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 학생에게 1972년과 1973년 두 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예원고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던 김영근 군은 선명회합창단의 일원으로 미국에서 순회공연 중 바이올린 연주의 거장인 야샤 하이페츠의 제자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당시 병역필이 아니면 유학을 갈 수 없었던 때여서 유학을 거의 단념하고 있었는데, 육영수 여 사의 도움으로 유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김영근 씨는 미국에서 오케스트라 연주자로서, 대학 교수로 생활을 해오면서 늘 육 여사가 유학 갈 때 당부했던 “하이페츠의 연주법을 배워 와서 후학들을 잘 가르쳐달 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동안 때때로 고국을 드나들며 연주회를 가지기도 하고 몇몇 한국 유학생들 을 현지 지도하기도 했으나 아쉬운 마음이 남았다. 이제 미국 교수 생활을 은퇴하고 하이페츠의 연주법을 후 학들에게 전하기 위해 고국으로 영구히 돌아왔다. “육 여사와 고국이 저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갚는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담담히 말하는 김영근 씨를 만났다.
Q. 처음 하이페츠를 만났을 때의 상황과 육영수 여사를 만나 미국유학을 가게 된 기억을 회상해 주세요.
A. 저만 아는 일종의 기적입니다. 저는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진해에서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바이올린을 접했습니다. 아버지가 이북 평양 분이신데 바이올린을 좋아해서 젊은 시절에 미국 선교사를 통해 바이올린을 배웠어요. 그 꿈을 저한테 전수시키신 거죠. 당시 진해라면 시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바이올린의 ‘바’자도 들어보지 못한 소년이 바이올린을 배우고 나중에 위대한 야사 하이페츠의 제자가 됐다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홍해가 갑자기 갈라지는 것’과 같은 기적이었지요.
초등학교 1학년 일곱 살 때 바이올린을 접했어요. 아버님이 부산에 가셔서 바이올린 사다가 2~3개월 정도 가르쳤어요. 아마추어였으니까 악보랑 연주하는 법을 조금 가르치다가 부산으로 선생을 찾아 레슨을 보내주셨어요. 그때는 고속도로도 없었고 포장된 길도 없어 돌고 돌아서 부산으로 레슨을 다녔어요. 완행버스로 3시간 반이 걸렸어요. 그러다가 서울 예원 부속중학교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상경했어요. 서울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 배우기 시작 하니까 늘기 시작 하더군요. 예원 3학년 때 5.16 민 족상 음악부문에 나가서 2등을 했어요. 이를 계기 로 그 당시에 세계 공연을 다니던 선명회어린이합창 단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공연을 다니는데 바이올리니스트가 한 사람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들어가게 된 겁니다. 학비도 다 대준다는 거예요.
선명회(오늘날 월드비전)에 입단해서 중3때부터 세계 공연을 다녔어요. 중간에 아이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무대를 바꿀 때 바이올린 독주를 하는 거예요. 그런 역할을 하다가 고3때 5.16민족상 콩쿠르에 다시 한 번 나가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1등에 해당하는 대상을 받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기로 했기 때문에 시험 걱정을 안 하고 미국과 캐나다 순회공연을 간 거예요. 미국과 캐나다의 90여 개 도시를 다 돌았는데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 선명회에 계신 분이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만나 제 얘기를 하고 하이페츠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선명 회가 어떻게 주지사를 접촉할 수 있었느냐 하면 선명회 미국 측 인사 중의 한 분이 주지사의 형이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요. 그 연줄로 주지사가 하이페츠한테 공문을 보내 한국에 바이올리니스트 소년이 있으니까 한 번 들어봐 달라. 이렇게 했답니다. 안 그러면 그 유명한 하이페츠 선생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어요.
저는 ‘너 내일 하이페츠 앞에서 오디션 하니까 준비 해!’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왜 갑자기 하이페츠가 나오나 하고요. 우상처럼 여기던 분, 우연히 라이프 잡지에 실린 그 분의 사진을 오려 놓고 바라보면서 하이페츠는 누구를 가르칠까? 하이페츠한테 배울 수 있으면 얼마나 큰 영광일까? 이렇게 마음으로 한 번 생각해본 것뿐인데...기가 막히게 이루어진 거죠. 나는 그 분 앞에서 최선을 다해 연주를 했습니다. 몇 곡을 했는데 하이페츠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승낙을 하셨어요. 아마 제 생각에 주지사의 영향도 있어 나를 받아준 것 같습니다. 조금은 가능성도 보이고. 그렇지만 제 생각에 하이페츠를 만날 수준은 안 되었는데 받아 주셨어요. 너무 감사하고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저에게는(미소). 하이페츠 선생님은 남가주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는데 나를 장학생으로 부르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저는 순회공연 일정이 남아 있어 다 끝내고 귀국 했어요.
