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성리학적 도덕 이상주의를 엄격하게 추구한 나라다. 그 높은 도덕률은 가상하나 ‘욕망’이란 선악의 원인자이자 발전을 위한 에너지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무지라기보다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도덕윤리 의식이 너무 강했다. 이상주의적 ‘마땅함’은 신분 차별과 경제와 기술 및 시장의 족쇄로 나타났다. 양명학이 도입됐으면 어떻게 숨통을 터 볼 수라도 있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다. 애초부터 성리학을 개선하는 정도의 실학으로는 개혁이 가능했을 것 같지도 않다.
천주교를 받아들인 조선인들은 체제에 불만을 가진 양반들, 가난과 억압, 소외로 인해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중인과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살아서 희망이 없다면 기꺼이 죽어서 천국 가기를 원했다.
기해박해에서 숨진 이호영(1838.11.25 옥사)을 보자. 그는 한강 북쪽 문막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붙잡혀 형조에 갇혔다. 아래 글은 「조선 순교자록」 (파리외방전교 회 아드리앙 로네·폴 데통브 신부 기록, 안응렬 옮김)에서 인용해 재구성하고, 쉬운말로 다듬었다.
재판관이 그에게 “너는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지? 누가 보든지 조상에게 제사를 안 지내는 자는 개나 돼지만도 못한 자니 이런 자는 죽어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교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취하고자 한단 말이냐?”고 말했다.
이호영이 대답하기를 “그 제사라는 것은 헛되고 무익한 것이요, 진리를 따르기 위해서는 헛된 것과 무익한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잠드신 부모께 음식을 차려 드리고 잠이 드신 채 그것을 잡수시라고 한다면 그 아니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그러니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음식을 잡수실 줄로 안다면 그것은 더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혼은 저 갈 데로 가고 육체는 무력한 송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혼은 신령체여서 물질적인 음식을 먹고 살지 않습니다. 또 천주의 계명은 훌륭한 것이요, 그것을 지키면 공이 되는 것입니다.
임금을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사람을 역적으로 몰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천지와 신인과 만물의 주재시오, 왕 중의 왕이시며 전 인류의 공변된 아버지시오, 비와 이슬을 마음대로 내리게 하시며 가장 미약한 풀포기로부터 큰 나무까지도 모두 자라나게 하시며, 그의 은혜를 입지 않은 자가 없기에 천주를 배신하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목숨을 버리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역적으로 몰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다음은 1839년 5월 24일 한날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한 9 명의 남녀 순교자들의 얘기다.
이호영의 여동생 이소사도 함께 잡혀 들어갔다. 남편을 여의고 몹시 가난하게 살았으나 언제나 화평한 기색과 기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소사는 문초 시작부터 매를 몹시 맞고 주뢰를 틀렸다. 형리들은 흰 바지 혹은 검은 바지에 검은빛이나 남빛 저고리를 입고 굵기가 팔뚝만 하고 길이가 2.5미터 가량 되는 붉은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이소사의 옷을 벗긴 후 팔을 잡아 매달아 놓고 매질을 혹독히 했다. 이소사의 온몸은 터져서 유혈이 낭자했으나 배교하지 않았다.
한강 기슭에 사는 박아기는 예수의 수난을 생각하며 눈물을 짓기도 했다고 한다.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순교하기를 열렬히 원했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과 맏아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박아기는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나고 살이 쇠눈만큼이나 구멍이 나도록 맞았다. 그녀의 남편과 아들들은 매일같이 찾아와서 한 마디만 하면 풀려나오게 되니 그리하라고 졸랐다. 어려운 집안 형편과 늙은 어머니와 자녀들을 들먹이며 구슬렸으나 박아기는 오히려 그들을 책하였다. “아니! 며칠 더 살려고 영원한 죽음을 당할 위험을 무릅쓴단 말이에요? 나보고 배교하라고 권하기보다는 끝까지 항거하라고 격려해야 되지 않겠어요?” 포장이 그녀에게 말했다. “네 남편과 아들은 옥에서 놓여 나가 집으로 돌아갔다. 너도 한 마디만 하면 이런 은전을 입을 수 있어. 그런데 집안 식구들이 그렇게 조르는데도 너는 도무지 굽히지 않으니 네 마음은 쇳덩어리 같이 인정이 없구나.”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제 남편과 아들이 배교한 것은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신앙을 보존하고 신앙을 위하여 죽기로 작정했습니다."
