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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2월 18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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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차기 학습 지도 요령에 나타난 ‘Feasibility’ 선언

덧셈의 교육에서 여백의 교육으로

 

◇교육적 이상과 현실적 한계 사이의 정직한 성찰

 

2025년 9월 19일, 일본 문부과학성 중앙교육심의회가 발표한 국가 교육과정의 차기 학습지도요령 논점 정리(안)는 일본 공교육이 지난 수십 년간 추구해 온 ‘질적 향상’ 담론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문서로 평가받고 있다.

 

이 논점 정리는 새로운 교육 목표를 제시하기에 앞서, 그동안 일본의 교육개혁이 누적시켜 온 구조적 피로(structural fatigue)를 정책 문서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일본 교육은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주입식 교육에서 탈피해 학생들의 학업 부담을 줄이고 창의력과 인성을 기르고자 이른바 ‘유토리(여유)’ 교육정책을 도 입하였다. 이름처럼 학습 내용을 감축하고 주 5일제 수업 등을 도입했으나, 결과적으로 학력 저하 논란이 발생하여 실패한 정책이라는 평가도 받아왔다.

 

이후 ‘탈(脫) 유토리’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기초 학력의 확실한 정착과 미래 사회에 대비한 역량 교육을 동시에 달성하고자 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는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는 전혀 다른 신호 들이 포착됐다. 교사의 번 아웃과 장시간 노동, 그리고 부등교 학생 수의 급증은 더 이상 개별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위기의 징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깊이 있는 배움’을 가능하게 하는 세 축의 재배열

 

이러한 맥락 속에서 아래 그림은 일본 차기 학습지도요령 (국가 교육과정) 개정 논의의 기본 관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중앙에 배치된 핵심 문구는 “다양한 아이들의 ‘깊이 있는 배움’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는 이번 개정이 특정 학생 집단이나 수월성을 위한 교육과정이 아니라, 모든 아이가 각자의 조건 속에서 깊이 있는 학습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 설계를 목표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 중심 목표를 둘러싸고 세 개의 축이 삼각 구조로 배 치되어 있는데, 각각 Excellence(깊이 있는 배움의 실현), Equity(다양성의 포용), Feasibility(실현 가능성의 확보)를 의미한다. 주목할 점은 이 세 요소가 병렬적으로 나열된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학생이 평생에 걸쳐 주체적으로 배우고, 다양한 타자와 협력하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 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한 민주적이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시민적 역량의 형성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Excellence는 단순한 학업 성취의 고도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깊이 있는 배움은 2017년 개정 교육과정에서 제시된 액티브러닝적 방향, 즉 ‘주체적·대화적·깊이 있는 배움’ 이라는 세 요소 가운데서, 특히 ‘깊이’의 차원을 재 강조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학습 방식의 활성화 자체보다, 그러한 활동이 학습자의 이해를 어떻게 구조화하고 삶과 사회에 어떤 의미를 남기는가에 정책적 초점을 이동시킨 결과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활동의 ‘형태’가 아니라 배움의 ‘질’을 교육과정 개정의 중심에 놓겠다는 선언이 다. Equity는 이러한 깊이 있는 배움이 일부 학생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담고 있다. 학습 속도, 언어 환경, 장애 유무, 가정 배경 등 아이들의 조건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전제로, 교육과정은 획일적 기준이 아니라 유연한 접근과 조정 가능성을 내장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이 축은 ‘동일한 교육’이 아니라 ‘동등한 도달 가능성’을 지향하는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 개정 논의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화로 읽히는 것이 바로 Feasibility다. 그림에서 실현 가능성이 별도의 축으로 명시된 것은 “아무리 고결한 교육적 목표라 하더라도, 현장의 물리적 시간과 교사의 수용 능력을 초과하는 순간 그것은 정책이 아니라 이상에 불과하다”는 현실적 반성에서 출발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즉, 차기 개정안의 본질은 “무엇을 더 가르칠 것인가”라는 확장의 논리에서 벗 어나 “어떻게 교육 체제를 지속 가능하게 재구조화할 것인가”라는 공교육의 생존 전략을 제도적으로 공식화한 데 있다. 이는 교육개혁을 ‘더하는 기술’이 아니라, 무엇을 덜어내고 재배치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으로 전환시키는 시도라 볼 수 있다.

 

◇초·중학교의 혁신: ‘조정수업시수제도’가 창출하는 여백

 

지금까지 일본의 초·중학교는 국가가 정한 ‘표준 수업 시 수’를 엄격히 준수해야 하는 경직된 제도 아래 운영되어 왔다. 이러한 체제는 전국적인 교육 수준의 균질화를 보장하는 장점이 있었지만, 동시에 교사에게는 끊임없는 진도 압박을, 학생에게는 수업을 ‘따라가야 할 과제’로 인식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족쇄로 작동해 왔다.

