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정부 처음으로 흙이 살아야 지구가 산다는 흙 살리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전남 구례군은 지난날 28일 본지의 윤영무 보도본부장을 초청해「유기농업의 원조는 한반도」라는 강연회를 구례군민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었다. 본지에 「흙의 반란이 시작됐다」는 글을 연재해 오고 있는 윤 본부장의 강연내용을 네 번째 시리즈로 싣는다.(편집자 주)
지구의 탄소 불균형이 기후위기의 원인
이산화탄소, 메테인(methane, 독일어 ‘메탄’의 영어 발음), 오존과 이산화질소 등으로 구성된 온실 가스는 지난 수백년 동안 흙과 물에서 자연적인 과정을 거치며 대기로 내뿜어졌다가 다시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 원천지로 돌아오는 순환을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방출과 흡수가 균형을 유지할 정도의 온실 가스가 원천지로 돌아가는 한, 온실가스로 인한 기후변화 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대기 중에는 일정한 수준의 온실 가스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태양 복사열이 우주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서 지구의 온도를 높일 수 있고, 그로인해 지구는 비가 오고 눈이 오는 날씨를 만들어낼 힘을 얻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지구는 1년 내내 얼어붙어 사람이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대기 중 가스가 얼마나 있느냐를 표시하는 데는 ppm이라는 단위를 사용합니다. ppm이란 백만분의 1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물체나 물을 1이라고 했을 때, 이 속에 백만분의 1만큼의 오염물질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기후위기 이전에는 질소, 산소, 아르곤 등 대기의 주요 성분의 총량은 99만9천 ppm, 이산화탄소는 280ppm이하 (0.03%이하)로 유지됐습니다.
하지만 만 3천~4천 년 전 농경이 시작됐을 때 인류는 벌채, 개간, 그리고 흙을 갈아엎으면서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발생시켰습니다.
실제로 이산화탄소와 메탄이 급격하게 상승했던 때가 수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농경 산업이 시작되고부터였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은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200여 년 전부터 화석연료 사용과 급격한 산업화와 농업의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되자 온실가스 배출량은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원천지로 되돌아가는 온실가스의 양보다 새로 발생하는 가스의 양이 많아지며 대기중에 이산화탄소가 400ppm 수준을 넘어서게 됐습니다.
과학자들은 기후위기로 인한 6차 인류대멸종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의 400ppm을 350ppm으로 낮춰야 한다고 말합니다. 산업화 이전 수준인 280ppm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많았지만 난상 토론 끝에 350ppm으로 결정됐습니다.
농업전문가가 빠진 IPCC 총회
이산화탄소는 대부분 산소로 이루어져 있고 4분의 1만이 탄소입니다. 정확히 27.3%입니다. 그래서 이산화탄소 1ppm속에는 2.125Gt(기가 톤)의 탄소가 들어있습니다.
기가 톤이라 하니 머리가 띵 하시지요. 뭐 어려운 건 아닙니다. 1기가 톤은 10억 톤이니까 이산화탄소 1ppm속에는 약 21억 톤이 넘는 탄소가 들어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감이 오지 않지요? 21억 톤은 대략 고체 흑연 1㎦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해하기 쉽게 높이 1km, 가로 1km, 세로 1km의 거대한 콘크리트 빌딩을 떠올려 봅시다. 떠올랐나요? 제가 묻겠습니다.
이산화탄소 1ppm가 운데 탄소의 무게는 얼마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아까 제가 이산화탄소 400ppm을 350ppm으로 줄여야 한다고 했지요?
그럼 얼마를 줄여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50ppm을 뚝 떼어다가, 그러니까 높이 50km, 가로 50km, 세로 50km의 거대한 빌딩과 맞먹는 탄소를 포집해 어딘가에 저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최근 스위스에서 열린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제 58차 총회에는 세계 195개국에서 650명의 대표단이 참여했습니다. 대단한 규모지요?
우리나라에서는 IPCC 주 관 부처인 기상청 외에 외교부, 환경부, 국립기상과학원, 한국 환경연구원, 국가녹색기술연구소, 에너지 경제연구원, 국립수산과학원, 극지연구소, 한국 환경공단, APEC 기후센터 등이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농업 관련기관이나 관계자는 없었습니다. 저는 한숨이 나왔습니다. 왜냐고요?
