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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정보


노벨 가문은 왜 러시아로 이주했을까?

[윤영무의 세계 일주]


앞서 쓴 글에서는 오는 11월에 열릴 예정인 UN 기후 회의가 화석 연료의 원조인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석유의 도시 바쿠에서 열리게 된 아이러니와 이상한 정치적 배경에 관해 설명했다. 이어서 이번에는 바쿠시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억대 부를 쌓은 ‘알프레트 노벨’과 그의 둘째 형 루드비그와 큰형 로베르트가 눈부시게 활약했기 때문에 유명해졌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카스피해 바쿠에서 석유산업을 일으킨 노벨 형제가 러시아 격동기까지 기술력을 앞세운 미국의 석유메이저 기업과 어떻게 맞섰는지를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알면 알수록 흥미로운 바쿠 여행, 노벨 박물관이 왜 거기서 나오는 걸까? 모스크바 대학교 박사 출신인 양승조 숭실대 교수가 쓴 글을 바탕으로 노벨 가문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 노벨 가문은 왜 러시아로 이주했을까?

 

노벨 형제들의 아버지인 ‘임마누엘 노벨 2세’는 창의성이 풍부하고 재능 있는 기술자였다. 노벨 2세의 아버지, 그러니까 노벨 형제들의 할아버지인 ‘임마누엘 노벨 1세’는 군대에서 의무관으로 복무하다 제대 후 스웨덴 예블레(Gävle)에 있는 병원에서 의사로 일했으나 경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버지 노벨 2세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14살부터 3년간 선원 생활을 했다. 1819년에 스톡홀름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 건축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자기 사업을 시작해 압착롤러, 자동 동력장치, 외과용 기계, 나무 지뢰 등과 같은 독창적인 물건들을 만들어 판매했다.

 

하지만 사업 경험이 부족한 데다 스웨덴의 경제 상황까지 좋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살던 집이 불에 타 전 재산을 잃은 그는 파산하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그의 기술을 눈여겨보았던 당시 스웨덴에 와 있던 러시아 특사가 러시아에 와서 일해 보면 어떻겠느냐? 는 제의를 했고, 이를 받아들인 그는 이주를 결심했다.

 

1837년 가족을 스웨덴에 두고 홀로 러시아 제국의 자치국이었던 핀란드 대공국을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온 ‘노벨 2세’는 러시아가 주요 항구를 보호하기 위해 수중에 설치하는 기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기뢰 개발에 진력해 3년 만인 1842년. 오흐타 강에서 가진 기뢰 폭발 시연을 성공시킴으로써 25,000 은(銀) 루블을 상금으로 받았고, 관련 연구가 완료될 때까지 매일 25은 루블을 급여로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노벨 2세’의 러시아 사업은 빠르게 성장해 스웨덴에서 진 빚을 청산하고, 사업을 확대했다. 그리고 스웨덴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데려올 수 있었다. 그는 동업을 통해 자신의 작업장을 <오가료프와 노벨> 기계공장으로 확장해 천 명이 넘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바퀴 만드는 기계, 기선용 증기기관 등 다양한 종류의 기계와 선박을 만들도록 하였다. 1851년에 임마누엘은 오가로프의 지분을 사들인 후 공장 이름을 <노벨과 아들들〉로 바꿨다.

 

◇노벨 가문의 사업 쇠퇴와 재도약

 

그의 사업은 1853년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시작된 크림 전쟁(1853-1856)으로 또 한 번 급격하게 성장했다. 군수품 주문이 폭증했고 그의 공장에서 생산한 기뢰는 크론시타트 요새 주변 바다에 설치되어 영국과 프랑스 군함들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진입을 막았다. 전쟁 특수에 고무된 임마누엘은 국가에서 발주한 주문에 대처하고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대출을 받아 생산 설비와 인력을 보충했다. 그런데 1856년에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자 발주 계약이 취소되어 그의 사업은 빠르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극심한 재정난 빠진 그는 결국 1859년에 회사 경영을 포기하고 아내와 셋째인 ‘알프레드 노벨을 데리고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러시아에는 첫째 아들인 ’로베르트‘와 둘째 아들인 ’루드비그‘가 남아서 회사를 정리하도록 했다. 셋째 아들 ‘알프레드 노벨’은 스웨덴에서 강력한 폭발 물질인 니트로글리세린을 안정적이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에 매진했다. 1847년에 소브레로(Ascanio Sobrero, 1812-1888)가 만든 니트로글리세린은 당시 주로 사용되던 흑색화약 폭약보다 강한 폭발력을 가졌지만 언제 폭발할지 몰라 상용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1866년 ‘알프레드 노벨’이 규조토에 흡수시키는 방식으로 니트로글리세린을 안정화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다이너마이트라는 강력한 폭약을 만들었다. 그는 세계 각국에서 이 제조법을 특허로 등록하고 독점적으로 생산·판매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러시아에 남은 첫째 아들 ‘로베르트’와 둘째 아들 ‘루드비그’는 아버지 회사를 청산하는 작업이 끝나자, 각자의 회사를 설립했다. 특히 둘째인 ‘루드비그’는 아버지에 이어 기계·무기 생산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862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북쪽에 있는 작은 도시에 <루드비그 노벨 기계공장〉을 설립한 그는 다양한 금속 제품들과 기계들을 생산해 매우 좋은 평가를 받게 되자 공구, 무기 등과 같은 다양한 물품들을 국가에 납품하게 되었고, 이러한 기술과 자본을 기반으로 다른 기계공장과 무기 공장을 인수해 러시아 굴지의 무기 생산 기업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맏형인 ‘로베르트’는 당시 러시아 지배에 있던 핀란드 헬싱키에서 램프와 등유를 생산하는 회사를 세웠다가 동생인 ‘루드비그’의 사업이 번창하자 1870년, 동생이 하는 사업에 동참하고 있었다.

