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4 (일)

  • 맑음동두천 26.0℃
  • 구름많음강릉 28.0℃
  • 구름많음서울 24.5℃
  • 맑음대전 25.8℃
  • 맑음대구 26.1℃
  • 맑음울산 22.5℃
  • 맑음광주 25.0℃
  • 구름조금부산 21.0℃
  • 맑음고창 25.3℃
  • 구름조금제주 18.9℃
  • 구름조금강화 22.5℃
  • 맑음보은 25.4℃
  • 맑음금산 26.8℃
  • 맑음강진군 22.8℃
  • 맑음경주시 28.3℃
  • 맑음거제 21.0℃
기상청 제공

심층


나라를 살린 최형섭의 과학기술 정신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킨 제1공로자를 꼽는다면 제2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서 7년여간 재직한 최형섭 박사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을 없을 것이다. 물론, 최협섭의 능력을 믿고 지금도 그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는 최장수 장관으로 밀어준 박정희 대통령도 최 장관에 못지 않은 공로자이다.

 

최형섭은 훌륭한 연구자이기도 하지만 과학기술의 불모국인 한국을 오늘날 세계적 과학기술 강국의 위치에 오를 수 있도록 그 얼개와 기초를 튼튼히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했다. 국가 전체의 과학기술 발전에서 최형섭만큼 기여할 인물은 없었다. 그가 한 일은 국가의 연구개발 방향을 정하고 한국의 과학기술과 경제 수준에 적절한 연구개발 방법론을 제시하고 강력하게 실행에 옮겼으며 과학기술 인재뿐만 아니라 기능공의 중요성도 인식하고 국가에 필요한 인력을 육성하는 실질적인 제도와 정책을 추진했다.

 

 

최형섭의 연구개발 정신과 철학은 선진국 단계에 이른 오늘날의 한국에서도 여전히 적용해야만 하는 혜안이기에 찬찬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아래 내용은 「최형섭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은 연구소-한국과학기술 여명기 30년」 (조선일보사 간행)을 참고했다.

 

최형섭은 와세다대 채광야금학과를 졸업하고 조선광업 주식회사에 근무하다가 6.25전쟁이 터지자 공군 장교로 입대해 항공수리창을 창설했다. 제대 후 늦은 나이에 미국 유학가서 미네소타 대학에서 금속공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귀국했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와 국산자동차주식회사 부사장으로 들어가 자동차 개발을 몸소 체험했다.

 

그는 당시 서울대 금속학과 졸업생들을 현장의 숙련공 밑에 배속시켜 기본 훈련을 받도록 했다. 그는 국산자동차주식회사에서 회사 이름대로 국산자동차를 만들기로 하고 일본 후지 중공업으로부터 시제품을 인도받기까지 됐으나 회사 사정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결국 최형섭은 원자력연구소로 옮기게 된다. 당시 국내에서 드문 야금 전문가여서 최형섭은 국영기업인 장항제련소의 정상화 방안을 제시해 공장을 궤도에 올려놓았고 대한중석에 대해서는 대학교수와 대학원생들과 팀을 짜서 직접 연구개발을 추진했다. 그는 나중에 포항제철 건설로 이어지는 국가의 종합제철사업 계획을 마련하라는 5.16 혁명정부의 요청에 따라 상공부 광무국장을 잠시 맡기도 했다. 최형섭은 1인 3역을 맡으며 낮에는 원자력연구소와 상공부 일을 하고 밤에는 대한중석 연구실로 출근하는 나날을 보냈다.

 

최 박사는 1961년 9월 대한중속 연구실을 모체로 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재단법인 형태의 금속연료종합연구소를 창립한다. 금속연료종합연구소는 대한중석, 대한석탄공사, 대한철광, 한국제련공사 등 4개 국영 광업기업과 인천 중공업이 출연기관으로 참여했다. 최형섭은 산파역을 하고 난 뒤, 연구소장직은 연공서열을 버리고 젊은 박사들이 맡도록 했다. 기업들이 출연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금속연료종합연구소는 출발부터 산학협동의 계약 연구개발 조직이었다.