UN이 있다고 국제간 전쟁을 막을 수 없듯이 전문가들이 모여 탄소배출 대책을 논의한다고 해서 기온상승 문제가 해결될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농업의 도움이 필요한 일입니다. 왜 그런지 설명하겠습니다.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내일 당장 지구의 모든 온실가스 배출을 중단시켰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 탄소중립이 이뤄진 것인가요?
유감이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직 대기 중에 그동안 우리가 배출한 400ppm이상의 이산화탄소가 남아있기 때문이죠. 언뜻 이해가 안 되신다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잉여탄소 50ppm에 지구의 운명이 달렸다
밤톨만한 혹이 몸에 솟았고 이 혹은 점점 주먹크기로 커졌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제거수술을 했는데 원래의 밤톨만한 혹을 남겨두고 주먹만큼만 도려내고 냈다면 혹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아니지요. 탄소중립도 그런 이치입니다. 지금 남아있는 탄소를 제거하고 나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400ppm을 350ppm으로 만들기 위해 당장 50ppm의 잉여탄소를 저장할 어딘가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곳이 어딜까요?
지구의 70%를 차지하는 물-바다는 어떨까요? 사실 바다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38조 톤의 어마어마한 탄소를 저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바다의 상황은 심각합니다. ph농도가 계속 떨어져 해초와 플랑크톤을 포함해 해양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잉여탄소 저장을 운운할 입장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흙은 어떨까요? 흙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왜냐하면 흙은 탄소가 발생한 원천지이면서 탄소를 필요로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농지개간과 경작(耕作)으로 전 세계 토양에서 136기가톤(Gt)의 탄소가 배출됐다고 합니다. 감이 잘 오지 않지만 그렇다고 칩시다.
중요한 것은 그 수치가 아니라, 토양이 함유할 수 있는 탄소의 양입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의 흙 표면 30cm안에 대략 700Gt(기가톤)의 탄소가 저장되어 있고, 흙 표면을 90cm 이상으 로 잡으면 1500Gt(기가 톤)이 저장돼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잠깐 숨을 돌리겠습니다. 중요하니까요.
자, 이제 말씀드리지요. 토양, 그러니까 흙이 어마어마한 탄소 보유능력을 가졌다면 그동안 배출한 탄소도 얼마든지 다시 포집해 저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리해야 할 대기 중의 잉여탄소 50ppm 정도는 얼마든지 저장하고도 남는다는 말입니다.
비료와 농약의 관행농업에서 자연 순환적 유기농업으로 바꿔야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 로 50ppm의 잉여탄소를 흙 속에 저장할 수 있을까요? 다행히 그 방식은 많은 비용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 방식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의 협조가 있으면 가능한 일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 앞에 선 것도 바로 농부가, 아니 농업이 세상을 바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해 보면, ▲살충제, 인공적인 비료와 질이 떨어지는 퇴비, 무거운 농기계가 토양을 훼손해 많은 온실가스를 방출시키며 ▲집약적인 농사를 계속하다 보면 부식(腐植, 유기물이 상당기간 분해된 것), 점토(粘土)의 구조물을 무너뜨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유기물을 노출시켜 토양 미생물이 먹고 나서 생기는 이산화탄소 가스 배출을 증가시킨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지금과 같은 관행농업은 땅 심을 떨어뜨려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 나가듯이 흙속에 있어야 할 탄소를 대기로 방출시킨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관행 농업과 토지난개발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량은 전체의 31%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말입니다.
그래서 배출량을 줄이고 제가 앞서 말씀드린 50ppm의 이산화탄소를 포집해 흙에 저장하려면 화학비료 이전의 전통적 유기농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건강한 토양일수록 이산화탄소 저장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제가 뭐라고 했지요? 네. 그렇습니다. 흙이 살아야 지구가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관행농법 이전에 우리 조상들은 흙의 영양을 고갈시키지 않고 어떻게 반만년 동안 기름진 땅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었을까요?