 

◇바쿠 유전 개발과 <노벨형제석유생산주식회사>의 탄생

 

다시 19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한 나라는 미국과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코카서스 원정에 성공해 바쿠 주변의 유전 지대를 확보했는데, 그 후 바쿠는 오랫동안 러시아 석유 생산의 핵심이었다. 1930년대 이전까지 이곳에서 러시아산 석유의 80% 이상이 생산됐다.

 

하지만 1860년대 이전에 바쿠에서 생산되는 원유는 질과 양적 측면에서 미국에 크게 뒤지고 있었다. 당시 바쿠 유전 지대는 국유지로 4년 단위로 땅을 임대하고 임차료를 받았다. 그래서 땅을 임대한 사람이 유전을 개발하든지 말든지 하라는 식이었는데 임대 기간이 짧았으므로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유전 시추(試錐)보다는 얕은 유정을 채굴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바쿠 지역에서 생산된 원유는 양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불순물이 많아 질이 낮았다. 더구나 철도망이 아직 구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생산된 원유의 대량 수송 자체가 불가능했고 카스피해와 이어지는 볼가강을 이용한 수상 운송은 강이 어는 겨울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으로 상업적 석유 개발은 1859년에 미국의 사업가인 에드윈 드레이크(Edwin L. Drake)가 충격식 시추 법으로 유정을 굴착(掘鑿)해 원유를 대량으로 생산하면서 시작되었다. 바쿠 유전은 에드윈 드레이크보다 13년 뒤인 1872년에 두 개의 시추공을 뚫어 원유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미국보다 상대적으로 늦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바쿠의 원유 생산량은 빠르게 증가했다.

 

바로 이때 우리들이 알고 있는 노벨상을 제정한 ‘에드워드 노벨’의 둘째 형과 큰형이 바쿠에서 석유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노벨 형제들이 바쿠까지 와서 석유산업에 손을 댔던 것일까? 한마디로 그것은 우연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기계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둘째, ‘루드비그 노벨’은 국가에 소총을 납품하게 되어 개머리판으로 쓸 호두나무 목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자신의 회사에 와서 일을 하고 있는 큰형 ‘로베르트’에게 목재 구입비를 주고 코카서스 지역으로 가서 호두나무 목재를 사들여 오도록 했다.

 

목재를 찾아 바쿠까지 오게 된 ‘로베르트’는 동생이 원하는 목재를 찾지 못하고 바쿠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기름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만 마음이 바뀌고 말았다. 핀랜드 헬싱키에서 등유 사업을 해 본 경험이 있던 그는 장차 석유 사업이 노다지가 될 수 있다는 영감을 받고 가지고 있던 목재구입비로 소규모 유전이 있는 땅을 사버리고 말았다.

 

“형,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라면서 화를 내던 ‘루드비그’는 장차 석유가 큰 사업이 된다는 큰 형의 설득에 넘어가 오히려 석유 개발에 투자하기로 했다. 마침 러시아가 바쿠 유전 지대의 토지를 민간에게 판매해 민간인들이 본격적으로 석유 개발을 할 수 있도록 정책을 바꾼 것도 루드비그의 태도를 바꾸게 한 계기였다.

 

이렇게 석유 개발 사업에 뛰어든 루드비그와 로베르트 형제는 원유의 생산, 정제, 운송을 체계화하는 작업에 힘을 쏟았다. 당시 바쿠에서 유전 개발은 기술적으로 낙후해 있었다. 석유 시추에 필요한 기계나 장비, 철도, 유조선, 수송용 기름 저장 탱크, 지점망 등과 같은 시설이나 유통망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었다.

