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8 (일)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오피니언


한국의 미래와 소프트파워

국제정치 이론의 거두이자 '소프트파워' 개념의 창시자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가 지난 6일 별세했다. 그는 단지 유명한 학자 가운데 한 명이 아니라 국제정치 전공 학자 사이에서 지적 지도자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그가 남긴 이론과 개념은 세계 외교와 국제정치 연구, 그리고 정책 결정 과정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유산을 조명하는 글이 쏟아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나이 교수는 이미 1970년대에 국제 관계가 오직 군사력이나 경제력 등 힘에 의해서만 굴러가고 국가 간 전쟁은 피할 수 없다는 현실주의 국제정치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그는 로버트 커헤인 프린스턴대 명예교수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적 제도주의’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국가 간 협력 가능성을 이론화했고, 이를 바탕으로 ‘복합적 상호의존’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그의 이론과 개념은 군사적 충돌이 아닌 경제, 기술, 제도, 인적 교류를 통해 국가들이 서로 얽혀 있다는 현실을 설명하고, 현대 국제관계에서 충돌이 존재하지만, 협력도 존재할 수 있는 구조를 보여주었다. 미중 전략경쟁에서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면서 관계 단절을 위협했지만 실제로는 양자 간 교역 규모가 더 커지는 현실은 나이 교수의 복합적 상호의존 개념이 유효하다는 점을 입증한다.

 

1980년대부터 나이 교수는 ‘소프트파워’라는 개념으로 국제정치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었다.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는 강압적 방식의 하드파워가 아니라, 문화, 가치, 제도, 설득력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의 자발적 협력을 유인하는 능력이야말로 21세기 외교의 핵심이라는 그의 통찰은 각국의 외교 전략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소프트파워 개념은 이후 하드파워와 결합해 ‘스마트파워’라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이는 오늘날 공공외교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한국 역시 한류 확산, 문화 콘텐츠 전략, 국제개발협력 등을 통해 나이 교수의 이론을 활용하는 대표적인 사례 국가다.

 

이처럼 조지프 나이는 단순히 국제정치 이론 전문가가 아니라, 국제사회가 변화하는 메커니즘을 읽어내고,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개념의 틀을 만들어준 지식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의 이론과 통찰이 위대하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가 설계하고 제안한 미국의 외교 전략이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

 

나이 교수는 미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전략을 제시한 학자다. 그의 전략은 미국의 패권 유지, 중국 견제, 국제 질서 유지에 기여하도록 설계된 것이지, 한국의 안보, 통일, 경제, 외교적 자율성을 고려해 맞춤형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다. 한국은 미국과 전혀 다른 지정학적 조건 위에 놓여 있다.

 

유라시아 대륙 동단에 위치한 한국은 태평양을 향해 열려 있고, 중국, 러시아, 일본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다. 단순히 해양 세력이나 대륙 세력 중 하나에 속한 나라나 둘 사이에 끼인 나라가 아니라 두 세력권에 모두 소속된 ‘해륙국(海陸國)’의 조건을 지녔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외교 전략도 해양과 대륙 세력 사이에서 이분법적인 동맹-적대 구도보다는 보다 다층적이고 유연해야 한다.

 

한국은 또 세계적으로도 드문 ‘분단국가’라는 특수성을 갖고 있다. 1945년 미소 냉전의 산물로 남북이 갈라졌고, 1950년 전쟁 이후 극도의 적대관계가 고착되었다. 이 분단 구조는 한국 외교의 최우선 전략 목표가 ‘통일 환경 조성’과 ‘한반도 안정 유지’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나이 교수가 제안한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 구상은 중국 견제를 최우선에 두고 있고, 한국의 대중 전략이나 남북관계 전략과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북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국가고, 경제적으로도 한국의 최대 교역 상대국 중 하나다. 한국이 중국과 적대적 구도로 전환될 경우, 남북관계 개선은 물론, 경제, 안보, 외교 전반에 걸쳐 심각한 불안정성이 초래될 것이다.

 

특히 한반도는 전면전이 발생할 경우 엄청난 피해가 예상되는 전장 중심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중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상정하고 외교 전략을 짜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자해적 선택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조지프 나이의 정책 제안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국제정치 분석에서 그가 보여준 탁월한 시각과 전략적 사고 방식을 참고해 한국의 국익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 외교 전략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지정학적 조건, 분단 구조, 산업 구조, 국제적 신뢰도, 인구 구조, 기술 발전 수준 등 한국 고유의 상황을 복합적으로 분석해 전략을 세우는 것은 진정한 자립 외교의 출발점이다.

 

한국은 이제 선진 강대국의 일원이다. 외교 전략은 국가 주권과 직결된 사안으로 선진 강대국은 물론 개발도상국도 독자적인 전략 개념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것이 당연하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외교 전략 수입국이 아니라 스스로 외교 전략을 설계하는 선진 강대국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오늘날 한국 외교는 미중 전략 경쟁, 기술 패권, 안보 불균형, 글로벌 공급망 재편, 남북관계 정체, 외교 다변화 요구 등 복합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복합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이론 모방이 아니라 실질적 전략 독립이 필요하다.

 

조지프 나이는 분명 국제정치 분야에서 위대한 학자였고, 그가 남긴 신자유주의적 제도주의 이론과 소프트파워 및 소마트파워 개념은 외교 전략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전략과 정책을 그대로 수입하고 적용한다면 한국 이익보다는 미국 이익에 봉사하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그가 제시한 이론과 개념에서 참고할 부분은 최대한 참고하되, 우리의 지정학적 현실과 시대적 조건을 정확하게 반영해야 한다. 그것이 나이 교수 별세를 제대로 애도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HOT클릭 TOP7


배너






배너

사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