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만의 문제인가
‘기후위기 때문에 농산물 가격이 올랐다’는 말을 최근 몇 달 동안 자주 듣는다. 폭염과 냉해, 우박과 이상저온 등 기상이변은 분명 농산물 품질과 수확량을 흔들었고, 어떤 해에는 생산 기반 자체를 위협했다. 그러나 기후위기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질문이 남는다. 왜 어떤 해에는 농민이 울고, 또 어떤 해에는 소비자가 울어야 하는가? 그리고 왜 그 고통이 번갈아 반복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올 내내 가격이 출렁였던 사과 재배 농가를 찾았다. 충남 예산의 사과 농부들, 저장해 놓았던 사과를 안동도매시장으로 출하하는 농민들, 그리고 문경의 사과 농가를 차례로 방문했다.
현장에서 들은 이야기는 심란하기만 했다. 농민들은 단순한 ‘작황 부진’이나 ‘기후 충격’의 설명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이 공통으로 되묻는 지점은 따로 있었다. “기후가 힘든 건 맞다. 그런데 왜 매번 결과는 이렇게까지 달라지는가.” 같은 해에 수확된 사과가 어떤 시기에는 헐값이 되고, 어떤 때는 ‘금사과’가 되는 이유가 기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이었다.
◇ 사과는 시간을 이동한다
취재를 거듭할수록 분명해진 사실은, 결정적으로 사과 가격이 더 이상 ‘수확 시점’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사과는 수확과 동시에 모두 소비되는 과일이 아니라, 저장기술을 통해 시간 속으로 이동하는 농산물이다. 그리고 그 이동 과정에서 가격은 다시 만들어진다. 문제는 그 과정이 항상 가격 안정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저장은 분명 가격 폭락을 완화하는 기능을 한다. 수확기에 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질 때 발생하는 가격 급락을 흡수하고, 출하를 분산시키는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장이 누구의 손에, 어떤 기준으로 맡겨지는지에 따라 그 성격은 완전히 달라진다. 저장이 수급 조절이 아니라 ‘출하 지연’의 수단으로 작동하는 순간, 가격은 안정이 아니라 상승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현장에서 확인한 것은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장 인프라가 일부 주체에 집중되고, 그에 따라 재고 규모와 방출 계획에 대한 정보가 농민에게 충분히 공유되지 않고 있다. 공공 개입의 방출 기준이 불명확할 때, 기후로 인한 생산 감소는 가격 폭등으로 증폭될 수 있다. 그 결과 농민은 수확기에 제값을 받지 못하고, 소비자는 비수기에 가장 비싼 가격을 감당하게 된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시간차를 두고 이동한다.
◇ 저장시설의 편중과 사과 가격
우리나라 과일 가운데 사과는 저장기술과 가격의 상관관계가 특히 뚜렷하게 나타나는 품목으로 평가된다. 같은 해에 수확된 사과라도 출하시점이 달라지면 가격이 크게 벌어진다. 경우에 따라 두 배 이상 격차가 나기도 한다. 이러한 변동의 핵심 요인으로 저장기술뿐 아니라 저장 물량의 보유·운영 방식이 지목된다. 사과는 단순한 신선 과일이 아니라, 저장기술을 통해 ‘시간을 이동할 수 있는 농산물’이라는 점에서 가격 형성 메커니즘이 여타 과일과 본질적으로 달라진다.
사과는 9월에서 11월 사이 수확이 집중되는 대표적인 가을 과일이지만 소비는 연중 이루어진다. 이 시간적 불일치를 해소하는 수단이 저장기술이다. 일반 저온저장만으로도 일정 기간 보관이 가능하고, CA(Controlled Atmosphere, 공기조절) 저장, 1-MCP((1-메틸사이클로프로펜) 신선도 유지 처리 등 고도화된 기술을 적정 조건에서 적용하면 더 장기간 상품성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저장기술은 사과를 ‘언제 팔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동력이며, 이는 곧 가격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수확 직후 출하하느냐, 이듬해 봄·여름까지 저장 후 출하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과의 시장 가치는 달라진다.
최근 몇 년간 반복된 사과 가격 급등 국면을 보면 저장의 역할이 더 분명해진다. 특정 연도에 기상 악화로 생산량이 감소했다는 정보가 시장에 전달되면, 물량을 가진 주체들은 출하를 늦추고 저장을 선택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 결과 수확기 이후에도 유통 물량이 충분히 풀리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다. 당연히 이듬해 봄철 도매가격과 소비자 가격이 가파르게 오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물리적 공급 부족 자체뿐 아니라, 저장된 물량의 방출 속도와 시점이 가격 상승을 증폭시키는 변수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저장기술은 공급 충격을 완화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지만, 조건에 따라 가격 상승을 가속하는 지렛대로도 작동한다. 특히 대형 저장시설을 보유한 민간 유통업체나 산지 저장 주체가 물량을 집중 보유할 경우, 출하 지연을 통해 시장 공급을 더 크게 악화시킬 수 있다. 이때 “앞으로 사과가 부족해질 것”이라는 신호가 확산되면, 도매·소매 단계에서 가격 인상 기대가 커지고, 실제 수급 수준과 무관하게 가격 상승 압력이 강화되는 현상도 발생한다.