 

기계공장으로 기술력과 경험을 가진 둘째인 루드비그는 그러한 문제점들을 하나씩 해결하며 석유 채굴, 생산, 운송, 정제 방식을 개선하고 일관화해 갔다. 1878년에 세계 최초로 증기 유조선 <조로아스트르호>를 건조했고 같은 해 러시아 최초로 석유 파이프라인을 건설했다.

 

그리고 1903년에는 세계 최초로 디젤 엔진을 사용하는 유조선 <반달(Вандал)호>을 도입했다. 하지만 석유 사업과 같은 대형 플랜트 사업에는 많은 자금이 들어가야 했다. 둘째인 루드비그와 큰 형인 로베르트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미 세계 수준의 대 사업가가 된 막내동생 알프레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막내인 알프레드 노벨은 형들의 부탁을 받고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바쿠의 땅을 담보 가치로 잡을 수 없다는 금융인들을 설득해 세계 금융 역사상 처음으로 석유의 미래가치를 담보로 잡아 대출받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자금을 융통하는 막내 알프레트 노벨이 아니었다면 아마 노벨 형제의 석유 개발 사업은 오래가지 못했을지 모른다. 1879년에 노벨 형제, 그리고 ‘루드비그’의 동료이자 친구인 ‘P.A. 빌데를린그’를 비롯한 7명의 외부인이 투자자로 참여하는 ‘노벨형제석유생산주식회사(줄여서 ’브라 노벨‘, 즉 노벨 형제)’를 설립했다.

 

‘브라 노벨’의 대표에는 초기 자본금 50% 이상을 댄 둘째 ‘루드비그’ 집안에 돌아가 1879년~1888년까지 ‘루드비그’가 맡았다. 그러나 1888년, 그가 휴양 차 파리에 갔다가 57살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에마누엘 노벨(Emanuel Nobel 1859-1932)’이 대표직을 승계해 사업을 이어갔다.

 

◇신문에 보도된 형의 부음, 죽음의 상인이 사망이 만든 노벨상

 

그런데 ‘루드비그’가 죽었을 때 프랑스의 한 신문이 그를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막대한 부를 쌓은 ‘알프레트 노벨’로 착각해 “죽음의 상인 사망”이라고 보도했는데 이를 본 55살의 ‘알프레드 노벨’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그 정도밖에 취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벨상을 제정했다고 한다.

 

‘브라 노벨’은 자본투자를 통한 기술개발과 설비 구축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면서 원유 생산량을 크게 늘렸다. 1879~1880년에 91만 9천 푸드(푸드는 러시아의 전통 무게 단위, 1 푸드는 16.38kg)에 불과하던 원유 생산량은 10년 후인 1889년에 3,192만 푸드로 35배로 성장했고 10년 후인 1899년에는 101배 이상 급증했다. 또한 ‘브라 노벨’이 도입한 석유 생산과 정제 과정의 혁신은 이 분야의 다른 러시아 기업들로 확산하여 1880~1890년대에 러시아는 미국을 추격하다 1898~1901년에는 잠시 미국을 앞질렀다.

 

내연기관이 개발되어 있지 않았던 1867년 이전에는 원유 정제물의 유일한 시장은 램프용 기름 시장이었고 이 시장을 주도한 것은 미국이었다. 1860년대 미국산 등유는 미국 국내는 물론이고 유럽 등 해외에서도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러시아도 미국과 함께 주요 산유국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나 아직 채굴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산 등유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미국산을 수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브라 노벨’이 등장한 이후 산유량이 급증하고 정제 기술이 발전하게 되면서 러시아 등유 시장에서 바쿠 산이 미국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록펠러’의 ‘스탠더드석유회사(Standard Oil Company)’와 충돌을 불가피하게 햇다. 평범한 경리에서 시작한 ‘록펠러’는 모험적이고 공격적인 투자와 사업 경영을 통해 빠르게 미국 석유 산업계를 장악한 후 원유의 생산, 수송, 정제에 이르는 모든 사업을 관리·통제하는 일관 체제를 갖는 거대기업(이를 트러스트라 부르는데 점차 나쁜 의미로 변질됐다)인 ‘스텐더드석유회사’를 만든 것이다.

 

‘스텐더드석유회사’는 공격적인 경영을 통해 미국 국내 시장은 물론이고 유럽을 비롯한 세계 시장에서도 지배적인 위치에 올라서고 있었는데, 같은 시기에 바쿠를 중심으로 성장한 ‘브라 노벨’이 러시아 시장은 물론이고 유럽과 아시아에서도 ‘스텐더드석유회사’와 경쟁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록펠러는 1880년대 초에 ‘브라 노벨’의 인수를 시도했으나 노벨 형제의 거부로 실패했다. 결국 유럽 시장을 중심으로 두 석유 기업 사이의 경쟁은 심화했다. 그러자 록펠러는 ‘브라 노벨’에 자금을 융통해 주고 있던 ‘로트실트(로스차일드)’ 가문과 협력 관계를 맺음으로써 재정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로트실트’는 러시아 석유회사인 <바투미석유생산판매회사>를 인수하여 <카스피해-흑해석유생산판매회사>로 만든 뒤 직접 러시아 석유 사업에 대한 투자에 나섰다. 이에 맞서 ‘브라 노벨’도 막내 ‘알프레드’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재정 지원을 받음으로써 자금 문제를 극복해 러시아에서의 주도적인 입지를 확고하게 다졌고 ‘스텐더드석유회사’와 세계 석유 시장을 양분하는 굴지의 기업이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 제국의 붕괴와 ‘브라 노벨’의 해산