그때는 법이 병역의무를 미필한자는 유학을 못 가게 돼 있었어요. 비록 하이페츠는 승낙을 했지만 꿈처럼 여기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1973 년도에 선명회합창단이 공연을 마치고 얼마 후에 청와대에서 육영수 여사가 해외 공연으로 국위선 양에 수고했다고 오찬회를 베풀었어요. 그 자리에 참석했을 때 선명회 단장이 하이페츠한테서 막 온 전문을 보여 줬어요. 하이페츠가 또 유학 오라고 재촉한 거예요. 언제 들어올 수 있느냐, 속히 왔으면 좋겠다고요. 육영수 여사에게 하이페츠가 발탁한 얘기를 하니까 그 분이 하이페츠를 알고 있었어요. 만약에 아무리 대통령 부인이지만 하이페츠가 누구? 그랬으면 거기서 끝날 일이었지요. 그런데 하이페츠에게 발탁된 가치를 금세 인식하고 문화공부부 장관을 불러 병무청에 이야기를 해서 특혜를 내려 주셨어요. 3월에 연대에 들어가서 학교를 다니다가 바로 하이 페츠에게로 떠났습니다.
Q. 얼마동안 배웠나요.
A. 4년 동안 배웠습니다. 그 후 저는 샌디아고 교향악단에 오디션을 통해 단원으로 취직을 해서 미국 에 남아있게 됐습니다. 결혼 후에는 호놀루루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제2 바이올린 수석 리더가 되어 거기서 11년 정도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하와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두 가지를 병행했죠. 그 다음 보스톤 쪽으로 이사를 가서 몇몇 대학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결국 가르치는 게 제 본업이 되었어요. 물론 연주는 계속 했습니다. 한국 과 일본, 미국, 캐나다에서 꾸준히 공연을 했습니 다. 지금 나이에도 연주를 계속하는 바이올리니스트는 드물 겁니다.
Q. 이미 미국 생활에 더 익숙해졌을 것 같은데 왜 새삼 한국에 영구적으로 오려고 했는지 궁금합니다.
A. 가르치는 게 제 본업이니까 한국의 수준 높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보람이 많아요. 한국에서 저를 유학 보낼 때 ‘하이페츠한테 배워 와서 우리 학생들을 잘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이런 부탁을 육영수 여사가 했거든요. 그 말이 저에겐 평생 동안 살면서 일종의 의무감이 돼왔습니다. 하이페츠에게서 배운 독특하고 대단한 기술과 지식을 한국의 학생들에게 퍼뜨리고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런 열망을 여태껏 간직해왔습니다. 제가 육 여사와 고국에서 받은 은혜를 이제 되돌려주고 싶습니다.
Q. 야샤 하이페츠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A. 하이페츠라고 하면 바이올린 대가들이 모두 그를 ‘킹’이라 불러요. 하이페츠는 실수하지 않고 테크닉적으로 완벽하다하는 면으로 정평이 나 있고요, 그것만으로 전 세계 음악인들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지요. 바이올린의 대가들도 하이페츠의 연주를 들으면 내가 쫓아갈 수 없다고 하는 경지를 느낀다고 고백합니다. 아무리 연습을 똑같이 해도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라고 할까요.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칭송되는 아이작 스턴도 모든 바이올리니스트 귀에는 하이페츠가 들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라면 누구든 하이페츠를 모방하고 하이페츠를 통해서 동기부여를 받고 그를 쫓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이페츠는 잘 알다시피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으로서 그들의 역사와 가정교육이 있었을 것이고, 아버지는 프로 바이올리니스트였어요. 아버지로부터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접했고 아버지의 교육을 받았고, 상페트르부르크에 있는 차이코프스키 음악 학교에 들어가서 그 당시 유대계 바이올린의 대부라는 레오폴드 아우어 선생 밑에서 교육을 받았어요. 하이페츠는 9살 때 벌써 신동으로 유럽을 제패 하고 다녔어요. 스승인 레오폴드 아우어 밑에는 많은 대가들이 배출 되었어요. 한 번은 아우어가 나이가 들어 인터뷰를 하는데 “당신의 기억나는 제자들을 말씀해주십시오.” 했더니 몇몇 바이올리니스트를 이야기하는데 첫째로 꼽아야 할 하이페츠를 이야기 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인터뷰한 사람이 어떻게 하이페츠를 언급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하이페츠는 내 제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제자다.’ 라고 얘기했어요.