박아기의 사형을 주청하는 글에 “마님이라고 불리는 박녀는 사서(천주교서)를 읽는 것으로 집안일을 삼고 추한 그림을 훌륭한 신같이 공경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죽음을 향해 나가며 뒤로 물러나지 않으리라고 맹세 했나이다.” 라고 적고 있다.
김업이는 남편과 자녀를 잃은 후 서울 감나무정에서 어머니와 살았다. 모친이 사망하자 교우들의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녀는 감옥에서 세례를 받고 혹형을 더욱 잘 견뎌냈다. “저는 예수 마리아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배반하지 못하겠습니다."
한아기는 독실한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신앙심 없이 쾌락을 즐겼으며 믿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다. 한아기는 결혼 후에야 회개하고 열심히 교를 실천했다. 서른 살이 됐을 때 남편과 자녀들을 여의고 친정어머니에게 돌아왔다. 그 후 열심히 전도하고 하느님의 강복을 얻기 위해 자주 단식했다.
김아기는 미신을 숭상하는 집안에 시집 가 오랫동안 남편을 따라 미신에 빠졌다. 그러나 교우들의 전도를 받고 남편의 책망도 상관하지 않고 집에 꾸며 놓았던 우상과 그림을 태워버렸다.
박희순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고 아름다웠는데, 일찍이 궁중으로 불려 들어가 왕후의 시녀가 되었다. 그녀는 재간과 슬기와 온순함으로 다른 나인들보다 높은 지위에 올랐다. 한문과 국문에 능통해 시녀들에게 글을 가르쳤 다. 서른 살 때 처음으로 천주교 이야기를 듣고 믿을 마음이 간절했으나 가르침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마침내 병을 칭탁하고 궁중에서 나왔다. 아버지가 천주교를 반대 하므로 조카 집에서 머물며 교를 열심히 믿고 지킬 것을 실천했다. 조카를 전도시킨 후 따로 집을 장만하고 여러 여자 교우들과 함께 사는 중에서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포장이 첫 번째 심문에서 “궁녀는 다른 부녀들과 매우 다르거늘 어찌하여 그와 같이 천한 사교를 믿는단 말이 냐?” 그러자 박희순은 답했다. “우리 종교는 절대로 천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 생명을 받았으니 마땅히 천주를 찬미하고 흠숭해야 합니다.” 그녀는 재판관들 앞에 세 번 출두할 때마다 곤장 30대를 맞았다. 한쪽 다리뼈가 부러져서 골수가 나오는 것을 머리카락으로 닦아내며 “이제야 우리 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괴로움이 어떠했는지를 조금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박희순은 함께 갇혀 있는 이들을 가르치고 근심하는 이를 위로하고 약한 이를 붙들어 주며 언제나 누구를 대하거나 사도로서의 일을 했다.
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권득인은 장사로 근근이 끼니를 이어갔다. 신심이 높아 첫닭이 울 녘에 일어나 등잔불을 켜 놓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했다고 한다. 권득인은 어찌하여 천주를 믿는냐는 질문에 “천주는 천사와 사람과 만물의 왕이시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며 이 모든 물건을 사용하고 천주께 무한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니 천주께 감사할 생각을 두지 않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습니까?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다 천주를 공경하고 섬길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포장은 성이 나서 그를 강제로라도 배교시키기 위해 못된 죄수들에게 내맡겨 고문을 시켰다. 어찌나 악한 죄수들로부터 매질을 당했던지 두 번이나 죽은 줄 알고 내버려 두기까지 했다.
이광헌은 명문의 자제로 고매하고 도량이 넓고 쾌락을 즐기는 성격이었다. 소년 시절부터 주사청루에 드나들기를 즐겨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서른 살 때 천주교에 입교했고 아내와 동생도 입교했다. 그는 박해를 모면 하기 위해 여러 번 도망을 다녔으므로 오래지 않아 가산을 탕진했다. 10년이 넘는 곤궁한 생활 중에도 천주교의 계명을 준행했다. 이광헌에게 처자를 들먹이며 배교할 것을 종용했으나 끝까지 거절하자 그를 땅에 엎어놓고 참나무 널빤지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널빤지는 길이 150센티미터, 폭은 15 내지 18센티미터 가량 되고 손잡이가 달려 있는 것이었다. 장딴지를 그것으로 대여섯 번 치니 살점이 터져 사방으로 튀었고 십여 번 계속 되자 허옇게 드러나 뼈와 널빤지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구경꾼들은 너무나 참혹한 광경에 얼굴을 돌렸다. 포장이 마지막으로 배교 하지 않겠는가? 라는 물음에 “결단코 배교하지 않겠습니 다.”고 답했다.
