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우리나라 보험산업은 성장을 거듭해 수입보험료 기준 전세계 8위에 오를 정도로 시장규모가 성장했지만 금융소비자들의 신뢰수준은 여전히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보험금의 과소산정․ 지급에 있어서 소비자의 불만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소비자 불만은 국내 손해사정사제도의 문제와 직결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험계약자에게 손해를 발생시키고 국내 보험산업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손해사정사제도에 대해 알아본다.
보험사와 손잡은 손해사정사, 피해 입는 소비자
지난 3월에 방송된 MBC ‘불만제로 UP’에서는 손해사정사로 일한 경험자 A씨가 나와 보험사의 은밀한 내부규율을 폭로했다. A씨의 말에 의하면 손해사정사가 고객들이 받아야 할 보험금을 삭감할 경우 손해사정사에 인센티브가 주어진다고 말했다. 보험사와 손해사정사의 이익을 위해 소비자가 피해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손해사정사 제도를 개선해야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손해사정사가 하는 일이 무언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손해사정사’란 금융감독원에서 지도 감독하는 자격으로 보험사고의 손해액 및 보험금을 사정 및 보상하는 직무를 수행하고 보험사고 발생 시 그 손해액을 평가하는 일을 하는 보험관련 관리자를 뜻한다.
즉 사고나 재해 발생 시 손해액과 보상금액을 산정하는 전문가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손해사정사가 하는 일이 상당히 의미 있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나라 의 대부분의 손해사정사는 보험사 소속이거나 위탁계약 형태로 운영되고 있어 보험사고 시 손해액과 보상금 산정에 있어 보험사손을 들어주고 있다. 즉,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보험사와 손해사정사가 한편이 되어 소비자들이 가져가야 할 보상액을 자기들의 주머니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손해사정사의 70%가 보험사에서 월급을 받고 있다. 손해사정사 제도는 1977년 보험업법 개정을 통해 보험사고로 생긴 손해액을 독립적인 전문가로 하여금 신속하고 공정하게 조사해 결정토록 함으로써 보험사와 소비자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을 사전에 억제하는 등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됐다.
그러나 실질적인 구조에서는 모순점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손해사정사가 보험사에 소속되거나 보험사로부터 업무를 위탁받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국내 손해사정사는 보험사에 고용된 고용손해사정사, 보험사로부터 위탁받은 업무를 수행하는 위탁손해사정사, 독립적인 법인 및 개인사무소를 운영하며 피보험자나 피해자로부터 수임 받는 독립손해사정사 등으로 나뉜다.
5월 21일 금융감독원 및 보험업계 등에 따르면 작년 말 현재 손해사정사로 등록된 인원은 7,809명이다. 이중 보험사 소속은 3,120명으로 절반 수준을 차지했다. 또 별도 손해사정업체로 등록된 회사에 소속돼 보험사와 업무 위탁 관계에 있는 인원은 2,350명으로, 전체 손해사정사의 70% 이상이 보험사와 ‘의미 있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입법조사처 김정주 조사관은 “손해사정사 상당수가 보험사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고용 또는 위탁 손해사정사”라며 “소비자들이 손해사정사가 보험계약자보다는 보험사 편이라고 생각해 신뢰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금감원도 이미 보험사의 손해사정 자회사 일감 몰아주기, 불공정 계약 등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실제 지난해 보험 민원 분쟁의 1/3 이상은 보험금 지급과 관련이 높았다. 보험금 지급과 관련된 민원 건수 및 비중은 2010년 1만3,017건(32.3%)에서 2011년 1만5,394건(37.7%)로 늘었고, 2012년에는 1만8,743건(38.7%)로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손해사정사회 김영호 회장은 “민원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민원 증가에도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보험사들이 표준화 된 손해사정기준의 마련을 통해 손해사정결과의 객관성을 높여 보험사들이 손해사정서를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또한 보험사들이 손해사정결과를 반드시 수용토록 법적으로 강제할 필요가 있다. 보험사의 자기손해사정을 금지해야 이처럼 손해사정사 제도가 도입 취지와 달리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손해사정사가 자신과 이해관계를 가진 자의 보험사고에 대해 손해사정을 하는 ‘자기손해사정행위’를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보험업법 제189조는 자기손해사정행위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다만 동법 시행령 99조는 단서를 달아 보험사가 고용한 손해사정사를 통해 자기손해사정을 할 수 있는 통로는 열어 놨다. 고용 또는 위탁 손해사정사가 보험사의 입장에서 손해사정을 할 수밖에 없는 요인을 보험업법이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김정주 조사관은 “보험업법 시행령 제99조의 단서를 삭제하고 보험업법 내 자기손해사정 금지와 관련한 규정들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며 “이와 함께 보험사가 고용 또는 위탁 손해사정사의 업무 독립성을 침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금융당국이 면밀히 감시하고 감독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금감원은 2008년부터 ‘보험금 지급업무에 관한 모범규준’을 통해 보험사로 하여금 보험금 청구를 받은 시점에 보험계약자에게 제3의 손해사정사에게 보험금 책정 등의 업무를 위탁할 수 있음을 고지토록 하고 있다.
