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신해철법’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의사 측은 의료분쟁조정절차의 자동개시에 앞서 대불제도 등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고 있으며 환자 측은 이 법이 의료진에 과실 입증책임을 묻는 입증책임전환 대신에 도입된 것이어서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회 상임위에 있는 법안은 계류 중이다.
의료분쟁조정절차, 자동개시 어려워
의료분쟁조정제도는 지난 2011년 제정된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조정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을 통해 추진되는 제도다. 의료분쟁조정원은 의료사고에 대한 감정 및 조정업무 등을 맡고 있다. 조정절차의 경우 자율적인 합의제도로서, 현행 피신청인이 조정절차를 원하지 않거나 14일 이내에 참여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자동으로 기각되며 조정결과에 대해서도 이를 준수해야 할 법적인 강제성이 없고 이에 불복해 소송을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중재절차는 신청인·피신청인 합의에 따라 신청할 수 있으며 결과에 대해서도 법적인 효력이 부과된다.
의료분쟁조정원에 따르면 지난 2012년 4월부터 올해 9월말까지 총 3천335건이 접수된 가운데 조정·중재 개시 1380건(42.4%), 불참 각하 1천871건(56.1%)이다. 또 조정절차가 완료된 1천160건 중 중재판정·조정성립이 779건으로 조정성립율이 89%에 달한다. 최근 신해철 사망사건 발생으로 오제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조정 등에 관한 법률(2014년 3월28일 발의)’ 개정안이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통과여부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이 개정안의 골자는 의료소비자가 의료사고에 대해 의료분쟁조정원에 분쟁조정 신청 시 자동으로 조정절차가 개시되도록 한 것이다.
조정절차에 대해 다른 제도(언론중재제도, 환경분쟁조정제도 등)와 비교해 이처럼 피신청인의 의사에 따라 조정절차의 개시여부를 결정하는 제도는 의료분쟁조정제도가 유일하다. 오제세 의원실 관계자는 “자동개시는 강제조정과는 다르다”며 “조정절차에 참여하더라도 조정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조정결과는 폐기되고 강제성은 없다”고 밝혔다. 이어 이 관계자는 “조정절차를 개시하는 데 있어 부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 이의신청도 할 수 있도록 했다”며 “이 법안은 정당한 사유 없이 조정절차를 거부할 수 없도록 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대한의사협회는 “이번 개정안대로라면 자율적인 합의를 기본으로 해야 할 조정제도의 취지가 무색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의협 관계자는 “한국소비자원의 경우 강제성이 있는데 비해 의료분쟁조정원의 조정절차는 자율적인 합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고 그래야 조정제도의 의미가 있다”며 “의료분쟁조정원 조정의 중립성과 효율성 등을 홍보를 통해 자율적으로 참여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참여를 더욱 활성화할 수 있는 유인책들을 동원하면 좋을 것”이라며 “피해배상금 대불제도나 무과실국가보상제도의 경우, 사고가 나지 않았는데도 병원 측이 기금을 얼마씩 조성하는 것이라서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한 건보재정 등을 활용한 정부의 전액조성이 필요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대한병원협회 관계자는 “조정개시율은 비교적 낮지만 높은 조정성립율을 봤을 때 높은 신뢰를 바탕으로 성실히 조정절차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조정참여 강제 시 조정 불성립이 빈번하게 발생해 결국 신청인·피신청인 뿐 아니라 중재원의 시간적·경제적 피해 등 사회적 낭비가 초래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절차 자동개시가 적용되는 건설 분쟁 등은 신청인이 발생한 피해와 원인을 비교적 판단하기 쉽고 분쟁해결기구 역시 조사와 판단이 용이한 측면이 있지만, 의료는 정보의 편중성으로 인해 진료나 수술 시 의사결정의 적합성 등에 대한 신청인의 판단이 어렵고 의료인의 과실이 없더라도 불필요한 오해나 분쟁이 발생하기 쉽다”고 지적했다.
