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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 후에도 '국가 봉사'를 천직으로 일합니다"

황춘자 전 여군 대위(사회적기업 다트그룹 대표)

올해는 대한민국 여군 창설 65주년을 맞는 해다. 현재 우리나라 육해공군에는 9천7백여 명의 여군이 복무하고 있다. 올해 안에 여군 1만 명 시대를 열 것으로 보인다. 우리 여군은 군내에서 전투부대 지휘관뿐만 아니라, 해군 고속정 정장, 해상 초계기 조종사 등을 배출하며 남군과 똑같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여군들은 전역 후 사회에 진출하고 나서도 투철한 국가관으로 사회 곳곳에서 모범을 보이고 있다. 여군 1만 명 시대에 후배 여군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는 여군 출신 한 명을 만나봤다. 여군 대위로 복무하다가 공기업 중역을 마치고 지금은 사회적 기업을 경영하며 사회 공헌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황춘자 다트 디자인그룹 대표를 만났다.


Q. 한창 젊은 시절을 군에서 보낸 만큼 추억에 남아있는 게 많이 있을 걸로 생각됩니다. 어떤 게 떠오르는지요.


A. 최근 우리 군의 대북 확성기 방송을 계기로 북한과의 대화에 모처럼 물꼬가 터지지 않았습니까. 대북방송으로 인해 오랜만에 남북 이산가족도 만날 수 있게 됐고요.(웃음) 제가 대북방송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소속은 육군 정보참모부 방송장교였습니다. 이번에 대북 확성기 방송의 효과를 톡톡히 본 것으로 여겨집니다. 북한은 정보가 폐쇄되어 있습니다. 최전선에 있는 북한 병사들은 오로지 들을 거라곤 그것뿐입니다. 메신저가 제한되어 있어서 대북방송이 먹혀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전단지를 뿌리는 것에 대해 북한이 난리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Q. 당시에 그 방송이 어느 정도 멀리까지 들리는 겁니까?

A. 지금과 마찬가지로 전방초소에서 방송했는데요. 거기서 5km이상입니다. 대한민국 체제의 우월성을 구체적으로 방송하는 내용이었습니다. PD도 있고 작가, 아나운서도 있고 완전 방송국입니다. 최전방 초소에 가서 방송을 했습니다. 뉴스도 전하고 노래도 들려주곤 했습니다.


Q. 대북심리전 소대에 어떻게 가게 됐습니까.

A. 대북심리전 소대장 보직을 받고 갔습니다. 그 전에는 여군단 본부 중대장을 했습니다. 계급은 소위였습니다. 제가 방송과에 간지 얼마 안 돼 갑자기 북에서 대남 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쪽에서 대응 차원으로 대북방송을 시작한 겁니다.


Q. 그때가 몇 년도 인가요?

A. 1980년에서 81년도입니다. 휴전선 전 사단에 3명씩 여군 방송요원 39명을 지휘하는 소대장을 한 것이지요. 이 부대는 전투부대입니다. 남북 간은 현재도 휴전상태이잖아요. 심리전은 전투입니다. 그 당시에는 전방 사단에 있는 소대원들 봉급을 타가지고 전해주고 오면 한 달이 걸렸습니다. 007가방에 봉급을 넣고 전투복 갈아입을 것 하고 속옷을 넣어서 동쪽에 있는 3군 사령부부터 지프차로 다 돌고 했습니다. 서쪽 1군 사령부 관할까지 돌면 한 달이 걸렸습니다.


옛날에 한계령 이런 곳이 비포장 도로라 거기를 돌고 오면 완전히 먼지로 뒤범벅이 됩니다. 저녁에 소대에 들어가서 먼지로 찌든 걸 빨고 다려서 다음 날 입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부하들을 위해 가다가 식당 같은 데 가서(전방에는 시장도 없었지요) 삼겹살, 상추, 고추장을 사서 야전 숙소에서 같이 먹고 그랬습니다. 심리전처 방송과에서는 원고를 읽고 띄어쓰기 발음, 원고 작성법을 가르쳤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녹음하고 들어보고 교정하는 실습을 했습니다. 방송할 만하다고 하면 전방으로 갑니다. 1주 내지 2주 교육을 시킨 걸로 기억됩니다. 여군은 저의 소대 소속이었지만 남군과 역할이 같았습니다.