Q.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을 때를 말씀해주세요.
A. 레슨받기 시작했을 때는 은퇴하고 난 뒤인 74세였어요. 가르치는 것에 집중하실 때인데 아버지 같았어요. 친절하고 한 번도 화를 폭발한 적이 없었고 학생들의 역량과 수준에 맞게 잘 가르쳤어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집중해서 배우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저는 그런 모습을 보여줬던 것 같아 요. 저는 정말 하이페츠를 존경했고 미국에서 공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선생님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여 그분의 모든 클라스마다 보고 듣고 배웠습니다. 4년째 배울 때 당시 제자가 7명쯤 되었는데 그 중에 나만 자택에 불러서 같이 식사를 하고 ‘선물을 마련 해 놨는데’하며 바이올린을 주셨어요. 그때까지 저는 바이올린을 빌려서 공부하고 있어서 제 바이올린이 없었거든요. 쭉 저를 지켜보다가 바이올린을 준비해야 되겠다고 마음에 두고 있다가 두 개의 바이올린을 보여주면서 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해서 하나를 선택했죠.
그건 당시로서는 뉴스거리가 될 만한 사건이었는데 저만 알고 있었어요. 200년 된 유럽제 바이올린인데 비엔나의 제작자가 만든 거였어요. 가끔 책을 주기도 하고 용돈을 주시기도 했어요. 제가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한 번은 네 자취하는 데를 가보겠다며 차를 몰고 찾아오셨어요. 제자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봐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같아요. 그런 선생님이 어디 있겠어요. 그분의 깊고 섬세한 사랑을 받았다는 걸 제가 나이가 들면서 더욱 느끼고 있습니다.
Q. 언제 돌아가셨어요.
A. 1987년 86살에 돌아가셨습니다. 임종 2개월 전에 하와이에서 뵈려고 전화를 했더니 ‘지금 상태가 안 좋아서 아무도 안 만난다고, 이웃사람도 안보고, 가족도 안 만나고. 어려울 거’라고 비서가 전했어요. 그렇지만 말은 해보겠다고 했는데 승낙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아내와 장미 한 다발을 사가지고 집을 방문했더니 지팡이를 짚고 나왔어요. 처음으로 수염을 안 깎은 모습을 봤습니다. 악수하고 거실에서 10분 정도 안부 대화를 나눴어요. 제가 가족이 생겼으니까 아이 이름이 뭐고 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나 그런 걸 자상하게 물어봤습니다. 그러고 나서 두 달 후에 전 세계에 하이페츠 서거 뉴스가 전해졌어요. 그 분은 시간 낭비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셔서 인터뷰 같은 것도 거의 안 하고, 어디 불려 다니는 것도 안하고 그냥 바이올린만 전공을 하고 연주에만 몰입했던 분입니다. 제자는 매학기 5명 내지 7명 정도 됐는데 제가 했을 때도 6~7명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Q. 연주를 하다가 교수생활로 넘어가신 이유는 무 엇입니까?
A. 나이가 들면 연주가 힘들어지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지요. 하지만 저는 하이페츠 아래서 배운 역량 때문에 연주가 살아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이 나이에 대부분의 교수들은 연주 활동은 못해요. 바이올린은 너무나 테크닉적으로 정교하고 어렵기 때문인데,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연주법 때문에 가능하지요. 저는 선생님에게서 배운 그대로 연습을 지금도 계속합니다. 가르치는 것을 전업으로 하고 난 뒤에도 저는 매일 연습을 했습니다. 간간히 연주를 하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이페츠 연주법을 가르치려면 실제로 연주하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르칠 수 없습니다. 제가 시범을 보이면서 학생들이 따라서 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다보니 학생을 가르치는 게 동시에 제 연습이 되는 거지요. 대부분의 교수들은 악기는 놓고 입으로만 가르쳐요. 그런데 저는 꼭 악기를 붙잡고 같이 해주지 않으면 안 돼요. 이 하이페츠 연 주법 때문에 저도 연주 생활을 이어갈 수 있어서 하이페츠 스승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Q. 그럼 국내 바이올린 업계에 현재 나이 들었어도 연주회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겠네요.