이산화탄소를 흙에 저장하려면 그런 우리 조상들의 농법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유기농업의 원조는 한반도
그럼 120년 전 1900년대 초로 돌아가 보십시다. 한 뼘은 됨직한 긴 인중(人中) 위로 무성하게 자란 콧수염과 가슴까지 내려오는 턱수염을 가진 미국의 토양과학자 프랭클린 히람 킹(18 4 8~1911)이란 분입니다.
그는 시골 농장에서 태어나서 위스콘신 화이트워터 주립 사범학교를 다녔고, 1888년에서 1902년까지 14년간 위스콘신-메이슨 대학에서 농업물리학 교수를 역임하고, 1902년~1904년까지 미 농무부 토양국 토양관리부로 자리를 옮겨 일하며 토양물리학의 아버지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당시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화학비료 농업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토양의 미생물 생태계를 교란하고, 흙을 황폐화시켜 지속적인 농업을 불가능하게 한다면서 자신의 상관인 Milton Whitnesy 농무부 토양 국장에 맞선것이지요.
사실 그가 태어난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은 의술이 발달하고 위생상태가 좋아져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으나, 농작물 수확량이 인구증가율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화학자들은 수확량을 늘릴 수 있는 화학비료를 개발해 널리 보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해고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주장에 동조하는 농가를 쉽게 찾을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나이 61살 때 그러니까 1909년 동양 3국, 즉 한 국, 중 국, 일본으 로 가서 비료 농업의 부당성을 입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 교통수단이라야 선박과 기차뿐이었고, 농촌지역은 걸어서 다녀야 했는데 그는 모험에 가까운 답사여행을 위해 그해 시애틀 항을 출발했습니다.
그는 9개월간 세 나라의 많은 농부들을 만나 대화를 나눴고, 농사짓는 방식을 기록하면서, “동양 세 나라 농부들은 이 자연에서 얻은 모든 것을 소중히 쓰고 다시 땅으로 돌려보내는 자연 순환농법으로 5억 명에 가까운 인구를 먹여 살리고 있다”며 감탄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똥오줌(인분과 가축 분)농사를 짓는 조선 농부에 그는 가장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흙에서 나온 것을 다시 흙으로 되돌려 주는 조선 농부들의 순환 농법에 주 목했던 것입니다.
“똥오줌을 재활용하고 있지만 파리떼를 거의 본 적이 없다”고 한 그는 “똥에는 천연 질소와 칼륨, 인이 풍부하게 담긴 소중한 것인데, 미국과 유럽은 ‘위생’을 운운하며 자연에 내다버리는 것을 능사로 여긴다”며 조선을 본받지 못하는 조국을 한탄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의 농부가 4천 년간 대대손손 기름진 농토를 유지하는 비결이 거기에 있다고 봤습니다.
그런 답사여행을 쓴 것이『Farmers of Forty Centuries, or Permanent Agriculture in China, Korea, and Japan-4천년 동안의 농부들, 또는, 중국, 조선, 그리고 일본에서의 지속가능한 농업』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그가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 3년 뒤인 1911년 사망하자 그의 아내인 Carrie Baker King 여사가 완성했고, 이듬해 책으로 출간 했습니다.
조선 최고의 농업정치가, 풍석 서유구를 아시나요?
유기농업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Northbourne경(卿)은 이 책을 보고, 농업이나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유기농업의 ‘고전’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조선의 농법을 유기농업의 원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히람 킹 박사였지만 우리나라에 다산 정약용과 비견(比肩)되는 농업의 이론과 실무를 갖춘 조선의 최고 농정가(農政家)이자 저술가인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년~1845년)란 출중한 인물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던 것 같습니다.
혹시 그 분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아마 모르는 분이 많으실 겁니다.
그의 영정(影幀)은 경기도 남양주 다산 정약용 생가 옆에 있는 실학박물관 2층 구석 진열장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가서 본 적이 있습니다.
얼굴이 길쭉하고 콧잔등과 미간, 그리고 이마에 마마자국 같은 점이 보이고, 전체적인 인상은 제가 느끼기에 깐깐해 보였습니다.
그는 1806년, 작은아버지 서형수가 김달순 옥사에 연루돼 유배를 가게 되자 자진해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경기도 파주 장단으로 내려와 아들과 함께 10여년 간 농사를 짓고 임진강에서 물고기를 잡으면서『임원경제지』라는 거대한 책을 썼습니다.
