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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백성들이 만난 천주교 세계관

한국의 정신문화를 찾아서(22)

 

조선은 주자 성리학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주자 성리학이란 추상적인 논리로 엮은 일종의 도덕윤리다. 특히 주자 성리학이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인성과 수양에 집중하여 극단적인 순수주의랄까, 이론 세우기에 기울어졌다. 조선성리학의 개념에는 경제라는 것도, 생산과 노동이란 것도 물질과 기술이란 것도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불필요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의 눈에는 장사꾼의 이익, 부가가치라는 것은 부도덕한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조선조 내내 중국과의 조공 무역 외에는 외국과의 통상 및 교류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 전체를 조망해보면 중간에 중흥 시기가 있었다고 하나 시종일관 내리막길이었던 것 같다.


광복 후 실학 연구 붐에 일어나 근래까지 이어져 오다 보니 당대 실학자들의 생각들과 주장들이 주류인 것처럼 비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류였고 정치적으로 소외됐을 뿐만 아니라 설사 정치적으로 기용된다고 해도 국가의 곳간을 채우고 백성들의 삶을 기름지게 할 수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실학자들 중에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기독교인이 되려면 유학을 버려야 한다. 확고한 기성 이념과 종교가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종교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더욱이 조선의 완고한 양반 사대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새로운 종교의 전파는 정복에 의한 강제 개종과 극소수의 선구적 지식인들의 자발적 수용으로 이뤄진다.

 

한국 천주교는 후자였고 새로운 위안처에 목말라하던 백성과 여성들이 받아들였다. 삼국시대 불교가 들어온 것은 유교가 아직 정착되지 못한 상태였고 또 내세를 말하는 불교와 현세 중심의 유교는 그 영역이 달라 전파 초기엔 충돌이 없었다. 고려 말에 유학자들이 불교를 배척한 것은 불교가 정치 권력과 밀착하여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주실의」가 조선의 정신세계에 던진 ‘동그라미’, 큰 회오리로 변해


가톨릭 예수회 신부 마테오리치는 1582년 8월 7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는 중국어를 배우고 나중엔 「사서」를 라틴어로 번역할 정도로 유교 경전에 밝았다. 천신만고 끝에 1598에 명나라 신종 황제가 있는 북경에 도착했다. 드디어 1603년 「천주실의」를 출판했다. 마테오리치는 중국에 천주교를 전하기 위해 로마와 리스본, 인도 고아를 거쳐 마카오에 상륙했다. 그는 또다시 20년을 기다려서야 중국 황제를 알현하고 전도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중국과 조선에는 헤아릴 수 없는 유학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진리를 전하려고 인도와 서양을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태도와 확신의 차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동서를 구분 짓게 하고 따라서 커다란 격차를 만들고 있다. 일본에 천주교가 전해진 해는 1549년으로 예수회 소속 사베리오 신부 등 성직자 3명에 의해 이뤄졌다. 기독교의 중국 선교는 네스토리우스, 즉 경교로까지 거슬러 올라 가면 무척 오래됐고, 마테오리치 이전에 원의 쿠빌라이 황제 치하에 천주교 신부의 선교 활동이 있었으나 원나라의 쇠퇴와 혼란 중에 전도 활동이 끊어졌다. 이처럼 천주교의 조선 전래는 중국과 일본에 비해 형편없이 늦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과 조선 등 유교 문명권에서는 유일신 개념이 발달하지 못했다. 유일신과 비슷한 개념인 천과 하늘, 상제는 막연한 주재신으로서 제사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고 무의식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주재신의 개념도 후대로 올수록 희석돼 태극, 음양오행, 도, 리, 선, 성 등 주요한 원리와 본성으로만 논해져 왔다. 이렇게 흐릿한 스케치에 「천주실의」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인격적 요소와 이성적 논리성과 신비적인 초월성을 전해주었다. 당시 조선 선비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거나 깊은 생각을 이끌 만한 「천주실의」의 내용 몇 개만 살펴보자.

 

“서양 선비가 말한다. 인간은 온갖 존재들보다 뛰어나니, 안으로는 정신적 영혼을 받고 태어났으며 밖으로는 사물의 이치를 볼 수 있습니다.”


유학과 성리학에서는 이치를 중요시할 뿐 영혼에 대해선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천주교에서 ‘영혼’은 핵심 주제임을 밝히고 있다. 조선 선비를 갑자기 ‘영혼’을 놓고 씨름하게 만든 게 「천주실의」다. 다산이 진지하게 영혼 문제를 고민하여 자신의 유학 이론을 세웠다. 


