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에 대한 차별문제는 늘 도마 위에 오른다. 비장애인과 더불어 살 수 없는 사회 환경 속에
서 태어난 장애인은 어릴 때부터 정상적인 생활의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경우가 많다. 또 어렵게
힘든 과정을 이겨냈다고 해도 우리 사회 도처에는 이들에게 그리 관대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지
난달 중순경 본지에는 ‘뇌병변 장애인 대출접수 거부사건’이라는 민원이 제기됐다. 그 사건 속으
로 들어가 봤다.
뇌병변 1급 장애인인 박민호(가명, 32)씨는 2014년 11월 27일 서울특별시의 ‘장애인공동주택 특별공급’ 기관추천자로 선정되어 광명시에 있는 H건설사에서 분양하는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이후 1차 계약금을 자비로 납부한 박씨는 2차 계약금은 대출을 받으려 했으나, 계약금 대출을 전담한 A은행은 ‘의뢰인이 대출계약서에 자필로 서명할 수 없으니 대출이 불가하다’며 접수를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2차 계약금도 자비로 납부한 박씨는 이후 납부해야 할 중도금은 전액을 대출받기 위해 중도금 대출 전담은행인 B은행에 사전문의 했다. 그러나 B은행으로부터 “자필 서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외관상 의사능력과 ‘사실상의 행위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해 대출이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B은행 측 담당자는 상지 절단 지체장애인이나 시각장애인 등 영업점에서 보기에 의사능력이 있으나 자필서명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서명대필, 당사자 지장 등의 방법으로 갈음할 수 있다. 그러나 의뢰인의 경우 해당사항 자체가 없다고 말했다고 했다. 박씨는 중도금 대출 신청을 앞두고 본지에 민원을 제기했다. 취재원이 만나본 박씨는 장애 등록 이후에도 대학을 정상적으로 수료했으며, 자판 등 보조기기를 이용해 가족 외 타인과도 충분히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뇌병변 장애는 신체적 장애
서울시 장애인인권센터(이하 장애인인권센터)는 “금전대출에 있어 대출을 신청하려는 자가 지적장애인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그 의사능력 유무에 대한 확인과정 없이 대출을 거부하는 것은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차별금지법) 제17조를 위반한 차별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장애인인권센터는 “중도금 대출 전담은행에서 밝힌 ‘사실상 행위능력자’라는 기준은 그 개념이 모호하고 구체적인 판단 기준 및 절차가 불비하다”면서 “금융감독원 및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지적한 바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의사능력의 유무를 단지 장애정도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지능지수·소통능력·사회적 연령 등을 토대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한 대법원 2002.10.11. 선고 2001다10113 판결을 소개했다.
실제 2011년 7월 금융감독원은 “상당수 금융회사가 여신 관련내규에 가계대출 자격을 ‘법률상 행위능력자’ 요건 외 ‘사실상 행위능력’을 추가로 요구하고 있다”며 “‘사실상 행위능력자’에 대한 개념이 모호하고 구체적인 판단 기준이나 절차 등이 불비해, 금융회사가 자의적으로 판단함에 따라 지적장애인에 대해 부당한 차별 및 민원발생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장애인인권센터는 “이 사건 의뢰인은 뇌병변 장애인으로 ‘뇌병변’이란 뇌성마비, 뇌졸중 등 뇌의 기질적 병변으로 인해 발생한 ‘신체적 장애’”라며 “신체의 움직임과 음성 언어 구사에 어려움이 있으나, 지적·인지적 기능에는 결함이 없다”고 전했다. 이어 “‘지적장애’는 지능검사 70 이하로 지적인 기능이 뚜렷이 평균 이하인 경우에 해당하는 다른 유형의 장애”라고 설명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여신전문금융업법
현행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제15조 제2항에서 ‘재화·용역 등의 제공자는 장애인이 해당 재화·용역 등을 이용함으로써 이익을 얻을 기회를 박탈해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울러 동법 제17조는 ‘금융상품 및 서비스의 제공자는 금전대출, 신용카드 발급, 보험가입 등 각종 금융상품과 서비스의 제공에 있어서 정당한 사유 없이 장애인을 제한·배제·분리·거부해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장애인인권센터는 여신전문금융업법 시행령 제6조의8 제1항 제3호에서 언급하는 ‘본인 확인 및 직접 서류작성’이란 타인 명의의 사기·금융실명법 회피를 막기 위한 것으로, 반드시 자필서명을 받으라는 취지는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며 “동 조항 후단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본인 확인 및 서류 등의 작성을 할 때에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4조 제2항에 따른 정당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따라서 장애 특성상의 불가피한 사유로 자필신청서 기재가 불가능한 경우, 이에 대해 자판 등 의사소통 수단 제공을 통해 신청서 기재 내용에 대한 이해·동의 여부 확인과 대리인 작성, 녹화·공증 등 절차를 마련하면 은행 측에서 우려하는 의사능력의 판단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의견을 전했다. 계속해 “의뢰인이 단지 외관상 ‘자필서명을 할 수 없으니 의사능력도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유만으로 소명의 절차 및 수단없이 은행 측에서 자의적으로 대출신청 자체를 거부하는 행위는 절차상 하자에 따른 장애인 금융소비자 부당차별에 해당한다”며 “장애인차별금지법 제46조, 제47조에 의거해 ‘이 법의 규정을 위반해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에 대해 손해배상 책임’을 지고, 이러한 차별행위가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이 아니라는 점’은 사측에서 입증해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성년후견인제도 이용할 수 없어
지난달 23일 아버지와 함께 동행한 박씨를 중도금 대출 신청 현장에서 만났다. 이미 계약금 대출 신청 현장에서 서류 접수조차 거부당한 상태라 아버지는 많이 초조해보였다. 당시 상황을 물었다. 박씨의 아버지는 “지난번 계약금 대출 현장에서는 자필서명을 못한다는 이유로 의사능력이 없는 금치산자로 몰아갔다”며 “앞에 자판만 있어도 의사소통이 가능한데 그런 것은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실제 박씨는 인터뷰 도중 핸드폰으로 문자를 찍어 의사를 전달했다.
