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이코노미뉴스 = 윤영무 본부장】 인류의 3대 발명품 중 하나로 꼽는 네비(navigator)의 정확한 안내를 듣다 보면 인류가 인공위성을 띄워 이런 장비까지 만들어내니,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목적지를 쉽게 찾아주는 걸 보고 세상 참 편리해졌다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오로지 출발과 도착이란 이동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차창 밖 경치를 보면서 복잡했던 머릿속을 정리하고 아이디어도 떠올리던 시절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쉽다. 그렇다면 네비가 없던 시절, 늘 다니던 길을 벗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네비처럼 지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지도를 읽을 줄 알았던 그 시절로 돌아가 보자.
한강 경치를 보려면 올림픽대로보다 강변북로
수십 년 전, 서울 강서구 H동 고관의 집에 살면서 집안 정원 가꾸기와 청소 등 허드렛일을 해주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 젊은이의 일과 중에 가장 큰 임무는 요즘 거의 사라진 개인 주택의 연탄보일러의 물을 덥히는 여러 장의 연탄을 시간 맞춰 갈아 주고, 집안의 잔심부름 하는 것이었다. 그 집에는 여러 손님이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중 한 분은 거의 매일 전용 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들러 집주인을 보고, 자기 집이 있는 천호동으로 퇴근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손님이 집 안으로 들어가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손님의 기사와 함께 자기 방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기사로부터 ‘어르신을 모시고 천호동 집으로 갈 때는 늘 강변로(지금의 올림픽 대로)를 이용한다’는 거였다.
<1970년대 강변도로는 강남, 강북과 관계없이 준공 순으로 ' 강변1로~강변9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구간별로 구분해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강변도로, 강변대로, 강변북로, 강북 강변로, 강변 도시고속도로 등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1997년 10월 14일,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강변북로로 명칭을 결정했다. 따라서 필자는 당시의 길 이름을 편의상 지금의 도로명으로 부르겠음〉 그는 문득 천호동으로 가는 길이 올림픽대로 말고도 강변북로도 있는데 왜 하필 이 손님은 올림픽대로로만 다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기사에게 물었다.
“올림픽대로로만 다니면, 어르신이 뒷좌석 오른쪽에 앉아 계셔서 차창으로 한강의 풍경을 보실 수 없는 것 아닌가요? 꼭 그 길 로 다니시는 이유가 있나요?”
기사가 그의 질문에 생뚱맞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풍경? 뭔 풍경. 그런 풍경을 볼 여유가 어딨어. 집에 빨리 모시고 가야기 때문이지.”
기사가 잘라 말하자, 그는 더 묻지 못하고, 혼자서 생각했다.
‘으음~ 나 같으면 차창 밖으로 한강이 보이는 강변북로로 가겠어. 그 길이 경치가 훨씬 낫잖아.’
그러던 어느 날인가, 늘 기사와 함께 오던 그 손님이 운전기사 없이 혼자서 들어왔다. 그가 인사를 하면서 “가실 때 어떻게 가시려고 하시는지...택시를 불러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손님은 “이따 나올 때 보자...”는 말만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장군성판(將軍星版)을 정성껏 닦다가
주인 눈에 뜨인 세차장 임시직원
그가 이 집에서 일하기 전에는 인근 자동차 정비업소에서 임시 세차원으로 일했다. 유달리 자동차를 사랑하고 좋아했던 그는 자기 세차장에 들어온 차를 모두 자기 차인양 정성스럽게 닦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장군성판(將軍星版)을 단 차가 들어와 세차하던 중 자기 침을 묻혀 가며 성판(星版)을 번쩍 번쩍 빛나게 닦고 또 닦았다. 그걸 보던 지금의 집 주인이 주차장 주인의 양해를 얻어 그를 스카우트했다.
그는 세차장에서 일하는 동안 운전면허를 따고 세차장에 들어온 거의 모든 차량을 직접 운전해 보았다. 덕분에 운전 실력이 있었던 그는 이 집에 있는 국산 포니 차를 마치 자기 차 처럼 서울 시내를 몰고 다니며 집안 선물 심부름 등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명절이 되면 포니를 직접 몰고 고향으로 가기도 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가 서울 가더니 출세했다면서 그가 몰고 온 차를 구경하러 몰려나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아직 도로가 미비한 시절이라 시골 논두렁길에 차가 빠져 경운기로 끌어내야 했을 때는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하튼 그는 마이 카 시대가 막 시작되던 시절, 운전 솜씨만큼은 집주인이 감탄 할 정도로 베테랑이었다. 차의 종류에 상관 없이 어떤 차든 그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때 집주인이 손님과 함께 현 관에 서서 그를 불러 말했다.
“이봐, C군, 오늘은 이 분이 차를 안 가지고 오셨으니 자네가 내 차로 모셔다 드리고 오지,”
그렇지 않아도 주인의 차를 몰아보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 싶었던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집주인이 시원스런 대답을 듣고 나서 옆에 서 있는 손님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이 친구, 운전 하나는 똑소리 나요. 시내 길도 잘 아니까 안심해도 됩니다” 라고 하더니 그에게 확인했다.
