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0 (수)

  • 흐림동두천 2.9℃
  • 구름많음강릉 6.3℃
  • 구름많음서울 5.7℃
  • 구름조금대전 6.0℃
  • 구름조금대구 7.0℃
  • 구름조금울산 7.5℃
  • 구름많음광주 9.1℃
  • 구름조금부산 10.6℃
  • 구름많음고창 7.3℃
  • 제주 14.1℃
  • 구름많음강화 2.2℃
  • 맑음보은 2.8℃
  • 맑음금산 4.0℃
  • 구름많음강진군 8.9℃
  • 맑음경주시 6.5℃
  • 구름조금거제 9.0℃
기상청 제공

과학·기술·정보


이건 아니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중국은....

This Isn’t the China I Remember/2024년 4월 29일 뉴욕타임스 guest essay에서

중국계 미국인 작가인 기시 젠(Gish Jen, 1955년~)씨는 현재 상하이 뉴욕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Thank You, Mr. Nixon."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개혁 개방이전부터 지금까지 중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일상에서 만나고 만났던 중국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변하는 중국에 대한 감회를 섬세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중국인들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호감을 사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우리 또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 같아 그녀의 글을 그대로 소개한다.


 

◇ 일회용 반창고에 감탄했던 중국인들

 

1979년 내 어머니는 난징의 한 병원에서 일회용 반창고를 꺼냈다. 간호사들이 그 반창고 주위에 무리를 지어서 모여 놀라고 있었다. “서양에는 없는 게 없어!”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가족 방문으로 중국에 있었는데, 상하이 친척들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설명한 미국의 세탁기, 냉장고 그리고 에어 컨디션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훌륭한 치아와 풍만한 체지방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일반적인 경외심으로 VIP 대접이었다. 우리를 초대한 주인들은 갑자기 비싼 오렌지 소다(탄산음료) 병들을 따서 아무렇지도 않게 비싼 미지근한 맥주와 섞었다. 우리는 중국 정부가 지정한 우리 같은 방문객들을 엄격하게 모니터하는 것이 직업인 “안내원”을 피할 수 없듯이 이것을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친척이든 아니든, 우리는 외국인들이었다.

 

나는 1981년 산동 광업 연구소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돌아왔다. 내게 배우는 학생들은 보다 더 안전한 광업 기술을 배워 올 수 있도록 해외 유학을 준비하는 광업소 엔지니어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해외 전문가”였던 셈이다. 보통 말하는 그런 사람이었기에, 나는 내게 제공된 아파트에 좌변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뜨거운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전례 없는 사치를 누렸다.

 

내 가정부는 지붕 위에 있는 물통 밑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곤 하였고 물이 덥혀지면 욕조에 있는 수도꼭지 손잡이를 돌리도록 했다. 수업이 끝난 후 내게 배우는 학생들은 등받이가 없는 의자를 농구 코트에 내다 놓고, 거기에서, 각자 다른 방향으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의자에 앉아 쉬지 않고 몇 시간을 같이 공부하곤 했다. 그들은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자기 나라가 강해지는 것을 원하면서 나와 같은 서양인들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우리 같은 외국인들은 그들에게 일조(一助)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몇십 년을 빠르게 앞당겨 중국은 급격히 발전하고 있었다. 수년에 걸쳐 내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선생으로서, 방문 예술가와 관광객으로서-상하이 호텔 직원은 항상 내 신 용카드를 내게 두 손으로 돌려주면서, 머리를 숙여 인사하 고 미소를 지어줬다.

 

그러나 세계의 건설 크레인의 4분의 1이 중국이 한참 발전 하는 동안 중국의 도시에 있다는 소리가 들리고, 한 때 논 밭이었던 땅에서 고층빌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기 시작하자 호텔 직원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두 손에서 한 손으로 되돌려 준 신용카드

 

내 신용카드는 한 손으로 되돌아왔다. 접수대에서 근무하 는 직원은 나를 거의 올려다보지 않았다. 역시 내 친척들 도 내가 친척들에게 주려고 가져온 물건에 관해 묻지 않았다. 그때 그들은 “중국에 다 있거든”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자랑스럽게 선언했던 것처럼, 20세기의 미국의 세기였다면 21세기의 중국의 세기였다. 그렇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그러한 승리를 쟁취한 사람다 운 말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대신 오가는 담화(談話)는 중국 정부에 대한 확신과 신뢰의 상실이다. 사람들은 여전 히 그들의 도시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그런 도시들은 뛰어난, 세계적인 음식과 티끌 하나 없는 거리를 자랑하고 있다.

 

테니스와 패들 보드(카누와 서핑이 믹스된 수상 스 포츠)장을 포함한 거대하고 새로운 스포츠 센터가 여럿 있고, 핑크빛 모래를 가진 인공 해변도 있다. 도시는 역시 지난 여러 해 동안 푸르렀던 것보다 훨씬 더 푸르다. 목련과 벚꽃이 모든 곳에서 피고 고속도로 아래 번화가조차 조경이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도처에 보안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상하이는 안전에 대해서 찬사를 금할 수 없다. 하지만 표면 아래에 불안감이 숨어 있다.