아들은 저술의 피로가 원인이 돼 도중에 죽었습니다. 당시 아들을 잃은 그는 저술원고를 집어 던지면서 자기가 아들을 죽게 했다며 몸부림 쳤습니다.
그러던 중 1823년 작은아버지 서형수가 사망하고 죄인의 명단에서 제명되자 다시 복직해 전라관찰사 등 관직을 그만둘 때까지 백성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기록함으로써 모든 관료들의 모범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가 저술한 『임원경제지』에 ‘제대로 된 똥오줌 퇴비에선 향긋한 흙냄새’가 나는 조선의 자연퇴비제조법을 상세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증분법(蒸糞法)도 그 중 하나입니다. 증분법은 ‘띠 풀로 뒷간을 만들어 처마는 낮게 해 바람과 비를 막고 여기에 불을 때고 얻은 재, 키로 까불러서 얻은 껍질과 쭉정이, 볏짚이나 낙엽 등을 안에 넣고 띠풀 집을 얽어매고 덮개를 덮어서 똥의 기운으로 발효시키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파리가 끓지 않는 것은 퇴비가 발효되는 동안 높은 온도(60~70도)에 의해 벌레가 사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악취를 시골의 냄새라고 하면서 웃어넘기지만 그것은 미숙 퇴비를 썼기 때문입니다. 베테랑 농부라면 그런 퇴비를 만들지도 않고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랬다간 오히려 흙을 죽이니까요.
미국 동양농업탐험대가 수집한 조선의 콩 종자
이번에는 미국으 로 건너가 보겠습니다. 1920년~1930년대 미국은 세계 최고의 농업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농업은 히람 킹 박사가 예언한대로 화학비료의 심각한 부작용을 앓고 있었습니다.
비료로 인해 작물의 자생력이 떨어져 병충해의 공격에 무방비였고, 농약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됐던 것입니다.
미국 농무부는 1929년 2월, 중국과 만주에서 식물탐험을 마치고 돌아온 팔레몬 도르세(Palemon H. Dorsett, 1862~1943)에게 농무부 사료 작물과에 근무하는 모르세(William Joseph (Bill) Morse, 1884~1959)와 함께 비료와 농약 없이 자라는 동양의 콩 종자를 수집하도록 동양농업탐험대(Oriental Agriculture Exploration Expedition)를 꾸리도록 했습니다.
탐험대장격인 도르세는 1891년 29살의 나이로 미 농무부 식물 병리과 직원으로 들어와 30년 넘게 잔뼈가 굵은 농업 생산과 식물병리에 관한 전문가이자 관료였습니다.
그는 당시 60대였는데도 불구하고 만주를 두 번이나 답사했으며, 브라질, 파나마 등 북 남미 지역 해외 식물 탐험 원정을 했습니다.
그의 끊임없는 해외원정은 아마도 개인적인 불행을 잊어보기 위한 측면도 있었을 겁니다.
35살 때인 1907년 부인과 장녀를 잃었고 2년 뒤에 작은딸마저 떠나보내야 했으며 그가 2차 만주 식물 탐험을 끝내고 귀국한 1927년에는 1차 원정에 동행했던 외아들마저 세상을 떠나보내야 했으니까요.
누군들 그런 상황이 되면 어디론가 떠나지 않고서는 미쳐버리지 않을까요?
그는 1929년 2월 18일, 혼자 몸이 된 자신의 며느리 Ruth B Dorsett와 모르세의 부인 에드나(Edna), 그리고 그들 부부의 딸인 마가렛(Magaret)을 대원으로 삼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났습니다.
하와이 호놀룰루를 경유해 그들은 1929년 3월 19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습니다.
도쿄로 이동한 그들은 그곳에 원정대 본부를 차리고 4월 초부터 10월 중순까지 일본의 혼슈와 홋카이도에서부터 콩 종자 수집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조선으로는 10월 21일에 왔습니다.
