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경제를 밑바닥에서 일으켜 세워 반석 위에 올려 놓은 양대 인물을 꼽으라면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 영 현대 창업자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들은 없을 듯 하다. 우리나라 재계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기라성같은 창 업자들이 있었지만 현재도 서점에서 팔리는 자서전은 현 대 정주영 회장이 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일 것 같다. 1915년생인 정주영 회장은 2001년 86세로 타계했다.
오늘날의 세계 경제의 키워드는 기술이라고들 말하고 있 지만 기술과 지식은 모두 정신에서 나오며 정신에 의해 지 탱되며 정신에 의해 발전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주영 회장의 정신은 무엇일까. 본인 스스로 현대를 세계 적인 기업으로 자신을 불세출의 기업가로 만든 것은 근면, 검약, 진취적 정신이라고 자서전에서 고백했다.
정주영은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농사 꾼의 6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를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소문난 부지 런한 농사꾼이었으며 여섯 동생을 모두 혼례시켜 땅을 몇 뙈기 떼어내 분가시켰다고 회고했다. 어머니도 아버지 못 잖은 부지런함으로 길쌈을 하고 밤새도록 짠 베로 식구들 옷을 해결하고 혼수 장만까지 했다고 기억했다. 정주영은 늘 부모의 부지런함을 물려받은 게 가장 큰 재산이라고 했다.
정주영의 농삿 일은 열 살 무렵부터 새벽 4시 아버지를 따 라 농토에 나가 일을 하며 아버지로부터 고랑 치고 김매는 법을 배웠다. 그는 자서전에서 밭일 중에 어머니가 나무 함 지에 이고 나온 감자밥을 호박 된장찌개로 비벼 먹던 꿀맛 같은 점심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주영은 수 차례 가출을 거듭한 끝에 막노동으로 일을 익히고 세상 물정을 알아가다가 마침내 쌀가게 배달원으 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게 된다. 부지런한 일 태도에 주인 의 마음을 얻어 장부 정리도 맡았다. 정주영은 마지막 가 출 4년 만에 쌀가게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인수하라는 제의를 받고 어엿한 쌀가게 주인으로 변신한다.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쌀가게가 한창 번창하던 중 중일전쟁 발발로 전시체제령에 따라 쌀 배급제가 실시되자 쌀가게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정주영은 쌀가게를 판 돈으로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에게 땅을 사드리고 장가도 든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1940년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수리소를 인수했다. 자동차수리 소가 새로 문을 연지 얼마되지 않아 종업원의 실수로 불이 나 공장은 홀랑 타고 수리를 맡겨놓은 차까지 몽땅 타버렸 다. 하지만 쌀가게를 하면서부터 쌓아놓은 신용 덕분에 다 시 한번 돈을 빌릴 수 있어서 자동차수리소를 재개할 수 있었다.
그는 자동차 수리를 다른 수리소보다 더 싸게 속이지 않고 성실하게 해준 덕택에 큰돈을 벌었다. 창업 자금과 화재 복구비로 두 번씩이나 거금을 빌려준 고마운 전주에게 원 금과 이자를 깨끗이 갚았다. 중일전쟁에 이어 일본은 미국 과의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물자가 급해진 1944년 일본은 기업 정비령을 발령하여 기업들은 강제 통합했다. 정주영은 자동차 정비소 사업을 떠나 후일을 기약했다.
해방을 맞이한 후 정주영은 1946년 4월 서울시 중구 초동 106번지 적산대지를 불하받아 현대자동차공업이란 간판 을 달고 자동차 수리공장을 다시 시작했다. 정주영의 ‘현 대’ 기업이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년 후에는 현대토건사라는 상호로 건설업도 시작했다. 1950년 1월, 정주영은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를 합병해 현대 건설주식회사로 중구 필동에서 사무실을 열었다.
주한 미군 공사와 정부 발주 공사로 점점 사세를 키워오 던 정주영은 국내에만 의존해서는 곧 벽에 부딪힐 것을 일 찍이 예견하고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해외 건설의 문을 두드렸다. 한국 건설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현대건설이 1965년 9월 태국 파티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따냈 다. 정주영은 이 공사에서 전동식 롤러, 컴프레서, 믹서, 시 멘트차 등을 직접 만들어 썼다고 밝혔다. 현대건설이 첫 고속도로 공사에서 막대한 손해를 봤지만, 그것은 나중에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최단기간에 완공하는 원동력이 됐다.