양반가에서 태어난 남명혁도 스물다섯 내지 스물여덟까지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천주교에 입교 후 회개하고 진실한 생활을 회복했다. 이광헌과 남명혁은 재능 있고 학식이 있어 회장에 임명되었다. 교우들을 집에 모아 놓고 교리를 가르치고 그들을 돌봐주고 병자들을 찾아가 위로했다. 포장이 남명혁에게 말하기를 “외국교를 배반하고 너와 네 처자의 목숨을 구해라.”고 말하자 “제 종교를 외국교라고 하시지만 사실은 만대 만국교의 종교입니다. 저는 이 종교를 알고 봉행한 지가 이미 8년째며 배반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라고 그는 대답했다. 다리뼈가 부러지고 까무러칠 정도로 매를 맞아 나흘 동안 생사의 기로에 오갔으나 죽지는 않았다.
사형이 선고되자, 남명혁은 옥에 갇혀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세상은 주막일 따름이고, 우리의 참 고향은 천국이오, 천주를 위해 치명하시오. 영원히 영광의 나라에서 당신과 다시 만나기를 바라오.”
마침내 사형 집행 날이 됐다. 사람 키보다 더 큰 십자기를 세운 우차가 옥문 앞에 다다른다. 망나니가 옥 안으로 들어가 사형수를 업고 나와 두 팔과 머리채를 십자가에 잡아매고 발밑에는 발판을 놓아 쉬게 하고는 떠나라는 신호를 한다. 가파른 언덕 위에 솟아 있는 서소문에 이르면 망나니는 갑자기 발판을 빼 버리고 우차꾼은 소를 몰아 언덕을 곤두박질하듯이 내려가게 된다. 길은 울퉁불퉁하고 돌이 많으므로 우차가 이리저리 뛰어오르니 두 팔과 머리채로 매달려 있는 사형수는 격심한 반동으로 마지막 가는 길조차 고통에 몸부림친다. 언덕 아래 기다리던 형리들은 형장에 도착한 우차의 십자가에서 죄수를 끌어내려 옷을 벗긴 다음 망나니가 머리를 붙잡아 나무토막 위에 대놓고 그 목을 베었다.
이광헌의 머리는 네 번이나 내리치고서야 떨어졌다고 전한다. 남명혁은 “기쁘게 형장에 나아갔으며 망나니의 칼에 머리가 떨어질 때까지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권득인은 “형장으로 나아가며 기쁨이 가득했고 그의 머리는 몸에서 떨어졌어도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고 전해진다. 이소사는 “우차 위에서도 다른 때와 같이 온화한 기색으로 눈을 내리뜨고 있었고 우차에서 내리면서 십자 성호를 긋고 조용히 칼을 받았다.”고 했다. 박희순은 칼이 머리에 떨어질 때까지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고 했다.
천주교의 전파와 박해는 새로운 세상의 서막
오늘날 우리나라는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누리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살고 있다. 민주화를 이루고 난 뒤에도 자유와 평등은 그 질량에서 강조되는 변화상을 보이나 두 개의 중요한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 조선 시대의 지배 이념인 유교는 삼강오륜을 근간으로 하는 현세적 인간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왕과 양반, 평민, 노비라는 신분 질서로 정해놓고 남성에 비해 여성을 과도하게 억압하는 이념이었다. 유교에서는 자유와 평등이 당초부터 스며들기가 어려운 완고한 사상이었다.
유교는 성인을 지향하면서 중간 단계로 ‘군자(선비)’를 현실적인 인간상으로 가정하고 그리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실제로 ‘군자’가 되기도 매우 어렵다. ‘어찌 어찌 해야 한다’하는 규제는 많으나 그 도덕과 예를 지키면 얻을 수 있는 ‘복’은 없다. 이에 비해 천주교는 유일절대자인 천주가 천지를 창조하고 주관하여, 도덕과 계율을 지키면 복을 얻고 천국에 가나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확연한 논리로 가르쳤다.
서소문 형장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은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 들이는 개방성과 죽음을 초월한 신앙심의 씨앗을 이 땅에 뿌렸다. 이들의 피가 후대에 세계문명에로의 문을 열었고 오늘날 민주화를 이루는 데에도 길잡이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MeCONOMY magazine June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