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년 전 TGV 흡연실 안에서 줄담배를 태우며 독서에 몰입하던 프랑스인들의 모습은 지금도 내게 문화적 충격으로 남아있다.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외국인들이 묵직한 페이퍼 북(Paper Book)을 배낭에 챙겨 다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기차나 비행기, 해변이나 카페 등에서 책을 읽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독서가 관광이나 여행 등 일상 속 여가의 일부로 녹아 있다는 점에서 바쁜 일상을 핑 계로 독서를 미루는 우리나라와는 이질적이다.
우리나라 독서량은 OECD 평균 수준인데 국가별 성인 1인당 월간 독서량은 미국 6.6권, 일본 6.1권, 프랑스 5.9권에 비해 우리나라는 0.8권으로 세계 최하위권이라고 한다. 책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멋진 풍경을 접목한 여행프로그램을 통해 독서문화를 확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독서를 통해 여행지에 대한 역사와 예술 그리고 문화적 맥락을 함께 이해하면서 여행을 즐긴다면 그 즐거움이 배가될 수 있으리라. 우리나라도 최근 여행에 관한 콘텐츠와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며 코로나-19 이후에 관광과 여행에 대한 개념이 확 바뀐 느낌을 자주 갖게 된다. 특히 앞으로는 새로운 여행 트렌드를 주도할 신세대의 여행행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체험활동(액티비티)’를 중심으로 한 여행경험을 선호하고 여행플랫폼의 이용이 가속화되면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축약어인 ‘소확행’, ‘가성비’ 등 합리적인 소비를 지향하는 여행 가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부상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유행하는 ‘텍스트(Text)’와 ‘힙하다 (Hip)’를 합한 ‘텍스트힙’이라는 용어는 독서와 기록을 즐 기고 이를 공유하는 것을 멋지다고 여기는 의미의 신조어라고 한다. 여가 시간이 증가하고 저성장 경제기조가 지속됨에 따라 가볍고 느린 여행으로 욕망을 해소하려는 형태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 분명하다.
또한 관광과 여행에서 기억할 만한 경험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지며 여행객의 능동적 참여가 가능한 형태 위주로 변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독서와 여행을 이어줄 적당한 여행 콘텐츠는 무엇일까? 서른일곱살의 괴테는 창작에 대한 의욕을 되찾고 싶다는 갈증으로 어느 날 새벽 홀연히 이탈리아 여행을 감행한다.
『이탈리아 기행』은 2년여에 걸쳐 괴테가 이탈리아를 여행한 편지와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작품으로 그 시대에 대한 문화적, 역사적 배경지식이 없이는 읽기도 어려운 책이다. 평상시 괴테의 아버지는 자신이 쓴 이탈리아 기행기를 아들이 읽도록 하고 자신의 자취를 따라 여행 가기를 아들에게 권유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당시에 외국 여행은 타고 난 금수저 집안 아니면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경제적 수준과 여행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돈 없고 여유 없는 사람은 쉽게 여행을 떠날 수도 없다. 일상에 지친 직장인의 가벼운 주머니를 생각하고 아직 가난하지만 꿈에 진심인 이들을 위해 좀 더 느리고 가벼운 여행을 기획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경제성장에 힘입어 오늘날 한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개인 여행 또는 여행사를 통해 패키지여행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베트남, 태국, 일본 등이 주요 대상국인데 아직도 빡빡 한 일정을 통해 가능한 많은 곳을 보고 돌아오는 것을 선호한다. 패키지 상품을 이용하는 여행자들에게는 유명 관광명소를 뒷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재빨리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게 여전히 관행처럼 남아있다. 우리도 지금보다 조금 더 느리고 게으른 여행이 필요한 시기가 되지 않았을까?
세계 경제 순위 7위에 육박하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책이 있는 풍경과 함께 떠나는 매혹적인 여행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관광공사의 대한민국 구석구석이라는 사이트에서 소개 한 전국 곳곳에 있는 서점여행을 살펴보자.
먼저 대구의 작은 동네 서점 ‘하나의 시선’은 사장님이 서점 사용 설명서를 직접 설명하는 데 소설에 집중하는 곳이라 소설 구절을 필사하고 커피도 마시며 무너진 감성을 충전시킬 수 있다.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책도 보면서 숙박이 필요하다면 대구공항 근처 ‘여행자의 책’이라는 서점도 괜찮다.
혹시 고은 시인의 정서적 고향인 군산에 간다면 시간여행 마을에 있는 ‘마리서사’라는 서점도 좋다. 박인환 시인이 서울 종로에서 운영하던 책방의 이름을 그대로 쓴 군산의 ‘마리서사’는 100년이 넘은 적산가옥을 그대로 쓰고 있어 우리의 레트로 감성을 자극한다. 강원도 고성의 ‘북 끝 서점’은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고 파도 소리가 들리는 곳에 앉아 북 큐레이터 사장님이 추천한 책을 읽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혼자서 아무런 욕심도 없이 낯선 도시와 마을에 도착해서 책을 읽는 여행의 풍경을 떠올리자니 겨울나무에 자그마한 햇살 비추듯이 절로 마음이 포근하고 가벼워진다.
눈을 해외로 돌려보면 세계 도처에 훌륭한 도서관과 서점 들이 즐비하다. 스위스 생갈 수도원 도서관(Library of the Monastery of St. Gall)은 1983년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도서관 입구 위에 그리스어로 ‘영혼의 치유 장소’라는 문구가 새겨진 게 무척 인상적이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엘 아떼네노 서점(Libreria El Ateneo)은 오페라극장을 개조해 만든 곳인데 해마다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한다고 한다.
알베르 까뮈가 스승인 장 그르니에의 ‘섬’이라는 책을 처음 발견하고 겨우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 슴에 꼭 껴안은 채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읽기 위해 정신 없이 달려갔던 그날의 격렬한 감동을 함께 느끼고 싶다면 그때 그 ‘섬’이 있었던 알제리 어딘가에 있을 서점에 가보는 것도 좋으리라.
젊고 가난했던 헤밍웨이의 아지트였던 파 리의 ‘셰익스피어 & 기업’ 서점에 가서 잃어버렸던 작가의 꿈을 불태우는 것도 여행의 묘미가 되지 않을까? 가장 치열하고 강렬하게 21세기를 살아온 대한민국에도 책이 있는 풍경과 함께 좀 더 느리고 가벼운 여행을 꿈꿀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글 박종하 한국보건의료연구원 기획조정실장(주제여행포럼 학술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