경부고속도로 공사는 1968년 2월에 착공해 1970년 7월에 완공됐다. 총 길이 428km에 305개 교량과 12개 터널, 19 개 인터체인지를 만든 경부고속도로는 429억의 예산을 들 여 2년 5개월 만에 공사를 끝냈다. 세계 고속도로 건설 역 사상 단위 거리 대비 10분의 1의 비용과 최단 시일 내 완 공이란 대기록을 세웠다.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공사 구간 중 가장 난공사인 당 제터널(현재는 옥천터널로 개명)을 포함해 전 구간의 5분 의 2를 맡았다. 공사가 시작되고부터 정주영은 거의 잠을 못 잤다고 한다. 간이침대를 작업 현장에 갔다 놓고 잠깐 씩 눈을 붙이거나 심지어 야간작업을 독려하느라 지프차 를 타고 잠을 자면서 공사장 주위를 돌게 하기도 했다. 얼 마나 잠을 못 잤으면 박정희 대통령에게 불러가서 말을 듣 던 중에 깜박 졸았던 일화가 유명하다.
옥천군 당제터널은 소백산을 뚫는 것이었다. 상행선 5백 90미터, 하행선 5백30미터를 파는 중에 낙반 사고가 13번 이나 일어나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지하수가 분출돼 인부 들이 떠내려가는 바람에 공사가 중지되는 일도 있었다. 공사 진도가 너무 늦어지자 보통 시멘트보다 20배나 빨리 굳는 조강 시멘트를 단양 시멘트 공장으로부터 운송해 오 면서 5백 명의 인부들이 터널에 달라붙어 밤낮으로 터널 이 뚫릴 때까지 돌관작업을 강행했다고 한다.
3개월이 걸 려야 할 거라는 터널을 25일 만에 관통했다. 당제터널은 경부고속도로의 마지막 남은 공사로서 6월 27일 밤 11시 에 뚫렸다. 그리고 사흘 후 경부고속도로가 정식으로 개통 됐다.
오늘날 한국의 조선산업이 트럼프 대통령의 협력 요청을 받을 만큼 조선 강국이 된 시초를 따지자면 현대 울산조 선소를 건설한 정주영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포항제철 을 건설하고 나온 쇳물을 사용해 외화를 벌어들이려면 조 선산업을 키워야 된다는 정부의 방침은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을 실제로 현실화하려면 조선소를 지을 차관을 빌려 야 하고 모자란 기술도 도입하고 그 조선소에서 제작한 선 박을 살 구매자를 찾아야 한다. 이 세 가지는 동시에 진행 돼야 했다.
1971년 9월 영국의 애플도어사 등 조선소와 기술협력 계 약을 체결함으로써 미흡한 기술 문제는 해결됐다. 하지만 조선소를 건설할 돈이 없었다. 영국 바클레이 은행과의 차 관 교섭이 잘 진행되지 못했다. 정주영은 바클레이 은행과 의 교섭을 부탁하려 영국 조선소 롬바톰 회장을 면접했다.
바클레이 은행에 대한 주선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그에 게 정주영은 주머니에서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5백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우리는 1천5백년 전에 이미 철갑선을 만 들었던 실적과 두뇌가 있소”라며 설득했다. 5백원짜리 지 폐를 본 롬바톰 회장은 깊은 인상을 받았던 듯, 바클레이 은행과의 차관 협의를 적극 도와줬다.
또 선박을 먼저 주 문받아야 차관 보증을 설 수 있다는 영국 수출보증 기구 에 요구에 따라 그리스 해운업자인 리바노스 회장을 설득 해 그로부터 26만 톤급 유조선 2척을 주문받았다. 한국은 이전까지 1만7천 톤급 선박 건조가 가장 큰 것이었는데, 1974년 3월 26만 톤급 선박이 진수됨으로써 대한민국 조 선산업의 기적이 시작됐다.