Q. 그 심리전 소대장으로 얼마나 계셨습니까?
A. 2년 남짓 했습니다. 제가 하는 임무는 요원들을 뽑아서 육성을 시키는 거였습니다. 남자는 제가 안고르고 옵니다. 여군은 저희가 직접 뽑아서 양성해서 명령을 받아서 가게 됩니다. 요원들이 전역하면 또 뽑아서 훈련시켰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커지고 장기적으로 되니까 1군 사령부 소대장을 하나 뽑고 3군 사령부 소대장을 하나 뽑았습니다. 저는 중앙에 있었습니다. 중앙에서는 지침만 내리고 요원 양성만 했습니다. 작가들 중에는 귀순용사도 있었습니다. 귀순용사들 교화 기간이 끝나면 글을 쓰도록 해서 그 원고로 방송했습니다. 북한에 대해 정통해야 하지 않습니까. 탈북주민들이 전해준 정보도 많이 이용했습니다.


Q. 이번 대북방송을 시작했을 때 일부에서는 그 효과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까?

A. 제가 대북심리전 부대 출신이라고 해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저는 지난 번 정부에서 대북방송을 한다고 했을 때 분명히 북한에 타격을 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세계 2차 대전사를 보더라도 심리전 방송의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폐쇄적이고 부자에 이어 손자까지 3대가 세습하는 독재정권에 대해 우리 국민은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게 북한의 잘못된 점을 북한 주민과 병사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봅니다. 대북방송은 중단됐지만 북한 체제의 부당함을 알리는 데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Q. 당시에는 여군의 숫자가 매우 적었죠. 전방에는 더 했을 것 같습니다.

A. 그때 소위 달고 중위 달고 돌아다니는데 전방에 여자가 얼마나 드뭅니까. 우리 동기가 13명에 불과할 정도로 당시에 여군 장교는 희소했습니다. 제가 전방에 나타나면 완전 희귀한 존재였지요. 전방을 돌다가 기름이 떨어지면 아무 부대에서나 기름을 다 채워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면 사단장님과 방에서 이야기도 하고 대우도 잘 받았지요. (웃음) 지금은 여군들이 전방이나 어디든 다 근무하지만 우리 때는 거의 없었습니다. 나는 비전투 행정업무만 하다가 대북심리전의 전투병으로 투입된 거라 굉장히 긴장된 상황에서 살았습니다.


숙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화장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전방 비포장도로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요. 전방 고개들마다 낭떠러지가 많았습니다. 가다가 차가 고장 나면 운전병하고 둘이 낑낑 대면서 시동 걸어서 가기도 하고 정말 힘들었습니다. 눈썹에 먼지가 쌓였죠. 여성이면서도 제가 살아온 길이 여성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없고 해본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여성이기 때문에 살아나려면 200% 이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군 생활을 했습니다. 저는 학교 졸업 후 바로 군에서 세상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조직원을 가지고 있는 장으로서 부하에 대한 책임, 솔선수범, 의무감 이런 것들로 똘똘 뭉쳐 살았습니다.


Q. 처음부터 여군 장교로 들어갔습니까?


A. 제가 1953년생입니다. 우리나라가 1945년 해방되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고 1953년에 휴전됐지 않습니까. 제가 휴전둥이인 셈입니다. 6.25때 참상을 부모님에게 들었습니다. 죽창으로 사람을 찌르고 했던 그런 잔혹성을 부모님에게 듣고 자랐습니다. ‘국가에 체제가 있고 치안이 있는 게 최고의 복’이라고 배웠습니다. 저희집은 형제가 많았습니다. 그 당시는 시골에서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12명이 들어가서 3명이 졸업을 할까 말까 했습니다.


나머지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다니고 한글 배우면 관두라고 할 때입니다. 아버님이 초등학교 초대 이사장님이라 학교를 잘 졸업하고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는데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대학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저는 10남매 중 6번째였습니다. 오빠의 큰 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인데 집안에 밥 해주고 살림 해 줄 사람이 없어서 제가 대신 오빠 집에 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8개월 동안 오빠 집안 살이를 도와주고 있었죠. 올케는 직장 전근으로 다른 곳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오빠 사무실에 갔다가 심부름을 마치고 집에 오는 도중에 여군 모병 포스터를 봤습니다. 그 안내 포스터에 ‘해외 유학 특전’이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그것에 완전히 동해서 다음날 바로 시험을 보러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여군시험을 보고 나서 퇴근한 오빠한테 ‘여군에 입대하겠다’고 했습니다. 오빠가 별로 말수가 없으신데 집안에 형제가 10명이나 되니까 맏이는 꼭 아버지 같은 분이셨죠. 오빠가 왜 가려고 하냐고 해서 ‘가서 공부하겠다’고 했습니다. 오빠가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서 그 다음날 바로 서울로 올라갔죠. 그게 75년 8월27일입니다.