 

이 구조를 근본에서 흔드는 장치가 바로 ‘조정수업시수제도(調整授業 時数制度)’다. 이 제도는 학교가 연간 표준 수업 시수의 약 10% 범위를 자율적으로 감축하고, 이를 ‘재량적인 시간 (Margin)’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제도가 단순한 시수 감축이나 규제 완화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확보된 이 ‘여백’은 학습 결손이 있는 학생을 위한 개별 맞 춤형 지도, 지역 사회의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한 심화 탐구, 프로젝트형 학습, 그리고 교사들이 수업의 질을 높이기 위해 공동으로 연구하고 성찰하는 시간으로 재배치된다.

 

다시 말해, 여백은 교육 활동의 공백이 아니라, 기존의 획일적 시간 구조 속에서는 불가능했던 질적 심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차기 개정안의 방향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여백이 없으면 깊이도 없다”는 표현은 단순한 수사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교육의 질을 교사의 헌신이나 추가 노동에 의존하지 않고, 제도적으로 확보된 시간 위에서 실현하겠다는 정책적 선언이다. 교육의 혁신을 ‘더 열심히 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가능한 구조를 먼저 만들겠다’ 는 방식으로 전환한 점에서 이 제도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고등학교 단위제의 유연화: ‘이수 면제’와 학교 밖 배움의 통합적 설계

 

이러한 일본 정부의 방향성은 고등학교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등학교 단계에서의 개혁은 초·중학교보다 한층 더 과감한 자율성을 지향한다. 논점 정리는 고등학교 교육을 더 이상 ‘학교라는 물리적 공간’에 가두지 않고, 사회 전체를 하나의 배움의 네트워크로 확장하는 것을 명확히 목표로 삼고 있다. 그 핵심 장치가 바로 ‘단위제 유연화’와 ‘이수 면제(Credit Waiver)’ 제도다.

 

이 제도는 학생이 입학 전이나 학교 외부의 학습 경험을 통해 특정 과목의 목표를 이미 달성했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경우, 해당 과목의 수강을 면제하고 그 시간을 상위 수준의 심화 학습, 대학 강의, 기업 인턴십, 사회 연계 프로젝트 등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단순히 ‘선행 학습을 인정해 주겠다’는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학습의 경로가 학교 안에서만 형성된다는 전제를 해체하고, 학교 밖 배움을 정식 교육과정의 일부로 통합하려는 구조적 전환이다.

 

더 나아가 필수 과목의 핵심 내용을 학교가 자체적으로 설계한 ‘특성화 탐구 과목’ 속에 통합하여 운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학생들은 입시를 위한 중복 학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로와 관심에 맞춘 커리큘럼을 실질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토대를 갖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고등학교를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내용을 제공하는 공간’에서 학습 경로를 조정·연결하는 허브로 재정의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한·일 교육과정의 비교 분석: ‘제도적 인프라’와 ‘구조적 탄력성’의 차이

 

유사한 인구 절벽과 디지털 전환이라는 과제를 공유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교육과정 개혁은 접근 방식에서 흥미로운 대조를 보인다. 한국의 ‘2022 개정 교육과정’이 고교 학점제라는 강력한 제도적 틀을 중심으로 학생의 과목 선택권을 확대하는 방향이었다면, 일본의 ‘차기 개정안’은 운용의 탄력성과 현장의 지속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래 표는 한국과 일본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핵심 개정 내용을 비교한 것이다. 한국이 학생 자율성에 초점을 둔 ‘과목 선택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데 중심을 두었다면, 일본은 배움의 ‘인정 범위’를 학교 밖으로 확장함으로써 교육과정의 밀도를 낮추는 방식을 택했다고 생각한다.

 

이 비교는 어느 쪽이 더 우월한지를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국이 공교육의 지속 가능성이라는 동일한 표준 수업 시수 자체의 유연화 과제에 대해 서로 다른 경로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지능적인 여백’의 설계

 

일본의 2026년 교육개혁은 우리에게 하나의 단순하지만 무거운 명제를 던진다. 좋은 교육은 지속 가능한 구조 위에 존재한다. 우리는 그동안 미래 역량이라는 이름 아래, 교육 현장에 새로운 과업을 끊임없이 덧붙이는(Add-on) 방식의 개혁만을 반복해 온 것은 아닐까. 일본이 제시한 Feasibility(실현 가능성)는 정책이 갖춰야 할 가장 용기 있는 덕목이다.

 

교사가 진도 압박에 시달리고, 아이들이 정 답만을 쫓는 교실에서는 ‘깊은 배움’도 ‘다양성’도 뿌리내리기 어렵다. 일본이 설계하기 시작한 ‘여백’은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교사가 아이의 눈을 맞출 수 있는 시간이며, 아이들이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지능적인 여유다. 이제 우리 교육 역시 “무엇을 더 가르칠 것인가”라는 유혹을 내려놓고, 공교육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무엇을 과감히 덜어낼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글 현재균 교육학박사(쓰쿠바대학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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