 

1964년 말 최 박사는 박 대통령과 총리, 장관들이 참석한 청와대 회의에서 우리나라의 공업화를 위해서는 필요한 기술을 선정해서 소화하여 기업에 적용할 수도 있도록 하 는 매개체, 즉 공업화를 위한 연구소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당시에 원자력연구소와 국방과학연구소가 있었지만 기업이 필요로 하는 연구소는 없는 형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찍부터 기술의 중요성을 알았는데, 이것을 어떻게 경제와 산업에 적용할지를 최 박사의 주장에서 공감하고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1965년 5월 미국 방문에서 존슨 대통령과 한국과학기술 연구소(KIST) 설립을 합의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는 미국의 도움으로 1966년 2월 창립돼 초대소장에 최형섭 박사가 임명됐다. 최 소장은 후진국에서 연구소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원인은 연구소에서 먼저 연구를 한 뒤 사용자를 찾으니 찾을 수 없었다는 데에 있다고 봤다. 그는 연구를 하기 전에 먼저 필요한 과제를 기업들로부터 물색하여 해당의 기업들의 요구에 따라 돈을 받고 같이 연구하는 계약 연구개발방식을 택했다.

 

최 소장의 연구소 운영 방식은 지금 생각해도 탁견이었다. 과학기술의 터전이 전혀 없었던 우리나라 기업들에 필요 한 유일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계약연구개발 방식은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연구 선진국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당시 대부분의 후진국과 개도국들은 학문 위주의 연구소를 지향했다.

 

최 소장은 선진국의 계약방식 연구소들도 각 나라마다 형편과 조건에 따라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가장 좋은 장점을 고르고 우리나라 현실에 맞는 방식을 시도했고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 소장은 해외유치 연구원들을 영입할 때 이들에게 학구적인 연구가 아니라 기업이 원하고 기업이 필요로 하는 연구를 개발하는 것이라는 점을 다짐받고 임용했다.

 

KIST의 운영 방식 중에서 엄격한 연구원가제도는 특기할 가치가 있다. 연구실의 독립채산제 아래 인건비와 재료, 실 험실기기 사용 등 제반 비용을 원가에 산입하는 방식이 었다. 이것은 연구비를 절약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연구원 들은 꼭 필요한 연구기기가 아니라면 대부분 부품을 사서 직접 만들어 썼다. KIST의 모델이자 자문 연구소였던 미국의 바텔 연구소장은 KIST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 는 방식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을 보고 흐뭇했다고 전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시로 KIST를 방문했는데, 최 소장은 대통령의 깊은 관심과 배려만큼 연구원의 사기를 올려주는 것은 없었다고 고백했다. 박 대통령은 설립 후 3년간 한 달에 한두 번씩 연구소에 들렀다고 한다. 박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첨단기술은 강조하면서도 실제로 연구소 현장을 자주 방문하고 연구원들을 격려해 왔는지는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형섭 박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1970년대 중반 KIST는 기업들과 맺은 연구계약고가 2천만 달러가 돼 정부에서 전혀 돈을 받지 않고 운영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KIST의 효과는 우리 기업들이 KIST와의 연구계약 경험을 통해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깨닫고 기업 자체에 연구소를 만들어 연구 개발하는 기운을 조성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KIST를 통해 민간기업의 연구소가 증가하는 현상이 뿌리내리게 됐다.

 

KIST는 개별 기업의 기술 개발에 더불어 정부의 정책안을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작성해 제출했다. 이를 테면, ‘과학기술 장기전망’, ‘장기에너지 수급계획’, ‘전자공업 육성 방안’, ‘중공업 육성방안’, ‘기계공업 근대화방안’, ‘포항종 합제철 건설계획’ 등이다. 이런 방안은 정부 부처의 정책을 입안함에 있어서 과학적 방법론과 최신 지식과 정보를 도입하도록 유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과학계의 연구개발 방식이 정부의 행정 업무에 자연스레 접목된 것이다. KIST 의 각종 보고서는 데이터와 논리에 입각한 정책방법론이 정착되는 계기를 마련해준 셈이다.