“해, 달, 별들로 말하자면, 모두 동시에 하늘에서 빛나면서도, 각기 하늘을 본래 자기 자리로 삼고 있으나, 실제로는 혼도 없고 지각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지금 위를 바라보면, 하늘은 동쪽에서부터 움직이지만, 해, 달, 별들은 서쪽으로부터 거꾸로 좇아가며 일정한 도수대로 각각의 법칙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각기 제자리에 안정되게 머물며, 일찍이 실오라기 하나만큼의 착오도 없습니다. 만약 그것들 사이를 알선하고 주재하는 높으신 주님이 없다면 오차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짐승의 무리들을 관찰해 봅시다. 그들은 본래 미련하여 이성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배고프면 먹이를 찾을 줄 알고, 갈증이 나면 마실 물을 찾을 줄 알고, 화살이 무서워서 아득한 창공으로 솟구치며, 그물이나 덫이 무서워서 산림이나 못으로 잠적합니다. 어느 것은 부리로 씹어서 새끼를 먹이고, 어느 것은 꿇어 엎드려 새끼에게 젖을 줍니다. 모두 자기 몸을 보호하고 새끼를 기르며 해로운 것을 막고 이로운 데로 나아감은 이성을 가진 존재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는 반드시 높으신 주님이 존재하시어, 가만히 그들을 가르쳐서 비로소 이와 같은 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여기에 수천만 개의 화살이 날아가는데, 매번 과녁에 적중함을 보고서는 우리는 비록 활 쏘는 모습을 보지 못했어도, 또한 화살을 쏘아 적중하지 못 하는 일이 없는 명사수가 반드시 존재 한다고 인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릇 모든 개체는 스스로 완성될 수 없으며 반드시 그 개체에 초월적인 외재적인 운동인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높은 누대나 가옥들은 저절로 세워질 수 없으며, 언제나 목수들의 손에 의해 완성됩니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천지는 스스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창제하신 이, 즉 우리가 말하는 천주가 반드시 계심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지의 만물은 모두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일정한 이치, 즉 ‘질료(matter)’와 ‘형상(form)’을 가지고 있어서 더 보탤 수도 감할 수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물의 부류마다 원시조는 모두 그 부류에서는 생겨날 수가 없고, 필연적으로 이 세상 만류를 조화하여 생성한 원초의 특이한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에까지 밀고 나가야만 합니다. 곧 우리들이 말하는 천주가 그런 존재입니다.”


주자학은 유학의 이론을 체계화하고 정교화한 데까지 이르렀으나 천과 태극의 너머, 근원적으로 파고들지 못했고, 동식물과 물질에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천주실의」는 은근히 지적하고 있다.


중국 선비가 말한다.“일단 만물을 만들어 낸 시조가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천주라고 한다면, 이 천주는 누구에 의해 생겨난 것입니까?"


서양 선비는 대답한다. "천주란 만물의 근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무엇에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라면 천주가 아닙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존재는 금수나 초목과 같은 것입니다.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것은 천지나 귀신 및 인간의 영혼을 말합니다. 천주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만물의 시조요, 만물의 뿌리인 것입니다."


중국 선비가 말한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에게서 태어나고, 가축은 가축에게서 생겨나고, 모든 것들이 모두 이렇지 않은 것이 없음을 관찰해 보면, 만물이 스스로 만물이 되는 것이지, 천주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천주께서 만물을 만들어낸다고 함은 모든 종류의 시조를 처음으로 변화 생성시키신 것입니다. 일단 시조들이 있고 나면, 이 시조에서 스스로 생명이 생겨나옵니다. 비유하면, 톱과 끌로 비록 그릇을 만들 수 있다고 해도, 모두 목수가 그 톱과 끌을 씀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누가 그릇을 만든 것이 톱과 끌이요, 목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천주란 모든 부류에 초월해 있는 존재라면 천주를 어느 부류에 대비해 볼 수 있겠습니까? 모습도 소리도 없다면, 어찌 지각해 들어가 이해될 만한 흔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크기가 무궁하다면, 6합(동, 서, 남, 북, 상, 하)으로 경계를 지을 수 없으니, 천주의 높으심과 위대함의 끝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겨우 천주의 실제 모습이나 특성을 드러내자면, 무엇이 ‘아니다’와 무슨 특성이 ‘없다’로써 드러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무엇 ‘이다’와 무슨 특성을 ‘가진다’로써 한다면 더욱더 실정에서 거리가 멀어질 것입니다. 사람이란 그릇은 보잘것 없어서 천주라는 거대한 도리를 담기에는 부족합니다.“(「천주실의」, 송영배 등 옮김, 서울대출판문화원)


「천주실의」는 사람의 영혼 불멸론, 윤회론, 인간의 의지와 선악 응보론에 대해 문답을 하는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천주실의를 간행하기 1년 전에 마테오리치는 곤여만국전도를 출판했다. 이 곤여만국전도가 1603년에 사신으로 갔던 이광정에 의해 들어왔다. 명에서 출판된 지 1년 만에 들어온 것으로 봐 천주실의도 1604년쯤부터는 조선에 전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전해진 귀한 책이라면 즉시 필사를 해 선비들 사이에 널리 읽혀졌다. 이수광, 이익, 안정복, 신후담 등이 논평을 할 정도로 「천주실의」는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천주교 신앙의 씨앗이 뿌려진 주어사 강학


1779년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주어사 강학에서 한국 천주교가 시작됐다고 한다. 주어사 강학은 녹암 권철신이 주도하였다. 권철신은 여말선초의 성리학자인 권근의 후손이다. 권철신은 이익 문하에서 안정복과 이병휴 등과 문수학했다. 권철신은 본디부터 탈주자학적 경향이 강했다. 이 주어사 강학에 한국 천주교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인물인 이벽이 참석하게 된다. 이벽은 효가 절대적인 도덕이념이었던 시대에 아버지의 과거 시험 종용을 거부한 점으로 봐 변혁 사상을 꿈꾸었던 신념주의자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벽은 눈 덮은 험한 산골, 외딴곳에 있는 주어사를 홀로 찾아갔다. 그러나 잘못된 장소에 가는 바람에 늦은데다가 떨어져 어두워졌다. 잘못된 장소는 천진암으로 추정되는데, 암자 승려 도움으로 주어사로 다시 밤길을 재촉한다. 호랑이들이 때때로 출몰한다는 골짜기를 쇠꼬챙이 달린 몽둥이를 들고 마침내 강학회에 도착했다. 한국 천주교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의 하나다.

 

이벽의 탐구는 이승훈의 북경 천주당에서 세례를 가져왔고 천주교라는 새로운 창조관, 세계관, 인간관은 거대한 회오리가 된다. 이제 너무나 거창하고 놀라운 이야기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만 남았다. 서학 공부의 하나로서 받아들인다면 단호히 거부할 뜻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이것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결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MeCONOMY magazine Ma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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