1973년 1차 오일 쇼크가 일어나 원유가격이 2년 새 다섯 배가 뛰었다. 외채를 빌려와 경제성장을 해온 탓에 원유가 상승은 대한민국은 외채 상환 결제에 내몰리게 됐다. 한 푼의 달러가 귀한 시대였다. 정주영은 1975년 막대한 오일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는 중동으로 진출해야겠다고 결심 했다. 현대는 20세기 최대의 역사로 기록되는 사우디 주베 일 산업항 공사를 따낸다. 공사 금액은 9억 3천만 달러로, 당시 우리나라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거액 이었다.
50만 톤급 유조선 네 척을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해상 터 미널을 건설하는 입찰에 미국과 영국, 서독, 네덜란드, 프랑스 등 세계적인 건설사 9개 사가 신청 서류를 냈다. 뒤늦 게 입찰 소식을 들은 현대가 입찰서류를 제출함으로써 10 대 1의 경쟁이었다.
현대는 이 공사를 최저가 입찰가와 공 기 단축을 조건으로 따냈다. 공사 선수금을 받는 날, 외환 은행장이 전화를 걸어 “수고하셨습니다. 정 회장님, 오늘 우리나라 건국 후 최고의 외환 보유고를 기록했습니다”라 고 치하했다. 주베일 항만 공사는 모든 기자재를 울산조선 소에서 제작해 바지선으로 사우디 걸프만 공사장까지 끌고 가는 대역사였다. 동남아와 인도양을 거쳐 1만2천 킬로 미터의 뱃길을 19번 오가는 운송 작전이었다.
주베일 공사를 지켜본 사우디 관계자들과 외국 기술자들 은 세 가지 점에서 크게 놀랐다고 전한다. 첫째, 현대건설 의 창의적이고 담대한 공사 수행 계획과 둘째, 속출하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들, 셋째, 한국인의 근면성이라고 했다.
그밖에 정주영은 가능성이 없다던 88올림픽 유치에 누구 보다도 앞장서 활동한 끝에 서울 개최 티켓을 따는 데 결 정적인 공을 세웠고, 바다를 메워 농토를 만든 서산 간척 지 공사를 뚝심과 기발한 공법으로 해냈고, 소 떼를 몰고 북한 땅을 밟았다. 그가 염원했던 남북통일이 이뤄지던 날, 정주영이 뿌린 씨앗은 반드시 기억될 것으로 본다.
정주영은 그의 자서전에서 첫째 부지런하기를 권했다. 그 는 인간은 일을 해야 하고 일이야말로 신이 주신 축복이라 고 말했다. 하루 부지런하면 하룻밤을 편히 잠들 수 있고, 한 달 부지런하면 생활의 향상을 볼 수 있고, 1년, 2년, 10 년... 평생을 부지런하면 누구나 자타가 공인하는 크나큰 발전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부지런함은 자기 인생에 대한 성실성이기 때문에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은 일단 신 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둘째로 근검절약으로 내실을 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주 영은 고백했다. “나는 열여덟 살 때부터 객지로 나와 부둣 가 막노동, 건설 현장 돌 나르기 등 안 해본 일이 없는 노동 자 시절부터 무섭게 절약 생활을 했다. 장작값 10전을 아끼기 위해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저녁 한때만 불을 지펴 이튿날 아침, 점심 도시락까지 밥을 한꺼번에 지었으며 덤으로 구들장도 불기를 쏘여 냉기를 가시게 했다...최초의 안정된 직장이었던 복흥상회 쌀 배달꾼이었던 때도 전차 삯 5전을 아끼려고 새벽 일찍 일어나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구두 닳는 것을 늦추려고 징을 박아 신고 다녔고, 춘 추복 한 벌로 겨울에는 내의를 입고 지냈고, 봄가을에 그 냥 입었다...쌀 한 가마 값의 월급을 받으면 무조건 반을 떼 어서 저축했고, 명절 때 받은 떡값은 무조건 전액 저축으 로 넣었다. 형편없이 적은 수입이라도 쥐어짜고 졸라매 저 축하다 보니까, 사글세방이 전세방이 되고, 전세방이 초가 집이지만 내 집으로, 초가집이 더 그럴듯한 집으로 옮겨졌다.”
오늘날 이만큼 잘살게 된 대한민국은 정주영에게 부지런 함과 검약 정신을 물려준 그의 부모님과 그것을 이어받아 진취적인 정신으로 불가능할 것 같았던 사업에 도전한 그 에게 빚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