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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가수 김재희‘리턴 투 메모리즈’로 17년 만에 다시 부활


1994년 부활 3집의 타이틀곡 ‘사랑할수록’이 세상에 발표되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 한 남자, 김재희. 앨범이 발표되자마자 대중은 그에게 열광했다. 100만장이 넘는 앨범판매, 밤낮없는 스케줄, 언론의 주목. 그의 앞에는 가수로서의 삶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화려한 가수로서의 삶이 그에겐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하루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죠. 술로 버텼어요. 동네 술꾼들이 다 내 친구일 정도였으니까.”  형의 죽음 그리고 부활의 성공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여있던 그는 그렇게 떠났다. 인기, 돈, 명예를 다 버리고 떠난 김재희. 그가 긴 방황을 끝내고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故김재기의 동생으로서가 아닌 가수 김재희의 ‘리턴 투 메모리즈’의 스토리를 들어보자.

17년간 외도의 삶, 그리고 방황
형(故 김재기)의 죽음, 그리고 가수로서의 성공이 교차하던 1994년. 그토록 바라던 가수의 길을 포기할만큼 그에게는 힘든 시간이었다.
“24년간 한 이불에서 살을 맞대고 지냈던 형이 어느날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때 전화가 왔죠. 형이 많이 다쳤으니 병원으로 오라고...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들었어요” 급히 달려간 병원에서 형은 이미 세상을 등진 뒤였다.

형의 죽음을 슬퍼할 새도 없이 부활의 보컬이었던 형을 이어 활동을 하게 된 그는 활동을 하면서도 마음 한 켠의 슬픔은 지우지 못했다. 부활이 흥하던 시절이었음에도 그는 가슴 속 슬픔을 안고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우울증이 온 거 같아요. 슬픔과 분노가 며칠씩 갔어요. 우울한 장소는 가지도 못했어요. 내 안에 있는 슬픔을 다 토해낼까봐...그래서 부활을 떠나기로 했죠.”

부활의 리더였던 김태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났다. 남아 있었다면 비관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붙잡던 김태원의 손을 내려 놓았다. 부활의 울타리를 벗어난 그의 인생은 험난했다.
“옷 장사, 술 장사 안해 본 거 없이 닥치는 대로 살았어요. 덕분에 사기도 많이 당했죠. 90년대 말에 신사동에 포장마차를 냈어요. 돈이 없어서 사채를 끌어다 썼죠. 그때는 하루 일과가 술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소주를 글라스로 한잔 먹고 저녁이 되면 포장마차에서 손님들과 술을 먹었어요. 매일 하루에 10병은 먹었던 거 같아요. 그러다보니 몸이 안 좋아지더라고요. 어제 일도 기억이 안나고, 심지어 노래가사도 잊어버렸죠”
하루하루를 술로 버틴 그는 몸의 이상 신호를 느꼈다. 이듬해 포장마차를 접고 산을 타기 시작했다. 건강을 위해서였다. 자연 속에서 차츰 몸이 회복될 즈음, 기회가 찾아왔다. 한 기획사에서 앨범을 내자고 제안을 한 것.

“작곡가도 유명해서 내심 기대가 컸어요. 재기에 대한 욕심도 있었죠. 열심히 준비했는데...”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앨범 준비 도중 경영악화로 기획사가 문을 닫았다. 실망은 컸지만 그 계기로 다시 한 번 도전의 기회로 삼았다. 데모테잎을 만들고 오디션을 보면서 몇 년 동안 기획사를 노크했지만 결과는 ‘시대가 변했다’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2000년도 이후 R&B 시대라 불릴만큼 소울적 감성의 소몰이 창법이 유행하던 시절 김재희의 록 스타일은 한물간 창법에 불과했다. 또 한 번의 좌절감과 함께 찾아온 우울증, 그는 다시 산으로 갔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그리고 악재의 연속
시대의 걸림돌에 무참히 넘어진 김재희는 세상과의 연을 끊다시피 하면서 산에서만 생활을 했다. “머리와 수염을 깍지 않은 채로 산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주변에서 꼬마 도사가 나왔다는 말이 돌 정도였죠. 그렇게 산에서 살다가 문득 다시 한 번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어요”

다시 한 번 세상과의 조우를 원했던 그는 그렇게 무작정 산에서 내려왔다. 산발이 되어 찾은 곳은 스튜디오였다. 프로필 사진때문이었다. “머리랑 수염을 깍지도 않고 그냥 스튜디오를 찾아갔어요. 그런데 거기서 한 공연기획자를 만나게 됐죠. 제 행색을 보고는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 예수 역을 찾는데 혹시 노래를 할 줄 아느냐고 묻더라구요.