“자네, 내 차를 운전해 본 적이 있지?”
“그럼요” 그는 이 집의 포니만 몰았지 주인 차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같은 종류의 차를 몰아봤기 때문에 운전에 자신이 있다며 대답했다.
차고로 들어가 주인 차를 몰고 나온 그는 그 손님을 뒷좌석 오른쪽에 태우고 집을 빠져 나와 고개를 돌려 그 손님에게 인사를 하고 물었다.
“어르신, 천호동 댁까지 가는 길이 두 가지 코스가 있습니다. 늘 다니시던 올림픽대로가 있고요, 강 건너 강변북로가 있거든요. 오늘은 제가 강변북로 쪽으로 해서 모시겠습니다.”
강변북로를 통해 본 한강의 경치와 애틋한 첫사랑
“그래? 강변북로로 가면 달라지는 게 있나?”라고 그 손님이 물었다.
“네, 강변북로로 가면 지금 앉으신 자리에서 한강 경치를 한 눈에 보실 수 있거든요. 그런데 올림픽 대로로 가면 한강이 보이지 않거든요.”
“그런가? 그럼, 오늘은 강변북로로 가볼까?”
그 손님의 허락을 얻은 그는 강변북로를 타기 위해 양화대교 (당시 이름은 제2 한강교)를 건너고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옆을 지날 때 말을 꺼냈다.
“어르신, 오른쪽 창 밖으로 한강이 보이시죠?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도요. 저 다리가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다리라고 하네요. 어르신은 한강 물을 보면서 다리를 건너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의 질문에 말없이 차창 밖 풍경을 멍하니 보고 있던 그 손님이 무슨 생각을 하다가 정신이 들었는지 목을 가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서울에서 살면서 한강 경치를 못 봤네, 한강 물을 보면서 다리를 건너 본 적도 없고... 참 네, 뭐하면서 살았는지, 그런데 강변북로에서 한강을 바라보니 정말 멋지구먼. 경치가 참 좋아.”
“집에 가실 때 늘 올림픽대로로 다니시니까, 왼쪽에 있는 한강이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요. 그런데 한강이 보인다고 해도 강변북로 보다 못해요. 그래서 오늘 제가 어르신께 한강 경치를 보여드리려고 일부러 이 길로 모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혹시 어르신, 강변 풍경을 보면서 첫사랑의 추억도 떠올려 보시고요. 보고 싶은 분의 얼굴도 머릿속으로 그려보세요.”
“자네 제법이네, 내 첫사랑이라... 보고 싶은 사람? 그래, 좋지. 왜 없겠나. 한강 경치를 보니 정말 잊혔던 옛 일이 생각나네. 그러고 보니 자네가 재간꾼이야. 집주인과는 어떤 사이인가?”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자동차 정비업소에서 세차 일을 할 때 저를 잘 보신 집 주인어른이 저보고 우리 집에 와서 일을 하라 해서...”
“그렇구먼, 그런데 자네는 운전을 어디서 배웠나? 운전 솜씨가 보통이 아니네.”
“세차장에서 일할 때 많은 차를 몰아 봤고, 집에 있는 포니를 제가 끌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하는군. 나는 지금 4년째 강변도로를 다니고 있지만, 오늘처럼 한강 경치를 보기는 처음이야. 그런데 자네는 한강 다리가 왜 생겼는지 알고 있는가?”
“잘 모르겠는데요. 어르신”
최초의 한강 다리는 122년 전인 1900년에 개통한
한강철교, 한강대교는 1917년
그러자 그 손님은 한강에 최초로 놓인 다리는 1900년에 놓은 한강철교이고, 한강대교는 일제강점기 때인 1917년에 개통되었다고 설명했다. 한강대교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3일 뒤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북한의 남하를 막고자 한강철교와 함께 아무런 예고도 없이 폭파하는 바람에 당시 다리를 건너던 수백 명의 피난민이 그 자리에서 폭사했다 고도 하였다.
“어르신은 건설 일을 하시나요? 다리에 대해 많이 아시네요” 하고 그가 물었다.
“하하하, 그렇지. 건설 관련 일을 하지” 하면서 노들섬을 응시 하던 그 손님은 노들섬에 대해서 설명했다.
“건설 일을 하면서도 한강 다리를 건너보지 못했어. 그래도 역사는 좀 알고 있지. 저기 노들 섬은 원래 섬이 아니었거든. 용산 쪽에 붙어 있는 넓은 모래밭이었어. 아마 여의도보다 더 넓었을걸.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한강대교를 놓으면서 모래 언덕에 석축을 쌓아 중지도라는 인공 섬이 된 거야” 라면서 한강 경치에 취해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더니 ‘뒷일은 자기가 책임지겠다’ 며 강변을 따라 팔당까지 가자고 했다.