 

미국이 석유 생산량에서 러시아와 커다란 차이를 벌리게 된 것은 새로운 시추 기술개발과 새로운 유전이 속속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901년부터 미국은 특수 송곳이 달린 강관을 사용해서 유층을 뚫는 회전식 시추 법을 사용함으로써 지층 깊은 곳에 있는 원유를 뽑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존 유전 지대인 펜실베니아 지역 외에도 텍사스와 오클라호마에서 대규모 유층이 발견되어 개발되기 시작함으로써 유전 지대의 볼륨 자체가 급증했다.

 

이에 반해 20세기 초까지 러시아는, 기술적으로는, 여전히 지층에서 가까이 위치한 유층에서만 시추할 수 있는 충격식 시추 법을 사용하고 있었고, 새로운 유전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봐도 여전히 바쿠와 그 주변의 옛 유전 지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 국내 정치 문제와 사회 불안 또한 석유산업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 노벨 형제들이 활약했던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는 러시아 역사에서 개혁과 반동 개혁이 반복해 일어나 1905년과 1917년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 혁명이 발발했다. 노벨 가문은 그러한 격동기를 헤쳐 나가야 했다.

 

20세기 초, 차르(황제)가 지배하던 제정 러시아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실업자의 증가와 함께 장시간 노동, 저임금으로 고생하던 농노 및 노동자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에 더해 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놓고 일본과 벌인 제국주의 싸움, ‘러일전쟁’에서의 패배는 많은 러시아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고, 결국 피의 일요일 사건-1905년 1월 22일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빵을 요구하는 비폭력 시위대를 러시아 황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해 발생한 유혈사태-를 시작으로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이 터졌다.

 

19세기 말 국가 주도로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전통적인 농업 국가였던 러시아에서도 노동계급이 새로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재무대신 세르게이 비테(Sergei Witte)가 시베리아횡단철도를 부설하고 탄광과 유전을 개발하는 등 의욕적으로 산업화를 추진한 데 힘입어 노동자계급의 수는 20세기 초반 약 3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급속히 증가했다. 하지만 산업화가 시작되어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농노는 물론 노동자들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매일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농노들과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져 갔고, 불만은 결국 러시아를 다스리는 차르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니콜라이 2세가 국민의 기본권 인정, 선거에 의한 제헌의회 창설 등을 약속하는 ‘10월 선언’을 발표했지만, 노동자들과 농노들의 투쟁은 그해 12월까지 이어졌다. 시위대의 수는 모스크바에서만 무려 5만 명을 넘어섰다.

 

20세기 초반 제정 러시아를 위기로 몰고 갔던 제1차 러시아 혁명은 차르의 군대가 효과적인 진압 작전을 펼치고, 혁명 세력들의 내부 분열이 겹치면서 같은 해 12월 19일 종언을 고하고 다음 해인 1906년 5월,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간접선거에 의한 민선 의회인 ‘두마(Duma)’의 창설을 이끌어냈다.

 

1905년 노벨 형제가 있던 바쿠 지역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석유 노동자들이 주동이 되어 열악한 노동 조건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며 일으킨 봉기였다. 바쿠 석유 노동자 폭동이 발생한 이후에 ‘브라 노벨’의 대표, ‘에마누엘 노벨’은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아동노동을 금지하며 직원들에게 회사 지분을 분배하는 등 노동 조건과 노동자 복지 향상에 더 많은 힘을 쏟았다.

 

‘브라 노벨’은 이런 급박한 사회 혼란기에도 1911년에 로터리 굴착기를 도입하고 엔지니어를 초빙하는 등 기술 개선 작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추 비용 증대로 이어져 원유와 정제유 가격의 상승을 가져와 러시아 등유 가격은 주요 경쟁 상품이었던 도네츠크(우크라이나 동부 도시)에서 생산되는 석탄 가격의 두 배에 달해 러시아산 등유는 경쟁력이 떨어졌다. 더구나 1917년 10월에 발생한 국가 차원의 격변은 이 모든 노력과 시도를 무위로 만들었다.

 

1918년에 브라 노벨은 러시아 내에 있던 다른 석유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몰수되었으며, ‘에마누엘’과 그의 가족은 스웨덴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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