의사들, 필요적 조정전치주의 요청
사실 이 법은 지난 1988년 의협이 ‘의료사고처리특례법’을 만들어 입법건의한 데서 비롯됐다. 당시 의료인들은 환자 측의 물리적 실력행사 때문에 제대로 된 진료를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특별법을 만들어 진료에 전념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염원을 담았다. 그러나 이 법은 입증책임전환, 필요적 조정전치주의, 무과실보상, 새로운 의료분쟁조정기구의 설립 등에 대한 합의를 보지 못해 23년간 법안 발의와 폐기를 반복하다가 2011년에서야 드디어 입법됐다.
논의과정에서 의사들은 의료사고로 인해 법원으로 갈 경우 물리적·사회적 비용부담과 낙인 등을 피하기 위해 소송에 앞서 일정한 조정절차를 반드시 거치도록 하는 ‘필요적 전치주의’를 주장했으나 법원과 법무부 등 관련기관들이 국민의 신속하게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고 해서 조정을 받아도 되고 바로 법원으로 가도 되는 현재와 같은 임의적 전치주의로 도입됐다. 대불제도는 비용부담이 높은 배상책임보험 의무가입 대신 고안해 낸 제도로 병원들이 일정한 기금을 조성했다가 의료분쟁조정에 따른 배상금을 병원의 경영난 등으로 환자 측에 줄 수 없을 경우, 이 기금을 활용해 우선 신청인들에게 배상금을 주고 나중에 병원측에 구상권을 행사하는 제도다.
배상책임보험에 가입하면 연간 수백만원에서 천만원 정도까지 부담되는 게 보통이지만 대불제도의 경우는 적게는 1만원부터 많게는 몇 백 만원 수준으로 내면 되고 한번 걷으면 기금의 4분의3정도가 소진되기 전까지 걷지 않는다. 불가항력분만사고 국가보상은 산부인과의 분만과정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또는 과실이 없이 발생한 사고에 대해 병원 차원에서 환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해 온 관행을 양성화한 것으로 소요재원의 규모나 재원마련을 위한 분담방법 등에 대한 논의가 없었는데도 의료계의 강력한 요구로 법안 통과 막바지에 삽입돼 통과됐다. 현재 정부와 산부인과병원이 7대 3의 비율로 기금을 마련하고 있으며 병원들은 분만 1건당 1천161원 정도를 내면 된다. 또 환자 측에는 최고 3천만원까지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반대를 위한 반대
이처럼 의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제도의 참여를 이제는 도리어 의사들이 거부하고 있는 데 대해 각계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환자들이 의료진에 비해 의료 관련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의료사고 발생 시 환자 측이 의료진의 과실을 입증하는 것보다는 의료진이 과실이 없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해서 입증책임전환을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며 “18대 국회 당시 심재철·최영희 의원안과 시민단체(경실련) 청원안에는 다 입증책임전환이 있었으나 막상 통과된 법안에서는 빠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통과된 현재의 의료분쟁조정법은 입증책임전환을 수용하지 않는 대신 분쟁조정위에서 의료진의 과실여부를 조사·감정하고 이에 대해 조정하는 역할까지 하도록 한 것”이라며 “의료계 요구로 만들어진 법이지만 의료계의 조정절차 불참으로 인해 실효성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는 “의료소송을 하게 되면 착수금이 보통 1천만원 이상 들고 1심판결 나는데 평균적으로 2년6개월이나 걸리며 대법원까지 가려면 8년은 잡아야 한다”며 “그래서 의료사고 나면 환자 가족들은 직장을 그만 두고 소송에만 매달려야 한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이어 그는 “의료소송 시 의료진 과실에 대한 입증책임은 고스란히 과실을 주장하는 측(소송 신청인)에게 있다”며 “의료전문변호사도 자료나 정보를 수집하지는 않고 환자 측이 모은 자료를 소송을 할 수 있도록 정리해 주는 역할만 한다. 과실을 입증하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한국소비자원의 경우 의료분쟁조정원의 감정부와 같은 기능이 없고 자문의사들을 지정해서 의견을 받는다”며 “이에 따라 분쟁조정 신청을 다 받아주지 않고 명백히 과실이 드러나는 사건이나 위급한 사건만 받는다”고 밝혔다.
