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성취에 대해 태평스럽게 낙관론을 늘어놓고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자본주의를 지나치게 무시하는 ‘탈-성장’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래서 “‘탈-성 장’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으면서 성장의 장점을 진지하게 지지하는 마음가짐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마음가짐의 균형이 제대로 잡혀있어야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고 성장과 기후 사이의 균형을 잡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7살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가 말하는 성장 없는 풍요
그러나 ‘탈-성장’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성장과 기후 사이의 균형이 제대로 잡혀 있어야 된다’는 말은 외려 자본주의적 성장을 인정함으로써 지구를 거칠게 다루어도 좋다는 말로 비춰 질 수 있다고 본다.
‘탈-성장’ 운동의 공식적 인물로 등장한 올해 37살의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 고헤이 사이토(Kohei Saito)씨는 “‘탈-성장’과 자본주의가 섞이는 한, 그 어떤 시도도 실패할 운명일 것”이라는 메시지를 “Slow Down: The De-growth Manifesto”에서 단호하게 선포했다.
그는 “자본주의는 성장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성장의 중단, 혹은 감속을 요구하는 것이다”라면서, 사실상 자본주의의 종말을 요구하고 있다. 듣는 이에 따라 극단적일 수도 있는 요구이긴 하지만 이에 호응하는 독자들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난 1월에 미국에서 출간된 “Slow Down: The De- growth Manifesto”는 일본에서 2020년 처음 발간이 된 이후 백만 권의 절반이 팔렸다. 이 책에서 사이토는 오로지 “여러분은 이전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해결책에만 관심이 있는 구세대”라고 기성세대를 비난한 스웨덴의 환경주의자 그레타 툰베리의 말만 인용하고 있다.
사이토 씨는 1987년생이다. 그러니까 냉전 시대를 살아 본 경험이 없는 세대여서 소비에트 연방의 현실을 “반사적으로” 마르크스에게 책임을 부과함이 없이 순수하게 마르크시즘을 연구할 수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요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탈-성장’ 자체가 아니라 “탈-성장 공산주의”를 말한다.
사이토는 자신이 제안하는 공산주의가 상의하달식, 강압적인 소련의 비민주적 국가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상호 원조, 시민들의 집회, 그리고 면대면(面對面) 공동체 빌딩 등과 같은 국소적 실천을 강조하는 뭐랄까, 공산 사회주의로 기운 듯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공산당 선언”에서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성장의 필요성을 강조한 마르크스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오히려 환경이 악화로 인해 야기되는 지금 지구의 위기를 생각해 보자는 의욕이 일어나, 마르크스가 평생을 보관했던 연구 노트를 연구하다 내린 결론이었다.
공산주의를 공산주의로 부정하는 것은 특이한 수사적 표현인 것은 확실하지만, 어쨌든 ‘탈-성장 공산주의’는 마르크스를 다른 목적에 맞게 재창출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논쟁적이고 도발적인, 그리고 성장이란 단어를 붙이기에는 다소 부정확한 용어임에 틀림없는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부담을 제거하고(혹은, 무시하고) 마르크스를 소생시키고 있다.
하지만 사이토 씨는 그동안 경제성장으로 인해 생태학적 붕괴가 일어나고 있는 바로 지금 책을 쓰는 터라, 마르크스든 누구든 지난 세대를 산 사람들을 존경할 이유는 거의 없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사실상 그는 지난 세대의 누구를 막론하고 “더 이상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절제하는 가운데 약한 톤으로 선조를 조롱하고 있다.
지난 세대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도발적 사상은 의심할 수 없는 그가 가진 매력의 일부다. 하지만 그 역시 자본주의는 물질적 부를 낳는다는 주장에 “다소의 진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북반구의 선진국은 남반구 후진국의 희생으로 가능해진 부유한 생활방식을 즐기고 있다”는 그는 그래서 오로지 부유한 국가에서 ‘탈-성장’ 공산주의를 위해서만 싸운다.
그가 보기에 남반구 후진국의 희생이야말로 불평등이고, 이 불평등은 오로지 ‘탈-성장’에 의한 어떤 ‘배상’ 형태로 해소할 수 있다고 본다. 북반구의 선진국들이 사용하는 자원과 에너지를 줄이면 남반구 후진국들은 그들만의 경제성장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화석 연료에 의한 성장이 남반구에서 일어
나도 좋다는 말인가? ‘탈-성장’의 기수인 사이토 씨조차 성장이란 진부한 단어를 쓰고 있지 않은가? 라면서 비판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풍부함에 이끌리는 건 우리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사이토 씨 역시 이 본능과 싸워야 한다고 강요받고 있다.
다만 사이토 씨 역시 힉켈(Hickel)교수 처럼 ‘서민들, the Commons’에게 ‘급진적인 풍요’를 약속하긴 하되 우리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물질적 욕망을 끊임없이 뒤쫓는 성장의 풍요가 아니라 ‘모든 이들이 함께 누리는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자는 것이다.
◇상상력의 빈곤(A Poverty of Imagination)으로 고통을 받는 인류
‘탈-성장’이 지독스럽게 강요당하는 것을 거부하는 운동인데 어떻게 ‘모든 이들이 함께 누리는 풍요로움, 즉 공공의 부’가 이루어지도록 변화를 유도한다는 말일까? 사이토 씨는 “‘탈-성장’ 공산주의의 씨앗들이 전 세계에 걸쳐 싹이 돋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2050년까지 탄소중립, 그리고 남아프리카와의 농업 협력을 선언한 바르셀로나와 같은 여러 도시가 경험하고 있는 지역 지배 방식(local governance)이 작동”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탈-성장’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조차 사이토 씨 가 말하는 ‘탈-성장’의 풀뿌리 조직화의 여러 사례는 언뜻 민주적이면서 즉흥적인 생각인 것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탈-성장’주의자들이 계속 강조하고 있는 세계적 대재앙을 막기에는 사이토 씨가 거론한 지역 지배 방식이 턱도 없이 작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런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이토 씨는 그러한 지역 지배 방식은 지구를 구하는 뭔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탈-성 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현상 유지를 불편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타개할 낮은 수준의 상상력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기후 위기에서 지구를 구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하는 상상력의 빈곤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이토 씨는 서스킨드(Susskind)교수와 마찬가지로 ‘탈-성장’을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상상력의 결핍으로 고통을 받긴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아마도 이같이 이현령비현령식의 주장이 나오는 것은 상상력 결핍의 문제라기보다는 상상력이 지향하는 지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기술-낙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혁신’에 두고 있다. 반면 ‘탈-성장’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사회 운동’에 두고 있다. 그들 각자는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현실주의자라면서 ‘탈-성장’의 소유권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기후 위기에서 지구를 구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자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들의 자정(自淨)을 위해 6월의 이상 폭염, 무시무시한 기후재앙을 지구 곳곳에 시한폭탄처럼 던져 놓고 있다. ‘탈-성장’을 지지하든 아니든, 생각의 차이를 논할 시간이 없다. 모든 인류가 인종, 국가, 정파를 초월해 최고의 상상력과 용기를 지구 구하기에 수렴(收斂)할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