A. 많지 않지요. 제대로 외국에서 연주하고 온 분들이나 탑클라스 학교 교수들은 의무적으로 연주도 해야 되니까. 그 분들은 가끔 연주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Q. 우리나라 젊은 음악학도들이 제대로 못 배워 테크닉만 있고 기초가 낮아 외국에 유학 가서 헤맨다 하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그런데 콩쿠르에서 가서는 한국 사람들이 수상한단 말입니다. 사정을 모르는 보통 사람들은 좀 이해가 안 됩니다.
A. 한국 학생들이 당면한 과제는 잘하지요. 각종 콩쿠르나 예중입시, 예고입시, 음대입시 등 여기에만 치중해서 거기에서 요구하는 곡만 연습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까 그 곡 하나는 아주 잘하게 되는데 반면에 기초랑 스케일이랑 이런 거는 많이 등한시 합니다. 이래서는 훌륭한 연주가가 될 수 없습니다. 기초와 기본기를 잘 배운 학생들이 역시 좋은 성적들을 냅니다.
Q. 하이페츠 연주법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서 좋은 결과를 얻고 있습니까.
A. 모 예고 여학생이 기억에 나는데 하이페츠 연주법을 잘 숙지해가지고 서울대 수시 수석으로 합격을 하고 그 이후에 4년 내리 수석을 했습니다. 어떤 지방 학생은 처음 배울 때 반에서 17등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가르쳐준 하이페츠 연주법을 충실히 연습하더군요. 몇 년 뒤에는 수석이 되었고 서울예고 입시 때 수석 합격을 했어요.
Q. 하이페츠 연주법을 몇 년 정도 가르쳐야 효과가 나타나는지요.
A. 아까 말씀 드린 그 학생 같은 경우는 3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제가 한국에 방학 때 와서 가르치고 한 것이니까 집중적으로 한 것도 아닙니다. 제가 시킨 대로 연습을 한 거지요.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실력이 쑥쑥 나아졌고요. 입시 때 2~3개월 집중 적으로 가르쳐주고 서울예고 수석 합격이 되고 1년 다니다가 독일 베를린으로 유학을 갔지요. 그래서 저도 몇 가지 케이스를 보고 확신을 하고 더 많이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예고와 예중에서 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꺼번에 가르쳐주는 거지요. 지금 교섭 중에 있는데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Q. 요즘 TV를 보면 아이돌 스타들의 노래들은 넘치는데 클래식은 참 듣기 어렵습니다. 클래식은 모든 음악의 기초라는 면에서 방송사와 정부가 특별히 관심을 줘야 할 것 같은데 안타깝습니다.
A. 만화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만화만으로 교육을 받을 수는 없거든요. 좋은 음악에는 깊은 영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클래식은 신적 영역이라고 할 수 있죠. 신이 꽃도 만들고 산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었다면. 바하와 모차르트, 베토벤의 클래식은 신적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래식은 인간을 통하긴 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 같아요. 대중들의 취향에 맞게 만들어진 음악하고는 다른 영역이죠. 클래식 문학작품이 보존 되듯이 클래식 음악들도 영원히 연주될 겁니다.
클래식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표현한다고 할까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고, 사람을 동물과 구별 되게 하는 영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식생활에서 기본적으로는 탄수화물과 단백질들이 넉넉하게 함유된 주식을 먹어야 되잖아요. 그런 것들을 먹고 디저트를 먹어야지, 디저트만 먹고 주 음식이 빠져 있으면 건강을 해치게 되죠. 대중음악도 좋아요. 그러나 저는 클래식은 사람들의 정신과 건강을 지켜주는 ‘주식’이라는 거죠. 유럽의 공공장소에서 많은 사람이 있을 때 그전에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들려주다가 클래식을 들려 줬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경건해지고 주변의 소소한 경범죄가 40%가 줄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한국에서도 그걸 도입해가지고 고속도로 휴게실이나 전철 휴게실가서 들어보면 다 클래식이잖아요. 사람이 무얼 듣느냐에 따라 행동양식이 바뀐다고 그래요. 클래식은 사람을 차분하고 경건하게 더 창의적이 되도록 만들어 주지요. 유명한 작곡가들 베토벤, 바하,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음악과 같은 수준의 음악이 다시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더 멋지게 나와야 되는데 작곡가들은 예술가니까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어요. 시대가 공포스럽고, 무질서하고, 어지럽고, 곳곳에 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고, 쾌락주의가 만연하다 보니까 더 이상 고상한 음악이 안 나오는 것 같아요.