 

KIST는 나중에 선박연구소, 기계금속연구소, 해양개발연구소, 화학연구소, 한국개발원, 전자통신연구소 등 수많은 특수 연구소로 분화되어 잇달아 창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KIST의 성공적인 운영 노하우가 그대로 전수됨으로써 우리나라의 연구개발 능력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 어올리는 데에 지대한 공로를 끼쳤다.

 

최형섭 박사는 연구하는 자세에 대해서 모범을 보였다. 그는 연구하는 사람은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연구자는 실장이니 부장이니 하는 직위에 연연 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연구자는 연구 환경이나 연구 기자재를 탓해서는 안 된다고도 말했다. 연구자는 연구 자체가 생활이어야 하며 연구에 종점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형섭 박사는 오늘날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전신인 한국과학원 설립도 주도했다. 1971년 2월에 설립된 한국 과학원은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만든 특수 이공대 학원이다. 한국과학원은 연구 중심 대학원으로서 학생들은 당시로서 대단한 혜택인 병역면제를 받았다. 한국과학 원은 최형섭 박사의 소신으로 소수정예의 입학생을 뽑고 질적으로 우수한 인재를 기르는 방침으로 운영했다. 그는 고급 두뇌는 소수정예주의여야 한다고 평소에 늘 강조했 다.

 

최형섭은 우리나라의 원자력 발전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도 기억된다. 그는 1962년 4월 원자력연구소장직을 맡게 된다. 그는 원자력발전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대통령에게 건의해 동의를 얻어낸다. 그는 과기처 장관 시절, 핵 연료 재처리를 프랑스의 협조를 얻어 강력하게 추진했으나 핵 폭탄 개발을 우려한 미국 측의 제지로 무산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최형섭 장관은 국책 연구기관들이 점차 증가하자 이들을 한 곳에 집중시킬 필요성을 감지하게 된다. 여러 연구소들을 하나의 클러스터에 모을 경우 기기와 시설을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고 연구원들 간의 교류를 통해 종합적인 협동 연구가 가능해지고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 대덕연구단지가 태동한 것은 최 장관의 아이디어였다. 홍릉 연구단지에서 그 효과를 경험한 바 있는 최 장관은 대전 대덕단지에 대규모 과학도시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최 장관은 1973년 연구학원도시 계획을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대통령은 KIST설립 때처럼 관계 장관들의 부정적 견해들을 물리치고 최 장관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장소는 여러 후보지를 검토한 끝에 충남 대덕으로 결정됐다. 최 장관은 대덕연구단지를 조성할 때 최대한 자연 경관을 보존하여 연구동을 공원화했으며, 연구원들의 주거지도 각 연구시설에 인접하게 배치함으로써 연구의 생활화가 가능하도록 건설했다.

 

최형섭 장관이 탁월한 국가 과학 지도자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은 자신이 속한 과학기술자 못지 않게 기능인력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를 대통령에게 제도와 정책으로 건의하고 추진했다는 점이다. 그는 과학기술 발전의 요체는 인력 개발이라고 봤다. 그의 지시로 만든 ‘인력개발 15년 계획’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공업화를 위해 필요한 과학기술 인력이 1986년에는 250만 명인데, 그중 학자는 5%면 충분하고, 현장 기술자와 반장급 기능자는 10-13%가 필요 하고 나머지 80-85%는 각종 기능인력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 당시는 기능자들을 천시하는 경향이 여전했다.

 

오늘날 한국이 조선 강국이 된 데는 훌륭한 연구 인력의 덕분도 있었지만 숨 막히는 여름철 기온에서도 선체에 매 달려 얼음으로 땀을 식히며 일하는 용접공들의 땀이 필요하다. 박 대통령과 최형섭 장관은 국가기술자격법을 만들어 기능자들을 학자와 기술사와 동급으로 우대하는 기능장이라는 제도를 신설했으며 기능자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기능대학을 설립했다. 역시 기능대학 설립과 관련해 당시 문교부에서 극렬 반대 의견이 터져 나왔으나 박 대통령은 최 장관의 주장을 승인했다.