그러나 관련 규준의 강제력이 없어 보험사들은 이를 고지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소비자들에게 보험사 소속이나 위탁 손해사정사가 아닌 제3의 손해사정사를 선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험사로 하여금 고지토록 강제해, 자기손해사정행위를 금지시킬 필요가 있다. 보험사가 보험금 결정권과 지급권을 모두 가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소비자가 선임한 제3의 손해사정사가 작성한 손해사정서의 실질적인 효력을 보험사들이 수용토록 강제화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또한 표준화된 손해사정기준이 존재하지 않아 손해사정사에 따라 사정결과의 편차가 심하고 그로 인해 보험사가 손해사정사들의 사정결과를 믿고 수용하지 못하는 것 역시 문제다. 손해사정사들의 보수가 체계화돼 있지 않아 규모가 영세한 독립손해사정사들이 보험계약자들과 결탁해 과도한 보험금을 요구하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손해사정사의 보수체계 정비가 필요한 이유다.
현재 독립손해사정사들은 보험계약자가 보험사로부터 받은 보험금의 일정비율(통상10%)을 보수로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보수체계가 보험계약자와 손해사정사들이 결탁할 수 있는 요인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보수체계를 정액화하고 보험계약자와 손해사정사가 과도한 보수계약을 임의로 체결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제가 필요한 상황이다.
지나친 자격 세분화․ 변호사법과 충돌
지난 1월에 개정된 보험업법 시행규칙은 손사제도를 개선해 4종(재물, 신체, 차량, 종합)으로 구분케 했으나 기존의 7종 자격도 유지하면서 현재 손해사정사 자격은 총 11종이다. 이로 인해 업무상 충돌,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사고로 인한 상해사고는 3종대인과 4종, 신체손해사정사가 겹치면서 업무중복이 발생하며, 자동차사고로 인해 화재가 날 경우 3종대물과 1종, 재물손해사정사의 업무가 중복된다. 이런 경우 소비자는 손해사정사 업무영역을 분별하기 어려워지고 1건의 사고에 여러 손해사정사가 업무를 진행하다가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소비자가 그 비용을 부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손해사정사업계 한 관계자는 “11종으로 나눠진 자격을 단일화해야 한다”며 “모든 업무를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하되, 본인의 전문성과 능력에 따라 특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손해사정업무 중 발생하는 분쟁과 화해와 관련해 변호사법 위반여부 분쟁이 발생하기도 한다. 변호사법에서는 변호사 아닌 자가 금품을 목적으로 타인의 법률사건에 관해 중재, 화해, 법률관계 문서작성 기타 법률사무를 취급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행정사, 공인노무사, 세무사는 관련법에 중재, 화해 등의 이행행위를 업무범위에 포함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보험업법에는 이 같은 내용이 없기 때문에 분쟁이 발생한다. 이 관계자는 “손해사정사에게도 신고·신청·진술·청구·서류작성 및 권리구제 대행 또는 대리, 화해·중재·조정 등의 부수업무를 무보수로 할 수 있도록 법제도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손해사정사제도가 우리나라에서 시행된 지는 올해로 37년째이다. 그러나 제도만 오래됐지 고객이 이 제도를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그동안 양적 성장만 해왔던 보험업계가 소비자 신뢰를 얻기 위한 적극적인 행보를 시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MeCONOMY June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