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로시마 원폭에서 살아 돌아온 김정렴, 한국경제의 총참모장 되다
강경 상고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입행한 김정렴은 입사하자마자 일본군에 강제 징집됐다. 히로시마 군관구 교육대에서 교육을 받던 그는 히로시마 원폭 피해를 당했으나 다행히 심각한 부상은 피했다. 해방 후 서울로 귀국한 김정렴은 조선은행에 복직했다.
그는 은행 재직 중에 통화개혁안을 극비리에 작성했고 당시 백두진 재무부 장관의 지시로 1953년 2월 통화개혁을 전격 실행했다. 통화개혁은 전쟁으로 인해 야기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극약 처방이었다.
김정렴은 상공부 차관 재직 시 수출주도형 공업화 정책을 앞장서서 추진했다. 한국경제 성공 방식의 키워드를 꼽는다면 수출주도형 중화학 공업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 김정렴은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 후진국 개발 전략에서 깊숙이 기여한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다.
김정렴 차관은 국내 시장이 협소하기 때문에 수출주도형 공업화가 아니고서는 한국경제의 도약이 이뤄질 수 없다고 봤다. 당시 국내 기업들은 외국 제품을 수입해서 국내에서 판매하거나 수입을 대체하는 제품을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이 더 이익을 남기는 구조였기 때문에 수출에 힘쓰지 않았다. 김 차관은 이를 타파하기 위해 무역자유화를 하고 관세를 낮추는 시장 자유화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선택하기 어려운 정책이었음에도 김 차관은 선견지명의 정책을 뚝심 있게 끌고 나갔다.
그는 수출실적이 있는 수입업자에게만 수입권을 주는 수출입 링크제를 폐지해 갔고, 수입쿼터제와 수출보조금 제도를 폐지했다. 그는 또 국제분업 상의 우위, 국제수지 효과, 고용유발효과, 다른 산업 파급 효과 등을 고려하여 13개 품목의 수출 특화산업을 선정하고 이들에게 자금과 기술을 중점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와 같은 일련의 노력에 힘입어 1964년 연말, 그의 재임 시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한국 정부의 수출주도 정책 전환은 예상치 못한 공산품 수출 증가를 추수했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설명이 있으나 실무 현장을 경험치 못한 사람들의 얘기라고 본다. 변화를 포착하고 즉시 정책 방향을 바꾸고 그 방향으로 정책을 선도적으로 추진하는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은 실제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공산품 수출 가능성이 엿보이지도 않은 데 수출주도형 정책을 하는 경제관료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세상은 항상 먼저 변화의 조짐을 보여주지만 보통의 인간들은 변화를 읽지 못하거나 변화를 부인하여 기존 생각대로 밀고 나가다가 실패하게 된다.
재무장관으로도 있는 동안 김정렴은 국세청을 신설했다. 국세청 신설로 인해 세무 행정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큰 증세 효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나라의 재정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던 만큼 국가 재정을 경제발전에 요긴하게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인 GATT에도 가입했다. GATT가입은 선진국 수출시장 진입을 용이하게 만들어주었다.
한국경제의 초석을 튼튼히 유지하게 만든 두 개의 공업을 들라고 하면, 포항제철과 울산 석유화학단지라고 단언할 수 있다. 울산 석유화학단지는 김정렴 상공부 장관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다.
석유화학단지는 산업적 특성상, 밀집해 있어야 하고 한꺼번에 건설돼야 하고, 많은 자금이 요구되며 외국 기업들과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이와 같은 거대한 공단 조성 사업은 정부가 주도적으로 신속하게 추진하지 못하면 안 된다. 민간에게 맡겨서는 될 수 없다는 얘기다. 뛰어난 경제관료의 리더십이 필요했다.
김정렴 상공부 장관은 지지부진했던 석유화학단지 건설 사업의 기존 계획을 백지화하고 새로운 계획 하에 추진했다. 백지화 대상이 됐던 기업들이 반발하고 국회에 불려 가 시달렸음에도 당초 수정 계획대로 추진했다. 차관 교섭을 위해 미국 협력 기업들을 일일이 찾아가 협상을 마무리했다.
그 후 김정렴은 1969년 10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옮긴다. 박 대통령은 그에게 자신을 대신해 경제 문제를 챙기라는 임무를 주었으며, 그 일을 9년여 기간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충실히 이행했다. 박 대통령은 북한특수 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 등 엄중해진 안보 문제에 집중하려 했던 것이다.