 

이렇게 유명한 세 계적인 도시는 전에 비해 이상하게 외국인들이 거의 없다. 많은 이가 펜데믹 기간 동안 숨 막히는 정책 때문에 떠났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외국 회사들이 직원을 철수시켰거나,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다.

 

의류 가게는 텅 비었고, 많 은 다른 가게들은 문을 닫았다. 난징서(西) 도로의 쇼핑 구역은 이전에 사람의 바다를 이루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휑하게 비어 있는 듯하다.

 

상하이시민들은 2022년 봄에 코로나 환자의 급증을 막기 위해 준비할 시간도 거의 없이 두 달간 봉쇄 조치를 당 하는 데 대해 여전히 격분하고 있다. 생필품 부족이 극심 해서 타이레놀은 알약 단위로 판매되었다. 그런데다 봉쇄 이후 정책마저 너무 가혹해서 거주자들은 거리로 나와 시위를 했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펜데믹 대실패는 2014년,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사업을 창업하도록 강력히 권고한 리커창 수상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정부의 실수만을 덮었다. 이런 실수와 다른 잘못된 조치들은 연이어 물결을 이루는 상하이시민들의 노후 대비 저축을 희생 시켰고 많은 중국인은 지금 경제를 정체 상태로 몰고 온 정부의 기량 부족과 상궤(常軌)를 벗어나는 경향을 비난 하고 있다.

 

전 재산을 투자한 아파트값이 내려간다 내 상하이 친구가 말하는 것처럼, 정부는 마치 회전하는 자동차들처럼, 중국을 돌리고 돌리다가 마침내 사람들의 엔진이 멎었고 사람들의 바퀴에 자물쇠를 채워 버린 것이다. 그 결과 부동산가격 하락이 매우 급격하고 끊임이 없었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들, 이를테면 내 친구의 부모들처럼 요양시설비 혹은 생활 지원시설비를 내기 위해 그들의 아 파트를 팔려고 해도 팔리지 않는다.

 

그리고 경기 하강에 영 향을 받는 유일한 사람들은 거의 그들만이 아니라는 것이 다. 의사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금전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많은 환자가 수술비가 없는 것이다-한편 사업하는 사람들은 관망하면서, 환경을 예측할 수 없다면서, 투자를 꺼리고 있다. 많은 대학 졸업자는 엄혹한 직업 시장에 직면해 중국에서 “탕핑족”으로 불리고 있듯이, 근본적으로 중도에서 탈락하고 있다.

 

초등학생들조차 일반인들의 낙심천만을 느끼지 않는 아이가 없을 정도다. 한 사람의 선생으로서 내가 관찰했던 바는, 사회가 병이 들었을 때 어린이들이 그 대가를 지불한다. 너무 많은 부모가 불경기 때문에 학교를 떠나야만 했던 한 아이를 알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원인은-사람들이 말하기를, 중국의 성장을 억압하고 있는-서구라며 서구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이는 마치 중국이 가장 좋아하면서도 적으로 간주 하는 일본처럼 말이다.

 

일본의 잔혹한 1930년대 침략과 이어지는 중국의 점령은 여전히 중국인들의 마음을 괴롭히 고 있다(최근 내가 다니는 상하이 스핀 교실(spin class)에 서 CGI(컴퓨터 생성 화상)로 보여준 한 장면은 일본의 여러 사찰에 점점이 박혀 있는 거대한 코로나바이러스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마음이 지쳐 가는 사람들 누구에게 책임이 있든 간에 이민은 증가하고 있다.

 

UN 통계에 따르면, 31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지난 2년간 해마 다 중국을 떠났다. 이는 2019년까지 10년에 걸쳐 초기에 평균 얼추 19만 천 명이 떠나던 것과 비교할 때 62%가 늘어난 것이다. 재산을 가지고 이민하겠다고 하는 상하이에 사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도망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심지어 공식적으로 미국과 같이 그들이 매도하는 나라라도 가고자 한다.

 

해답이 언제나 이런 것은 아니다. 내 친구 한 명은 보스턴에 있는 대학원에 6년을 다니다가, 중국인 가정생활의 온기가 그립다고 말하면서 중국에서 머물고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어느 사람도 다른 나라에서 자리 잡기 어렵다는 것에 대해서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중국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전체 이민자 계층, 즉 그들의 아이들이 일찍부터 외국에 동화되기 충분한 나이 에-이상적으로 말하면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다니는 그들의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에 가기 위해 고위직을 떠난 여성 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의 희생에 따른 과실(果 實)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너무 일러서 말할 수 없다.

 

그런 아이들이 실제로 서양인이 될 수 있으려나? 수십 년 더 일찍 떠난 나처럼-그들은 외국인이 될 수 있으려나? 중국의 상황은 바뀔 수 있으리라. 그러한 탕핑족(lying flat, 재물을 벌고 사회적 성취를 추구하라는 사회적 압력에서 벗어나 삶에 대해 열정이 없는 태도로 사는 생활방식이나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고 있는 게 아니다. 상하이 에 있는 사람들은 단순히,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심라(心懶, xin lei)”할 뿐이다. 즉 그들의 마음이 지쳐 있다는 것이다.

 

 

 




HOT클릭 TOP7


배너







사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