그들은 당시 조선에서 저명한 러시아의 식물학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Niklai Ivanovich)를 만나 함께 수원농림시험장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수백 종의 콩 종자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원정 도중 도르세가 지병인 폐렴을 치료받기 위해 베이징으로 가자 혼자 남게 된 모르세는 1930년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간 만주와 한국을 다니면서 콩 산업을 조사했고, 특히 이 기간에 조선에서만 수천 종의 콩 종자를 수집했습니다.
그가 일본, 한국, 만주 등지에서 보낸 기간은 총 2년여. 조선에서 보낸 기간은 겨우 2달이 채 안 되는데도 조선에서 그렇게 많은 콩 종자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를 가도 장이 열렸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모르세는 그때 콩 전문가이자 종자 수집가인 독일의 Lene Muller를 만났으며, 콩 연구로 유명한 중국 하얼빈의 자연사 박물관 소속의 B.W. Skvortzow도 알게 됐습니다.
그들 원정대가 수집한 콩은 총 4471점, 이 중 조선의 콩 종자가 3379점(76%) 일본이 579점(13%), 만주 513점(11%)이었습니다.
콩의 종주국 조선, 병충해에 강한 종자가 많아 그는 조선에서 모은 자료와 사진만으로도 훌륭한 책을 쓸 수 있을 정도라고 놀라워했습니다.
이들은 대략 9천 종의 신규 식물자료를 발굴했는데 이를 워싱턴 DC의 미국 농무부, 식물 산업국(Bureau of Plant Industry)으로 보냈으며 이들이 보낸 자료는 외국식물도입부(Division of Foreign Plant Introduction)가 발간한 재고 자산 목록에 기재돼 있습니다.
탐험대가 식물 표본으로 압착해 보낸 종자(鍾子)도 당시의 상태 그대로 국립 식물표본실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곤충, 국내 출판물, 콩 제품, 대나무 제품들, 동영상 필름, 그리고 모으거나 찍은 3천여 장의 사진도 가지고 왔는데 아쉽게도 사진의 절반 이상은 어디서 모았는지, 어디서 찍었는지가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원정대가 수집한 콩은 미국의 줄기세포로 분류되어, 현재 국립 식물 생식세포 시스템(National Plant Germplasm System)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정대가 수집한 우리나라 콩은 수많은 식물 병해충에 저항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콩의 특성을 이용해 다른 식물과 교배하여 비료와 농약이 필요 없는 미래작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게 제 생각입니다.
모르세는 그 덕분에 미국 대두 협회 회장을 3번이나 역임했고, 미국에서 ‘콩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활동을 통해서, 우리나라가 콩의 종주국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하여튼 비료 농업으로 세계 최고의 농업생산성을 구가 했던 미국이었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나 봅니다.
1936년 미국 의회는 더 이상 흙을 망가뜨리는 농사를 지어서는 안 된다면서 ‘토양보전과 국내할당법(Soil Conservation and Domestic Allotment Act)’을 제정하기에 이르렀으니까요.
특히 같은 해 미 상원은 과도한 비료의 사용으로 미국농토에서 재배되는 농산물에 미네랄이 함유돼 있지 않고, 이로 인해 미국인의 99%가 미네랄 부족으로 각종 질병에 노출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미네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110가지의 원소 중 인체의 96.5%를 차지하 는 산소(65%), 탄소(18%), 수소(10%), 질소(3.5%)를 제외한 나머지 3.5%(칼슘1.5%, 인1%, 기타1%)의 모든 원소’를 말합니다. 주로 우리 몸의 뼈·치아 구성, 혈액 속 산소 운반, 소화·삼투압 조절 등 몸속에서 다양한 일에 관여하는데 체내에서 합성이 안 돼 식물로부터 섭취해야 합니다.
제가 지금 뭐라고 했지요? 반드시 살아있는 식물로부터 미네랄을 섭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연이 그러하니 조제된 건강보조식품을 드실 때는 신중하게 판단하시라는 겁니다. 아무리 먹어도 몸에서 흡수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1954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라이너스 폴링(Linus Carl Pauling, 1901~1994년)은 모든 질병이 한두 가지 미네랄 결핍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테면, 칼슘은 수축기 혈압을 낮추고, 마그네슘은 고혈압 치료에 역할을 하며, 칼륨은 혈압에 영향을 주는 등 미네랄이 부족하면 수백 가지의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현대 의학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범벅이 된 흙에는 미네랄이 고갈됐다고 하니, 그런 흙에서 자란 식물은 아무리 먹어도 소용이 없겠네요.