1960년대 한국 기업들은 정부 보증하에 외국 차관을 많이 들여왔다. 1970년에 들어서면서 차관 원리금 상환이 이뤄지게 됐는데, 원리금을 갚지 못한 기업들이 사채시장에 의존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정렴 비서실장의 주도 아래 ‘초법적인’ 사채동결 조치를 취했다. 그대로 뒀다간 기업의 줄도산과 경제의 침체는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고,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조치였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인기 없는 제도인 부가가치세를 일부 경제 장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통령에게 건의함으로써 도입의 일등 공신이 됐다. 그 일로 결국 비서실장을 물러나는 계기가 됐지만 부가가치세의 도입은 한국경제를 튼튼한 안정 기반에 놓는 주춧돌이 됐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한 개의 화살로 꿴 꾀돌이 오원철 경제수석
오원철은 서울공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쟁이 발발하자 공군 기술 장교로 6년간 근무했다. 제대 후 국내 최초로 자동차를 만든 시발자동차에 입사해 공장장으로 있다가 회사 운영이 어려워져 자동차 부품회사로 옮겼다. 1961년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과장으로 기용됐다가 상공부 화학과장으로서 본격적인 경제관료의 길을 걷게 된다.
그가 빛을 발휘하게 된 것은 상공부 공업 제1국장 재직 때다. 공업1국은 화학공업과 경공업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그는 경공업과 화학 제품의 수출을 독려하기 위해 수출기업에게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정책을 펼쳤다. 수출 기업에 싼 금리로 융자해 주고 외자 도입도 주선해 주고, 애로사항도 발 벗고 해소해 줬다. 그 결과 경공업 수출은 급증했다. 그가 승진해 상공부 기획관리실장에 있을 때인 1968년 한국의 수출액은 5억 달러를 돌파했으며 대부분은 경공업 제품이 차지했다.
오원철 수석의 가장 큰 업적은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육성안을 하나의 바구니에 담아서 추진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는 두 개 산업 모두 성공했다. 방위산업을 육성하려면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지 않을 수 없는데, ‘뭐 대단하냐?’고 되물을 수 있는데, 두 개를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추진하는 것과 별개로 추진하는 것과는 그 효과는 전혀 다를 거라고 생각된다.
두 산업 간의 시너지 효과를 기획한 오원철 경제수석이 1972년 정책의 추진부터 박 대통령 서거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그 정책을 총괄했던 것은 한국경제의 행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국가 정책은 올바른 방향성과 일관된 추진, 이 두 개가 합쳐져야 성공한다. 오원철 경제수석은 이 두 가지를 박정희 대통령의 아래서 충실히 수행했다.
◇한국경제 성장 후 저성장 늪에서 회생시킨 남덕우 경제기획원 장관
국가 경제는 성장할 때는 좋지만 언젠가는 꺾어지기 마련이다. 경제 환경이 늘 좋지만은 않아 불리하게 돌아갈 때가 있고 내부적인 모순도 축적돼 드러나기 때문이다. 남덕우 장관이 재무부 장관을 거쳐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임명됐을 때, ‘저성장, 고물가, 국제수지 악화’의 삼중고에 직면하고 있었다.
외한보유고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물가 불안을 희생해서라도 성장을 통한 국제수지 개선에 방점을 찍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수출 회복을 위해 환율 인상을 단행했고, 차관 도입에 적극 나선 결과 28개의 각국 은행으로부터 장기차관을 도입할 수 있었다.
남 장관은 기획원 내 중동진출 전담반을 조직하고, 경제부처 장관들로 구성된 중동경제 협력위원회를 만드는 등 범정부 차원으로 우리 기업들의 중동진출을 본격적으로 지원했다. 그런 여러 조치가 어울려 한 자릿수에 되돌아갔던 경제성장률이 1976년 10%대로 회복하는 성과를 거뒀다. 남 장관은 학자 출신답게 중동문제연구소를 설립할 것을 건의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이 연구소는 산업연구원으로 확장돼 오늘날 한국경제에 기여하고 있다. 중동진출은 석유파동을 극복하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지속하게 만든 정책이 됐다.
그밖에 한국경제를 성장 정책 집착을 끊고, 경제 안정화 기조로 바꾸었으며,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한 신현확 총리와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으로 부가가치세 도입을 맨 처음 제안하고 전두환 정부에서 신현확의 경제안정화정책을 이어받아 한국 경제체질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 김재익 경제수석의 공로도 한국 경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제관료들이다.
현재 경제관료들의 숙제 한국경제는 이제 자신의 길을 개척할 단계라고 봐야 한다.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선진국 경제의 사례를 참고는 할 수 있지만 이제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 경제의 내부 시스템과 문화를 더 잘 파악하고 더 깊이 넓게 사유하고 창의적인 솔루션을 찾아야 한다.
한국경제의 볼륨이 커지고 민간경제와 글로벌 이슈의 복잡성이 증가함에 따라 경제관료들의 역할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있다.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경제관료들의 역할은 박정희 시대보다 더 정교하고 과감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오늘날의 경제는 이론에 치우친 경제학자들이니 협소한 경험치에 매몰되기 쉬운 기업가 출신보다 복잡한 이해관계를 이해하고 다양한 정책 현장을 체험한 경제관료들의 솜씨가 더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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