당시 해당지점은 “장애인 대출거부 규정은 없으나 ‘의사능력여부’를 명확히 판단할 수 있는 기준도 없고 의사의 진단서라고 해도 명확하지 않다고 본다”며 “가계대출시 소득·상환계획 등을 영업점 직원이 체크해서 대화로 확인할 수 없다면 대출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대필제도에 대해서는 “별도 서식이 있는 것은 아니고 대필자가 대신 작성하고 계약자 이름 옆에 대필자가 별도 서명하는 것에 불과하다”면서 성년후견인이 오면 대출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박씨의 아버지는 “자필서명을 할 수 없다고 서류 접수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뇌병변 장애는 신체적 장애이고 지적, 발달장애가 아니기 때문에 은행에서 말하는 성년후견제도는 이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현재 계약금 대출거부건은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제기한 상태다.
현장에서 접수된 중도금대출 신청
간단한 대화 후 박씨와 아버지는 중도금 대출 신청을 하러 갔다. 신청현장에 기자는 동행하지 않았다. 창구에 다녀온 박씨와 아버지는 밝았다. 박씨의 아버지는 “서류접수가 됐다”고 말했다. 은행 측이 박씨가 의사능력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서류 접수를 해줬다는 것이다. 은행 측은 앞으로 직접 안와도 된다며 중도금대출 온라인 신청과정까지 친절히 알려줬다. 장애인인권센터는 “뇌병변장애가 정확히 뭔지 모르는 상황이 이런 사건을 만든 것 같다”며 “단지 말을 못하고 몸을 제대로 못 움직인다는 이유로 의사무능력자라고 판단해 버렸다”고 토로했다.
이어 “접수 후에 대출자의 소득이나 상환계획이 은행 내부 규정상 문제가 된다면 거절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모두가 서류 접수만 받는 현장에서 접수조차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심각한 차별”이라고 말했다. 계속해 “뇌병변장애는 신체적 장애라 성년후견제도를 이용할 수 없는데 은행은 성년후견인이 와야 한다고 말한다”며 “은행 내에 이런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 기준과 절차가 없다보니 현장에선 이런 혼란이 많다”고 현실을 전했다.
지점 현장에 되풀이 되는 혼란
현장에선 비슷한 사건이 또 발생하고 있었다. 지난 달 24일 뇌병변 뇌성마비 장애인인 한종수(가명, 35
세)씨가 이체한도를 올리려고 C은행 △△지점을 방문했다. 이 은행에서도 창구직원은 주민등록상 후견인이 없냐고 물었고, 당연히 후견인이 있을 리 없는 한씨는 기본증명서를 발급받아 올 것을 요구 받았다. 결국 큰 싸움이 벌어져 은행 지점장까지 나와 사과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 사건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됐다.
기자가 만나본 은행직원들은 “결코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따로 보고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며 “돈을 다루는 업무의 특성상 조금이라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우리는 장애인, 비장애인 가리지 않고 증거로 남길 수 있는 서류 등을 요구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창구에 오는 손님들은 다 처음 본 분들인데 우리가 그분들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겠냐”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정부와 중앙의 구체적인 가이드라인과 지침이 없는 가운데 현장에서는 오늘도 높은 언성이 오가고 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혹시나 장애인이라고 해서 불이익을 주지 않나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은행 측에서는 작은 실수라도 줄이기 위해 번거로운 절차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 대출에 대해 정확한 가이드라인과 위험부담을 줄이는 리스크관리법 개발이 시급해 보였다.
MeCONOMY Magazine April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