Q. 여군 하사관으로 시작한 거죠.


A. 그렇습니다. 여군 하사관 22기입니다. 용산 여군훈련소에 입소했습니다. 동기가 40여명입니다. 굉장히 적었죠. 1년에 서너 기를 뽑았습니다. 훈련기간은 22주였습니다. 첫 배치는 광주 전투병과 사령부였습니다. 거기에서 옛날 교범을 새로이 고치고 외국 교범을 번역해서 우리 것으로 만들고 신 교범을 만들고 했습니다. 거기 근무하시는 분들은 외국 유학을 다녀 온 엘리트들이었습니다. 미국이나 독일에 유학을 갔다 온 분들이라 기본적으로 영어를 잘했습니다.


사병들도 영문과를 나와 통번역이 가능한 사람들이 왔습니다. 거기서 저는 타자를 쳤습니다. 고등학교 때 영어 만점을 받을 정도로 영어는 잘한 편이었는데, 그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손가락이 부러질 정도로 타자를 쳤던 것 같습니다. 주말에 외출도 안 나가니까 대장님이 어느 날 대학교를 가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예비고사를 봐야 했는데 이미 접수 기간이 지나버려서 전문대에 갔습니다. 야간 전문대학교 시험을 봤는데 합격한 것이죠.


Q. 학교와 전공은 뭐였습니까?

A. 광주 동신 전문대학교 환경공학과입니다. 당시 교수님이 굉장히 엄격하고 미래에 환경관련 과목이 많은 인기를 끌 거라고 해서 그 과를 택했습니다. 2학년 학기 말 때 대장님께서 현역에 있을 때는 초급 대학 이상만 나오면 장교 시험을 볼 수 있는 응시자격을 준다며 저보고 장교시험을 한 번 봐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봤는데 합격을 해서 다시 여군 훈련소로 갔습니다. 이번엔 여군 사관후보생 27기로 13명 중 한명으로 뽑혔습니다. 제 나이 27세였습니다. 자격이 27세까지였으니 막차를 탄거죠. 거기서 교육받고 소위 임관해서 맨 처음 받은 보직이 여군단 본부 중대장이었습니다. 본부 중대장하고 정보참모도 하고 작전참모도 했습니다.

Q. 전역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A. 제가 전역할 때는 내부 조직이 폐쇄적이었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였으니까 꿈을 펼치고 싶었죠. 여군 간부가 얼마 안 되는 소수 집단이다 보니 내부 차별도 좀 있었습니다. 조직원에 대한 큰 비전이 없다 랄까요. 그때는 학사 장교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저는 공부에 대한 미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교들이 학사 장교로 편입할 수 있는 길이 있어서 신청을 했는데도 그 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이 조직은 좀 힘들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판단을 잘 했던 것 같습니다.


Q. 입대했을 때가 20대 중반이었다면 좀 늦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A. 학교를 늦게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언니가 있고 제가 있고 남동생이 내리 있어서 젖을 제대로 못 먹어서 성장 발육 부진이었죠. 보통 8살에 가야 하는데 9살, 10살에 학교를 갔습니다. 또 초등학교 졸업하고 남동생하고 연년생인데 남동생만 먼저 중학교를 보내주고 나는 안 보내줘서 또 일 년 늦었어요. 그래서 내 동창들에 비해서 3년이 늦어요. 제가 56년생 하고 학교나 사회 생활리듬이 같아요. 그리고 전역은 서른 살인 83년도에 했습니다.


Q. 군 생활을 통해서 어떤 것을 얻었나요?
A. 제 성격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죠. 국가관, 공적 가치관, 리더십, 어려움과 역경을 이겨내는 투지, 열정을 나열할 수 있겠군요. 저는 제 시간, 제 돈을 저를 위해 쓰는 게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의 영향도 컸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유학자, 선비 같은 그런 분이셨어요. 항상 공부하고 책을 보고. 엄마는 미래를 늘 준비하는 진취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봄이 되면 가을을 생각하고 여름이면 겨울을 생각하고 겨울이 되면 내년을 생각하고. 항상 우리를 앉혀 놓고 그런 얘기를 해 주셨어요.


그 당시에는 해방된 지 얼마 안 돼서 먹고 살기가 어려웠잖아요. 길 폭이 50센티이면 그 길을 20~30센티를 깎아서 곡물을 심었던 시절이었죠. 식구도 참 많았고요. 중학교를 왕복 16km를 걸어 다녔어요. 남동생은 먼저 중학교에 진학해서 자전거를 탔어요. 저는 자라면서도 보이지 않는 남녀 불평등을 경험했고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때였죠. 아버지가 저희를 학교로 보낸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희귀한 일이었죠. 학교에 다니면서 정신없이 공부했어요. 동생보다 늦게 1년 꿇고 학교에 가서 항상 공부가 고팠으니까요.