 

오늘날 국회의원이나 고위 관료 등 국가 지도자급 인사들을 국가 전체의 이익보다 자기가 속한 직업의 이익을 지키는 데 더 앞장 쓰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최 장관은 자신의 속한 학집와 연구집단의 이익을 초월해 진정한 국가 지도자로서 모습을 보여준 진정한 애국자였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장관이 되면 부처이기주의에 매몰돼 부처영역 늘리기에 애쓴다. 최형섭 과기처 장관은 과기처에 에너지 및 자원 개발을 이관받으라는 행정개혁위원장의 요청을 거절했다. 최 장관은 과기처가 에너지와 지원 업무까지 맡으면 본래의 업무인 과학기술 업무를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부처의 예산과 인원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부하 직원들은 최 장관이 고집을 꺾고 양보하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반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정부 부처나 기구 등 조직은 업무의 비전과 역할이 분명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 은 부처 영역 다툼을 일삼은 공무원들에게 귀감이 된다.

 

최 장관은 재임 시절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과학재단 설립을 추진했다. 과학재단은 대학의 연구비 지원과 대학원생의 연구장학금을 지원하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최 장관은 장관직에 내려온 뒤 과학재단의 초대 이사장이 된다. 그는 이사장이 되자, 당시 연공서열로 지출되던 연구비 지원 관행을 없앴으며 장학금만 지급되던 대학원생들에게도 연구비를 지원하도록 혁신했다. 그는 우리나라에 벤처캐피털 개념을 최초로 도입해 창업 기업들이 돈이 없 어 좋은 기술이 사장되지 않고 사업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최형섭 장관은 1978년 장관직을 그만뒀지만 한국의 과학 기술 체제의 성공 사례를 개도국에 전파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쓴 「개발도상국의 공업연구」 「개발도상 국의 기술개발전략」 등은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번역돼 개도국들의 정책 참고자료를 널리 활용됐다.

 

최형섭은 연구기관이 제대로 되려면 연구소장이 연구자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연구자의 존경을 받는 연구소장은 우선 학구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연구소의 발전과 운영을 위해 자기 희생을 서슴지 않는 영도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연구자들의 존경을 받고 솔선수범하는 영도력을 가진 연구소장이 있으면 훌륭한 연구원들이 저절로 모이게 되고 이들을 통제가 아니라 동기를 부여하고 공정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지원을 하면 잘 굴러가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연구비와 관련해 ‘돈타령’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을 잘못 쓰면 학문하는 분위기만 흐리게 할 염려가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최형섭이 한 일은 보면 한 사람이 이토록 많은 업적을 낼 수 있을까 하고 경탄하며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2004년에 숨진 최형섭은 과학기술에 끼친 공로로 현충원에 안장됐다.

 

 




HOT클릭 TOP7


배너






배너

사회

더보기
“먹어도 된다 들었는데…” 초코파이 먹은 화물차 기사, 벌금 5만원
전북 완주의 한 물류회사 사무실 냉장고에서 간식을 꺼내 먹은 40대 화물차 기사가 법정에서 절도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전주지방법원 형사6단독(재판장 김현지)은 절도 혐의로 기소된 A씨(41세)에게 벌금 5만원을 선고했다고 4일 밝혔다. A씨는 2024년 1월 18일 오전 4시 6분경, 해당 회사의 사무공간 내 냉장고에서 초코파이(400원)와 과자(600원)를 꺼내 먹은 혐의로 기소됐다. 당초 A씨는 약식명령을 받았으나 이에 불복, 무죄를 주장하며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재판에서 A씨는 “동료 기사들로부터 냉장고 간식을 먹어도 된다는 말을 듣고 행동한 것”이라며 고의성이 없음을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사무공간은 기사 대기 구역과 엄격히 구분돼 있고, 해당 냉장고는 일반 기사들이 출입하지 않는 사무실 가장 안쪽에 위치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간식 제공 시에는 사무직원이 직접 건넸으며, 허락 없이 가져간 사례는 없다는 것이 직원들의 일관된 진술”이라고 판단 근거를 밝혔다. 또한 “기사들끼리 들은 말에만 의존해 사무실 안 냉장고에서 물품을 꺼내는 행위는 물건의 소유 및 처분 권한을 무시한 것으로 절도죄에 해당한다”고 덧붙였다. 재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