“이왕에 나왔으니, 한강 구경을 실컷 해보자고. 자네가 아니었으면 이런 한강 경치를 평생 못봤을 뻔 했어. 내가 직원들에게는 늘 다니던 길을 벗어나 보라고 해 놓고, 정녕 나는 그러지 못했네. 오늘 늘 다니던 길을 벗어나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있어. 숲속에 몸을 던지면, 전에 못 본 무언가를 발견할 것이라더니, 정말 맞는 말일세.”
“오늘 찾으신 게 있으신 모양입니다. 어르신.”
그렇고 말고, 오늘 이렇게 나를 데려와 줘서 정말 고맙네. 골치 아픈 게 하나 있었는데 강변의 풍경을 보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네.”
자전거로 익힌 서울 지리 정보, 늘 다니던 길을 벗어나게 하지만 늘 다니던 길을 벗어 나려면 용기와 정보, 그리고 나만의 새로운 지도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네비에 의존하면 기존의 길을 벗어 나기가 한결 쉽고 편리하지만 네비 없이는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절름발이 신세가 된다.
인간은 불가능에 도전함으로써 가능한 것을 성취해 온 것이지,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만을 조심스럽게 행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남들이 늘 다니던 길을 벗어나 새로운 길로 갈 수 있었던 이유도 그랬다. 16세기 항해 시대의 탐험가가 출항하기 몇 해 전부터 미지의 세계에 관한 지리 정보를 수집했듯이 그는 서울의 지리를 몸소 익혔다. 시골에서 상경해 보니 택시 운전하는 친구의 하루 돈벌이가 보통 사람의 한 달 봉급하고 맞먹었다. 그러나 서울 지리를 알지 못하고는 택시 운전이고 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뒤 서울 지리부터 익히기로 마음 먹었던 거였다.
우선 자전거를 산 그는 친척 집, 친구 집을 찾아갈 때 자전거로만 갔고, 일이 없을 때는 자전거로 서울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거의 모든 골목의 특징과 상황을 샅샅이 익혔다. 또한, 서울 시내버스 전 노선을 종점에서 종점까지 타고 다니며 서울의 큰길과 작은 길을 파악해 두었다. 다만 버스나 자동차는 주마간산 격이어서 생각처럼 지리를 아는데 유용하지 못해서 지리를 익히는데 자전거가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이렇게 해서 3~4년 만에 서울의 윤곽이 한눈에 들어왔고, 그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입력됨으로써, 네비가 없던 시절, 남들이 늘 다니는 길을 벗어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나만의 지도를 위해 일상의 길에서 벗어난 탐험가들
그렇다면 네비없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지 않았던 길로 퇴근해 보면 어떨까? 일주일에 한 번씩 그렇게 하면 1년이면 50 여 개의 나만의 새로운 코스가 만들어질 수 있다. 앞 유리창에 비치는 그 지역의 독특한 분위기와 간판들, 그 지역의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와 옷차림.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의 종류 등등 가는 길마다 서로 다른 무엇인가를 발견 하게 될 것이고, 때로는 생각지 않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많은 창업 기업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런 식으로 여행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는다. 네비를 통해서도 다양한 인문지리학적 지역 정보를 알 수 있겠지만 그건 대부분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간접적인 지식이다. 그러니 내가 직접 눈으로 현장에서 확인하고 피부로 체험한 생생한 창의적인 정보와는 비교가 될 수 없다. 이를테면, 그 지역 경제 상황을 네비를 통해 알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 가서 그곳 건물이나 유리창에 붙은 임대 현수막이나 안내문 숫자를 보면, 지역의 경제 상황을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임대 현수막을 써 붙인 것은 입주자를 급히 구한다는 뜻이고, 공실이 많다는 뜻이니,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는 지역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네비에는 유명 건물이나 식당 이름이 나오지만 그것만을 가지고 부족하다. 우리가 찾는 식당이 싸고 맛있는 집이라면, 네비에 나오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그런 식당은 내가 직접 들어가서 먹어보지 않고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싸고 맛 있는 집은 아마 시장 상인들에게 물어보는 편이 가장 빠를 것이다.
거리를 지나다가 “아, 저 간판 예쁘다!”라는 소리가 내 입에서 나오면 차를 세우고 바로 들어가 보시라. 집이 주인을 닮는 것처럼 간판은 주인을 닮아서, 어떤 간판이 마음에 든다면 간판 주인은 분명히 나보다 생각이 앞서 있는 사람일 것이다. “지나가다 보니 간판이 아름다워서 주인이 어떤 분인가 궁금해서 들어왔습니다” 라고 하면서 인사를 하면, 문전박대할 주인은 절대로 없다. 나보다 나은 사람을 사귀어 둬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그곳 음식을 먹어 보거나 물건을 사줘 보시라. 이렇게 늘 다니던 길에서 벗어나서 얻은 지역 정보는 나라 전체로, 세계로 확장되고 끝없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진다. 호모에렉투스의 이주에서부터 우주탐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모험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늘 다니던 길을 벗어나 보자. 뭔가 다른 게 보일 것이다.
MeCONOMY magazine June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