Q. 만약 여군에 지원하지 않았으면 그 시골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을 것 같네요.
A. 아까 말씀드린 대로 부모님은 항상 미래를 설계하고 내일을 계획하고 선구자적 지식을 탐구하는 분들이였어요. 아버지가 유일하게 우리 동네에서 신문을 볼 정도였어요. 50년대에 비가 오나 눈이오나 신문배달부가 왔어요. 월간조선을 봤어요. 그 옛날에. 60년대에... 아버지는 자식들을 다 가르치셨고 일할 때 같이 일하고 쉴 때 같이 쉬고 했어요. 방학 때 자식들이 모이면 아버지가 안방에 바둑판 두세 개를 놓고 바둑을 가르치셨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인데 60갑자를 단숨에 외우라고도 하셨어요.


 제가 전후 세대였으니까 어려웠잖아요. 그래서 귀천을 따지기 보다는 주워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선택의 여지도 없었고요, 지금 같으면 알바도 있고 노력한 만큼 뭐든지 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에 제가 그 시골에서, 형제가 10남매가 되는 집안에서 여군을 안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본 적이 가끔 있어요. 아마 공장에 들어가거나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을 것 같습니다.(웃음) 여군생활은 저의 인생에서 큰 전환이었고 발전의 도약대가 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Q. 전역 후 서울지하철 공사로 바로 오셨나요?

A. 원래는 전역 직전에 여성 해외무관 파견 선발시험이 있었어요. 청와대에서 해외 개발 공사에 위탁을 줘서 할 땐데 거기 합격을 해서 유학 갈 꿈에 부풀어 있었어요. 꿈이 실현되는 구나. 대한민국 최고라는 자부심도 있었어요. 시험 볼 때 8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영어 회화가 가능하고, 해외파견이 가능하고, 운전 할 줄 알고, 미혼이고 신장 160이상일 것, 사상 건전할 것, 운동 유단자 이상이고 등등 조건들이 다 맞아서 통과됐어요. 임무는 외국 대통령 자녀 경호였어요. 연봉 2만 불에 2년 연장 계약 가능하고 1년에 1개월 휴가를 주고 집도 주고 차도 주는 거였죠. 발령지는 파리였어요. 정말 제가 원하는 이상적인 거였는데 취소된 겁니다.


계획이 취소되고 놀고 있던 차에 재향군인회 복지부장으로 있던 전역한 여 군단장님이 불렀어요. 그때 서울메트로가 3,4호선을 개통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채용 할 때였어요. ‘황 대위 뭐해 나 좀 따라가자’ 해서 ‘네~’하고 따라갔더니 사장님과 아시는 사이셨어요. ‘놀면 뭐하냐. 이력서 내라’고 해서. 그게 계기가 돼서 경력직 평사원으로 들어갔어요. 그 당시 제 경력이면 사실 저평가 된 거죠.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1급 달고 나중에 본부장 응모해서 본부장 마치고 1급 달았을 때는 공부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경희사이버대학 행정학과에 편입했습니다. 교수를 만났는데 당신 경력으로 조기졸업이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1년 반 만에 조기 졸업을 했어요. 1년 반 만에 졸업을 하고 나니까 공부를 더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연세대 행정대학원에 1호 접수를 해서 됐어요.


특수 대학원인지 모르고 갔었죠. 결석을 하루 밖에 안 했어요. 졸업할 때 최우수 논문상을 받았고 장학금도 받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시험을 봤는데 저는 논문으로 했죠. 석사를 한 뒤에 경희대 일반 대학원 행정학과 박사 신청을 했어요. 시험도 보고 면접을 5명이랑 1시간 동안 해서 고령의 나이에 합격을 했죠. 제가 서울메트로에 퇴직할 무렵에는 4학기 중에 한 학기만 남았었는데 7월에 마침 방학이 되고 해서 교수가 저보고 논문을 쓰라고 하더라고요. 2013년이니까 내년에 당신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논문을 쓰라고 해서 무리하게 썼어요. 살면서 제일 힘들었을 때가 그 논문을 쓸 때였어요.


Q. 말씀을 들어보니 정말 도전과 헌신의 삶을 살아왔다는 느낌입니다. 특히 ‘공적 가치관’을 많이 강조하셨는데 일반적인 여성들과는 다른 삶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겠군요. 용산 구청장 후보로 공직에 도전하기도 하고, 지금은 사회적 기업 대표로 활동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A. 천만 관객을 동원한 ‘암살’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타국에서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하던 중 극중 주인공이 해방 소식을 접하고 ‘집에 가자! 집에 갈 수 있다!’고 한 외침에 목이 메었습니다. 부모님의 가르침, 여군 생활에서 얻은 공적 가치관, 그리고 전역 후 사회생활과 공부에서 체득한 지식과 경험을 사회에 되돌려주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MeCONOMY Magazine October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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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촌 "정몽규 스스로 거취 결정하는 게 낫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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