연기도 뮤지컬도 해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고사했어요. 근데 예수 역은 연기나 무대경험보다는 노래의 비중이 크다는 말에 하기로 결심했죠”
말 그대로 우연히 찾아온 기회에 뮤지컬에 입문하게 된 그는 혹평과 호평 속에 무사히 작품을 마쳤다. 뮤지컬을 시작으로 다시 활동을 준비하려 했지만 악재는 그를 놔주지 않았다.

“뮤지컬이 끝나고 앨범 준비를 하려는데 다리를 다쳤어요. 뼈가 부러지고 인대가 심하게 다쳐 1년 이라는 시간을 그냥 보내야 했죠. 실망감은 컸지만 처자식이 있는데 더 이상 좌절은 사치더라고요. 그래서 뭐라도 해야 했죠”

또 한 번 재기에 실패한 그는 생계를 위해 시장에서 옷을 떼어다 팔아 보고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도 불렀다. 하지만 악재의 연속이었다. 그런 그를 반겨준 곳은 산 뿐이었다.

산 그리고 또 한 번의 부활!
“하는 일마다 잘 안되니까 그냥 산이 생각나더라구요. 그래서 산으로 갔어요” 귀소본능에 이끌리듯 산을 찾은 그는 우연한 기회를 만나게 된다. “산에서 예전 부활의 김재희를 알아본 한 팬을 만났어요. 너무 반가웠죠. 근데 그분이 작은 콘서트를 해보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더라고요. 그 분께서 아웃도어 브랜드 관련 일을 하셨는데 소극장 콘서트를 해보자는 거였죠. 노래에 대한 갈망은 항상 있었기 때문에 한다고 했죠. 소극장 공연이라 50명 정도만 오면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콘서트를 시작하자 500여명의 관객들이 찾아왔어요. ‘아직도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구나’라는 생각과 ‘나도 할 수 있겠다’라는 자신감이 생기는 순간이었죠.”

지난해 6월 홍대 상상마당에서 재희락콘서트를 열고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10월, 12월에 앙코르공연을 가졌다. 그 무렵 다시 용기를 얻은 그는 그동안 아껴두었던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17년 만에 처음으로 태원이 형한테 전화를 했어요. 그랬더니 형이 ‘남자의 자격’에 한 번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파티에 초대받아 갔던 곳이 남자의 자격 송년회였어요. 방송이 나간 뒤로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 1위를 하고 평생 나올 기사가 다 나온 거 같았죠.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내가 뭘 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했어요. 요즘 100살까지 사는 시대인데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해야 하잖아요. 노래가 정답이더라고요”

‘return to memories’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인생의 풍파가 짙었던 가수 김재희. 그는 다시 한 번 노래를 위해 세상에 나섰다. 뮤지컬 ‘롤리폴리’에서의 인연으로 가수 장혜진과의 싱글앨범 ‘return to memories’를 세상에 공개하면서 다시 한 번 가수로서의 재기를 꿈꾸고 있다. 김재희 특유의 감성짙은 보이스와 장혜진의 파워풀함이 어우러져 탄생한 이곡은 김재희에겐 특별한 앨범이다.
“(장)혜진 누나에게 참 감사하죠. (제가)처음 제안했을 때 망설임없이 같이 하자고 했어요. 혜진 누나는 진중한 매력이 있어요. 그리고 배울 점이 참 많은 가수예요”

감미로운 피아노선율과 가슴시린 멜로디 라인, 그리고 김재희와 장혜진의 보이스가 어우러진 애절한 발라드인 ‘리턴 투 메모리즈’. 가수 김재희로서의 또 한 번 도약을 만들어 준 이 노래로 그는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사실 소극장 콘서트를 하면서 찾아 주신 팬들께 너무 감사했어요. 그래서 꼭 돌려드리고 싶어요. 제가 자연에서 받았듯이 이 사랑을 돌려줄 수 있게 열심히 활동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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