사과는 저장을 통해 ‘시간을 나누어 파는’ 유통 구조를 갖는 반면, 일례로 감귤 유통은 저장성이 제한되어 ‘한 시기에 팔아야 하는’ 구조에 가깝다. 이 차이로 인해 사과 시장에서는 저장 능력을 가진 주체가 가격 형성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감귤 시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생산량 자체가 가격을 결정하는 데 비중이 크다. 이 구조적 차이는 정책 설계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감귤은 생산 조절과 수확기 유통 분산이 핵심 과제라면, 사과는 저장 물량의 관리 기준과 정보 공개가 핵심 과제가 된다.
◇ 농산물 유통 구조 문제
사과값 문제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하나의 구조적 질문에 가닿는다. 지금의 유통 구조는 고품질 농산물이 제값을 받도록 설계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 구조 안에서 정부는 가격 안정을 위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유통경로의 경직화에서 비롯된다. 경매제 하나로 모든 물량과 품질 보전을 처리하려는 구조에서는 가격 안정과 제값받기를 동시에 달성하기 어렵다. 유통경로의 다양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있다.
유통경로 다양화란 경매제를 폐지하거나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다. 경매제는 여전히 대량·표준 품목을 처리하고 단기 가격을 발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제는 경매제 ‘일변도’다. 고품질·특화 품목, 계약 기반 공급이 가능한 물량, 안정적 수요처가 존재하는 농산물까지 모두 경매에 의존하는 구조에서는 가격 신호가 왜곡되고 농가의 선택지는 줄어든다.
계약재배, 사전 가격 합의, 산지–소비지 직거래, 공공급식 연계 공급 등 다양한 유통경로가 병행될 때 농가는 생산물의 특성에 맞는 경로를 선택할 수 있다. 이는 저장을 통한 출하 지연에만 의존하지 않고도 소득을 예측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 유통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렇다면 정부가 선제적으로 수급 관리를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이 지점에서 정책 입안자는 또 다른 딜레마에 직면한다. 정부가 생산 감소를 예상해 미리 수매하거나 저장 물량을 관리하면 단기 급등을 완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시장에서는 ‘정부가 가격을 방어한다’는 신호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 신호가 강해질수록 민간 저장 주체가 출하를 더 늦추는 방향으로 움직일 위험성도 커진다.
반대로 정부가 개입을 최소화하면 가격은 시장에 맡겨지지만, 급등·급락의 부담은 그대로 농민과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정부가 어디까지, 언제, 어떤 기준으로 개입할 것인지에 대한 원칙이 명확하지 않으면 선제적 수급 관리는 언제든 ‘가격 떠받치기’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이 딜레마는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단기적 가격 개입이 아니라 구조적 설계의 전환이다. 첫째, 유통경로를 다층화해야 한다. 경매제는 기본 축으로 유지하되, 고품질 농산물과 안정적 수요처가 있는 물량은 계약 기반 유통으로 분리해야 한다. 공공급식, 공공기관 구매, 대형 수요처와 연계한 사전 계약은 농가의 저장 의존도를 낮추고, 가격 급등의 원인을 줄인다.
둘째, 공공의 역할을 ‘가격 개입자’에서 ‘규칙 설계자’로 전환해야 한다. 정부가 직접 가격 형성에 개입하는 대신 저장 물량의 정보 공개 기준, 방출 조건, 개입 시점을 명확히 제도화해야 한다. 언제 개입하고 언제 빠지는지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시장의 과도한 기대와 불안은 줄어든다.
셋째, 고품질 농산물은 가격 형성 메커니즘을 분리해야 한다. 모든 사과를 같은 시장, 같은 방식으로 가격을 매기려는 구조에서는 품질 특성에서 오는 이점이 사라진다. 등급별·용도별 유통 채널을 분리하고, 품질 정보가 가격에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이는 농가의 품질 향상 노력과 투자를 유도하고, 무리한 저장 전략을 줄이는 효과를 낸다.
기후위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생산 변동성은 커질 것이고, 저장기술은 더욱 고도화될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지금과 같은 유통 구조를 유지한다면, 사과값을 둘러싼 논란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다. 어떤 유통 구조를 선택할 것인지, 그리고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다.
완벽한 해법은 없다. 그러나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같은 질문은 매년 되풀이될 것이다. 이제 가격이 오른 뒤에 결과를 해명하는 데서 벗어나, 가격이 만들어지는 경로 자체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를 묻고 답해야 할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