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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빨리빨리 문화’와 선비 정신



지난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충격적인 비상 계엄령 선포 이후 국내외 곳곳에서 한국의 국가적, 민족적, 국민적 특성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도 주목 대상이지만, 한국 민주주의가 견고한 배경도 관심 대상이다. 

 

이와 관련해 블룸버그통신은 '빨리빨리' 문화를 조명하는 분석을 내놓아서 주목을 받았다. 통신은 ‘빨리빨리’ 문화가 한국의 정치,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면서 윤석열 대통령의 급속한 몰락에도 기여했다고 진단했다. 통신은 '빨리빨리' 문화가 지난 100여년 동안 한국이 일본의 점령에서 벗어나고 북한과의 갈등에서도 생존했고, 빈곤한 농업 경제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로 도약시켰다고 평가했다.

 

통신의 분석은 한국 민주주의가 건강하다는 점을 전제로 하는 등 긍정적인 요소에 주목했기 때문에 반가운 토론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빨리빨리’ 문화는 장구한 한국사를 고려하면 매우 짧은 기간에 나타난 것으로 국가적, 민족적, 국민적 특성을 일관성있고 체계적으로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

 

우리나라가 최근 수십년 동안 ‘빨리빨리’ 양상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불과 100여년 전만 해도 한국은 느림보 나라였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1890년 전후에 한국을 방문했던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은 조선이 은둔의 나라고, 조선 사람들은 매우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관찰했다. 당시 기록을 봐도 일본은 유럽 강대국과 교류하면서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노심초사했지만, 한국 지식인들은 기민하게 움직이지 않았다가 아예 국가 주권을 모두 상실했다.

 

‘빨리빨리’ 문화가 현재 한국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맞지만 국가적 특성 전체를 설명하기에는 제약이 많다. 이번 내란 사태와 관련해 한국의 고유한 문화적 요소에 대해 토론한다면 오히려 ‘선비 정신’에 주목해야 한다.

 

선비 정신은 2천년 이상 지속되는 한국 역사와 전통 중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중요한 상황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변수였다. 선비 정신은 한국인들이 예로부터 선비로 알려진 지식인을 존중하고 선비들도 책임 의식을 갖고 사회에 기여하는 집단적 특성을 말한다. 물론 선비는 조선시대 후기에 유약하고 무능하며 이기적인 양반 이미지가 부각했고, 일제에 나라가 망하는 참극을 경험하면서 비난과 경멸의 대상이 됐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사 전체를 조망한다면 긍정적으로 기여한 부분이 더 많았다는 점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좋든 싫든 21세기 대한민국에도 존재하고 있고,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많은 상황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선비 정신이 한국에서 생겨나고 발전한 이유는 약 2,000년 전 고구려의 지정학적 특성때문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 서쪽으로 한족 왕조, 북쪽으로 북방 유목 민족, 동으로 말갈족, 남으로는 백제, 신라와 경쟁 관계에 있어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전쟁 과정에서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영토를 넓혀갔지만, 때로는 국가가 붕괴될 뻔한 위기도 자주 발생했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 지도자들은 전쟁이 났을 때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으면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교훈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평시에 국민들에게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펴고 있다는 이미지를 강조해야 전시에 민군 총력전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결론을 내기 전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는데, 5대왕 모본왕, 7대왕 차대왕, 14대왕 봉상왕 등 세 사람이 난폭하게 국민을 괴롭히는 폭군이라는 이유로 신하들에 의해 시해된 것이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 봉상왕이 시해된 서기 300년 이후에는 쿠데타로 숨진 국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더불어 고구려 지도부에서 신하들의 집단적 권력이 왕권과 균형을 이루는 현상도 나타났다.

정리하면 지정학적 특성으로 고구려에서 민군 총력전이 중요해졌고, 민중의 자발적 전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특별하게 발전한 정치 특성이 민본주의와 공동체주의라고 볼 수 있다.

 

민본주의는 민주주의와 공통점이 많아서 현대 한국이 민주주의를 빠른 시간에 적응할 수 있는 토양이 됐고, 공동체주의는 적대적 외부 세력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개념으로 고려나 조선을 거쳐 한국인들의 국가적 집단주의의 근간으로 작용하고 있다. 민본주의와 공동체주의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지도자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선비가 바로 지도자 역할을 하는 존재다. 백성들은 선비를 믿고 선비들은 백성들의 여망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표준 지침이 된 것이다.

 

한편 고구려는 봉상왕 축출 이후에도 300년 이상 생존하면서 중국 왕조 황제의 천하 통치권을 인정하면서도 국가 운영 자율성을 보장받는 외교 관계를 발전시켰다.

 

동시에 말갈족 등 주변 약소국을 통제하면서 나름의 통치 구역을 관리하는 양상도 보였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세계관은 최상층에 천하를 통치하는 황제, 차상층에 특정 지역을 통치하는 국왕, 그 아래에 부족 차원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부족장 등이 위계질서를 이루는 다층적 세계관이다.

 

다층적 세계관은 고려와 조선에서도 유효했고 현대 대한민국에도 영향을 미쳐서 강력한 한미동맹을 유지하면서도 미국과 갈등 관계에 놓인 중국과의 협력 관계도 별도로 관리할 수 있다고 자연스럽게 믿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고려는 요나라와 정치적으로 협력하면서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지만, 요나라의 적국인 송나라와도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협력했다.

 

민본주의와 공동체주의, 다층적 세계관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선비 정신은 우리나라가 국가적 재난을 겪는 상황에서 국가를 유지하는 보루 역할을 해왔다.

 

일부 엘리트의 무능과 무책임 등으로 국가 붕괴 위기도 여러번 겪었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국가 운영이 효과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다른 나라들이 대부분 소멸되거나 변형되면서 문화와 전통이 전수되지 못한 것과 달리 우리 한민족의 나라는 단일 민족국가 형태를 유지했다.

 

예를 들어 중국의 경우 북위 이후 당, 송, 원, 명, 청 등의 왕조가 차례로 중국을 대표했지만, 이들은 동일한 전통과 문화를 가진 왕조는 아니었다. 인구 5천만 이상 규모의 나라에서 우리나라처럼 국가와 민족, 국민이 일관성 있게 전통을 이어온 나라는 일본 정도 외에는 찾기 어렵다.

 

아마도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 민주주의가 이렇게 강고하다는 점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대통령이 명령을 내리면 군대는 명령을 따를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런 계산법은 한국 사회 전통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한국 민주주의는 단순히 군주주의에 반대하는 유럽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본주의라는 초석 위에 존재하는 기둥에 비유할 수 있다. 국가는 국민이 책임지고 지키지만, 국민을 무시하는 지도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1980년 광주에서 시민군의 처절한 항쟁이 존재했고, 1987년 전국에서 수백만이 참여한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고, 1998년 IMF 사태를 맞아 금모으기 운동이 전개되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수백만이 참여하는 붉은 악마 응원이 펼쳐지고 이번에 현직 대통령의 내란 미수 사건에 대해서도 국민적 결집 현상이 나타났다. 이 모든 현상의 배경에 선비 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윤석열 내란 미수 사태도 폭군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우리 민족 특유의 문화와 고집이 반영된 결과다. 한국을 이해하려면 ‘빨리빨리’ 문화보다는 선비 정신에 집중하는 것이 적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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