안 대표는 “이에 비해 의료분쟁조정원은 감정부가 있어 사고에 대한 조사와 감정을 실시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배상비용을 조정·결정해 준다”며 “비용 또한 적게는 몇 만원에서 많아야 10만원 정도 든다. 절차에 소요되는 기간도 3~4달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예전에 돈 없는 환자들은 의료소송도 할 수 없었고 소송을 한다 치더라도 과실 입증이 어려웠는데 이런 측면에서 의료분쟁조정법은 획기적인 제도”라며 “그러나 의료분쟁조정을 원하는 환자들 중 절반 이상이 병원 측의 불참으로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병원 간호사 이모(37) 씨는 “아무리 의료진이 스스로 과실이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을 환자나 가족들에게 입증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본다”며 “환자가 죽거나 장애를 갖게 됐는데 불필요한 분쟁이라고 회피할 문제만은 아닐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의사들도 오랜 시간 법원 드나들면서 의료소송하느니 중재원에서 조정 받는 게 더 경제적이고 안전한 방법일 것”이라며 “왜 의협에서 분쟁조정에 참여하지 말라는 공문을 보내면서 의료분쟁조정원의 참여를 반대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꼬집었다.
추호경 의료분쟁조정원 원장은 “건설산업기본법에서 건설분쟁조정신청 시 피신청인의 참여동의가 없으면 신청이 각하됐던 조항도 2013년에 개정돼 이제 분쟁조정관련법 중 조정절차의 자동개시가 되지 않는 법은 이 법 하나 남았다”고 설명했다. 추 원장은 “신청인에게 피신청인이 조정절차에 불참해 신청이 각하됐다고 연락을 하면 ‘이런 법이 어딨냐’고 한다”며 “좋은 점이 많은 제도가 실효성이 없어서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그는 “의료사고로 인한 분쟁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구제해 주면 환자들이 병원에 가서 실력행사를 할 일도 없어질 것이며 이에 따라 의료의 질과 환자-병원 간 신뢰도 높아질 것”이라며 “의료분쟁조정제도가 실효성 있게 확대되면 국민 보건의 발전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정일 한국의료법학회 부회장은 “대불제도는 배상책임보험을 의무가입할 경우, 고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 고안된 제도다. 이것이 싫다면 그냥 배상책임보험 들면 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무과실 국가보상은 의료계가 요구해서 법에 들어간 것이다. 당시 법조계는 무과실인데 의사 측이 책임을 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해서 반대했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정부에서 저출산정책 차원에서 기금을 마련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부도 이 부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두 제도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의사들이 자동개시를 반대하기 위한 이유로 든 것은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오제세 의원실 관계자는 “의협 내부에서도 아직 대불제도를 배상책임보험가입으로 전환할 것인지, 대불제도 담당기관을 의협 내부의 공제기관으로 할 것인지, 무과실보상에 대해서도 정부가 100% 책임질 것인지 아니면 다른 대안을 찾을 것인지에 대해 아직 합의가 안 됐다”며 “논의가 더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이 제도들이 개선돼야 분쟁조정 참여율을 높이겠다는 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라고 꼬집었다.
공정한 의료서비스 희망
의료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동적으로 분쟁조정절차에 참여하게 되면 과실이 아닌데도 조사를 받아야 하며 진료에 방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런 어려움을 이해 못하는 국민은 없다. 그러나 의사들이 자신의 손을 거쳐 간 환자들에게 책임을 다하고자 한다면 의료사고에 대해 좀 더 열린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신해철’이라는 한 사람의 유명인을 위한 법이 아닌 공정한 의료서비스를 받기를 원하는 국민의 염원이 담긴 법으로서 이 법안이 국회에서 최대한 존중받기를 바란다.
MeCONOMY Magazine January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