미국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지속가능한 경영은 우리나라 농부의 아이디어
최근 30억 달러(약 4조2000억 원) 규모의 회사 지분 전액을 비영리재단과 환경단체에 기부한 친환경 기업 미국의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를 아시는지요?
이 브랜드 창업자인 이본 쉬나드(Yvon Chouinard, 1938년~)는 등반가이자 환경운 동가로도 유명하지요. 그는 1973년 친환경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를 창업한 후 2021년 기준 매출 15억 달러(약 1조 9,567억 원)의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시켰습니다.
매출의 1%를 기부하는 이른바 ‘지구세(Earth Tax)’를 실천하며 1996년부터 모든 면제품을 유기농 목화로 만드는 친환경 의류 기업으로 유명합니다.
지구를 살리기 위해 사업을 한다는 그런 그가 그런 아이디어를 우리나라 농민으로부터 얻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인『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징집 명령을 받고 1962년 미사일 시스템 정비공으로 한국에 파병됐다. 그러나 나는 장교에게 경례하는 것도 잊고 단정치 못한 모습에 단식 투쟁을 하거나 약간 정신이 나간 것처럼 행동하는 등 계속 말썽을 부렸다.
그러자 군은 나를 민간인과 일하는 곳으로 보냈다. 거기에서 내가 하는 일이라곤 매일 발전기를 돌리는 일이었다.
나는 한 친구에게 돈을 주고 그 일을 맡기고 작업장을 몰래 빠져나와 한국인 등반가들과 함께 서울 북한산의 암벽등반을 했다.
그때 암벽 밑으로 농민들이 농사를 짓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대대손손 똑같은 농토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결이 뭘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지속가능한 경영은 그때 한국의 농민에게서 배운 것인지 모른다.”
저도 잘 몰랐습니다. 아니 잊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유기농업의 원조라는 것을 말이죠. 그럼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잉여탄소를 포집해서 토양에 저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널리스트이니까, 저장 방법은 이 분야 전문가 들에게 맡기겠습니다.
지구를 살리는 생태경제의 등대, 구례의 흙 살리기 운동
다만 저는 지금까지 소개해 드린 대로, 우리나라 조상들의 자연 순환적 유기농법을 오늘 에 되살려보자는 것입니다.
120년 전 그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현대의 발달된 과학과 농업기술을 융합합시다.
그러면 흙을 살려 탄소를 저장하면서도 고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소득을 올리고, 젊은이들이 몰려들게 할 수 있는 K-하이브리드 농업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들녘에 나가면 메뚜기를 잡고, 개구리를 잡아 제가 키우는 닭에도 먹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논에 그렇게 많던 미꾸라지, 뱀이며 논에서 울던 뜸부기 소리도 사라졌고 강남 갔던 제비의 90%이상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30대 때 북한산에 올라가서 오이를 먹으면 그 향이 퍼져나가 사람들이 모두 저를 쳐다봤습니다만, 요즘 오이는 구례산을 제외하고 오이의 향이 사라졌습니다.
상추는 풀을 씹는 듯하고, 사과나 배는 옛날 맛이 나지를 않습니다. 지금 먹는 것이 거의 다 그렇습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병원과 의사는 자꾸 늘어나는데 환자는 줄지 않는 것은 왜 그럴까요? 저는 이 모든것의 원인은 흙이 잘못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골에서 자란 저는 퇴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퇴비에서 나던 향긋한 흙냄새를 기억하는 세대입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희망을 저는 이곳 구례군에서 보았습니다.
흙이 살아야 나라가 살고 경제가 산다는 여러분의 외침을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지리산과 섬진강이 둘러싼 구례가 지구의 잉여탄소를 저장하고 그로 인해 구례 땅에서 자라는 모든 식생이 각종 화학성분에 젖은 우리 몸을 구하고, 나아가 인류를 구원하는 혁명의 땅, 생태 경제의 등대가 되어 우리나라와 전 세계를 비추게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지금까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