한국이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수준이 올라가면서 K-POP 같이 대중음악도 잘하는 건 좋지요. 하 지만 그로 인해 클래식에 대한 조예가 너무 사라져 버리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문화 투자를 하려고 하는데 너무 젊은이들이 뛰고 색정적으로 하는 거에만 투자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영적 양식을 위해서 클래식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Q. 클래식과 관련하여 어떤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지요.
A. 오케스트라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일본 도쿄만 해도 프로 오케스트라가 50개가 있답니다. 서울에는 서 너 개 정도, 다들 재정적으로 어려운 형편으로 듣고 있습니다. 인류가 보전해 야 하는 클래식에 대해 경제인들이 후원을 하면 역시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일본에서 연주 활동을 꾸준히 하고 음반도 낸 걸 로 알고 있습니다.
A. 후쿠오카에 있는 음악에 조예가 있는 사업가가 한국을 방문했다가 제 CD를 들어보고 초청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 분은 일본사람들의 문화수준을 좀 더 높여야 되겠다는 사명감으로 연주회를 마련 한다고 말합니다. 연주회는 주로 피아노 반주가 있는 독주회인데요. 두 시간 반 정도 합니다. 그 동안 여러 도시에서 했습니다. 그 분은 닭고기 사업을 해요. 젊은 시절, 대 학교에서 만돌린 오케스트라를 창단해서 리더를 했던 경력이 있더군요. 닭고기 사업으로 돈을 번 분이 대중을 위해 클래식 연주회를 꾸준히 개최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Q. 앞으로 하이페츠에 대한 음악적 유산을 잘 물려 줘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고 계신 것 같은데요. 그와 관련해 앞으로 어떤 식으로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지요.
A.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하이페츠 연주법을 학생들이 골고루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반대중들이 클래식에 다가가기 어려운 이유가, 클래식이 좀 듣기 어렵고 들을 기회도 적기 때문 이라고 봅니다. 경쾌하고 듣기 좋은 명곡들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을 접하면 사람들의 클래식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리라 확신합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태어나서 평생 죽을 때까지 머리로만 바이올린을 알지, 한 번도 연주회장에서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분들을 위해서 클래식의 대중화를 위한 활동을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펼치고자 합니다. 여러 기업이나 단체에서 K-POP 콘서트를 열어 주듯이 클래식 연주회를 열어주면 자연히 클래식 대중화를 위한 발길이 점차 가벼워지고 널리 퍼져나갈 걸로 믿습니다. 대중음 악에만 너무 길들여져 있는 대중을 위해서 디너 클래식 콘서트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식사도 하고 클래식도 들어보는 거죠. 제가 몇 번 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3년 전 영구 귀국한 김영근 씨는 동네 주민들을 위한 연주회도 열고 초등학생들에게 클래식 음악지식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주면서 연주도 들려주는 행사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가 즐겨 연주하는 곡목은 하차투리안의 ‘칼의 춤’, 브람스의 ‘헝가리 댄스 5번’, 멘델스존의 ‘노래의 날개 위에’, 림스 키콜사코프의 ‘왕벌의 여행’, 엘가의 ‘사랑의 인사’, 몬티의 ‘자르다스’,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 등이다. 길 가다 노숙자를 만나면 ‘밥은 먹었느냐’고 말을 건네고 밥값을 주는 사람, 음식점에 와서 배고프다고 밥 좀 달라는 출소자의 음식 값을 대신 내주는 사람, 이순을 넘겼지만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김영근 씨. 그의 클래식 대중화 발걸음이 그의 경쾌한 바이올린 연주처럼 한결 가볍고 널리 널리 울려 퍼졌으면 좋을 것 같다.
MeCONOMY Magazine July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