 밀어내고 질서로 변화 하려는 상황에서도 발생한다. 지치고 힘들지만 성공했던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다름을 통한 창조적 삶을 위한 공동체의 가치를 보듬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