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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제19대 대통령 문재인 당선]고구마 문재인, 문제아에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19대 대통령으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당선 됐다. 문재인, 그는 어떤 사람인가.

 

찢어지게 가난했던 문제아, 소신을 지킨 인권변호사가 되다

 

1953124일 한국전쟁 당시 함경남도 함흥에서 경상남도 거제시로 피난 온 ()문용형과 강한옥 사이에서 한 남자 아이가 태어난다. 그의 이름은 문재인(文在寅)이다.

 

문재인이 태어난 지 7개월 후 남과 북에 38선이 그어졌고, 고향으로 갈 수 없게 된 문재인의 부모는 부산 영도구로 옮겨가 새롭게 터전을 일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전의 피해로 전 국토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제대로 된 생계를 꾸리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고,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피난민 출신의 문용형 일가의 생활은 더 힘들었다.


부산 남항국민학교 재학 당시 매달 학교에 내는 월사금을 내지 못해 수업을 들을 수 없었던 문재인이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던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은 지역 명문이었던 경남중학교를 거쳐 당대 PK지역 최고의 명문고인 경남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남들보다 공부하기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대 명문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독서에서 나왔다.

 



중학교 재학 당시 문재인은 학교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해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의 독서 삼매경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모범생 같은 이미지를 가졌고 실제로 공부를 잘 했던 그에게도 방황의 시절은 있었다.

 

고교 시절 초반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고교 말기에는 극도로 가난했던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과 낙담 그리고 사회 계층 차이에 대한 불만으로 술과 담배에 손을 대는 등 방황을 하며 문제아라는 별명을 얻었다. 결국 문제아문재인은 고교 졸업 이후 원하던 서울대 입시에 실패했고 재수를 선택했다. 그러나 1972년 두 번째 대입에서도 서울대의 문은 그에게 열리지 않았고 탈락의 고배를 마신 문재인은 서울대 대신 경희대 법학과 문과 수석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가난을 이겨내고 4년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한 그에게 시련은 계속됐다. 경희대 4학년 총학생회 총무부장 시절 당시 박정희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집회를 했던 그는 1975411일 구속돼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았다. 출소 이후 요주의 인물로 찍혔던 문재인은 강제 징집돼 1976년부터 1978년까지 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에서 특전사로 복무했다.

 



1978년 군 전역 후 고향에 돌아와 진로 문제로 방황하던 그에게 인생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쓰러져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문재인은 사법시험에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 생전에 잘 된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깊은 후회였다. 그 후 문재인은 1979년 사법시험 1차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러나 1980년 복학과 함께 사법시험 2차 시험을 치룬 그는 곧바로 구속됐다. 당시 전두환 신구부에서 민주화 운동 전력이 있는 대학생 등을 마구잡이로 구속했고, 문재인 역시 517일 강화도에 있는 예비 처가(현 김정숙 여사)에 다녀오는 길에 붙잡혀 유치장 신세를 져야했다. 그렇게 유치장에서 시간을 보내던 문재인은 옥중에서 사법시험 2차 시험 발표를 맞이했다. 당시 여자친구였던 부인 김정숙 여사는 2차 시험 합격 소식을 알려왔고, 얼마 뒤 문재인은 석방됐다


하지만 사법시험 2차 합격 소식이후에도 그에게 고생 끝 행복 시작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형식절차에 가까운 사법시험 3차 면접을 앞두고 문재인은 안기부에서 나온 사람들을 만났다. 당시 안기부에서는 문재인을 호텔로 불러 지금도 그때와 생각이 같은가?”라며 군사 독재 정권으로의 전향을 회유했다. 이에 문재인은 그때 나의 행동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군사 정권의 유혹을 뿌리쳤다.

 

이후 다행히 사법시험에는 통과했지만 시위 전력 때문에 사법연수원 졸업 당시 수석 졸업 할 수 있는 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석으로 졸업 해야만 했다. 또한 집시법 위반 전력이 있어 판사로도 임용되지 못했던 그는 거대 로펌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고 어머니가 있는 부산으로 낙향했다. 그가 생각한 변호사란 서민들이 겪는 사건들 속에서 억울한 사람을 돕고 보람을 찾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원칙주의자 문재인, 노무현을 만나다

 

부산으로 낙향한 문재인은 사법고시 동기인 박정규의 소개로 노무현을 만났고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했다. 사무소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마다하지 않고 만나다 보니 문재인과 노무현은 부울경 지역의 대표적인 노동 및 인권변호사로 이름이 알려졌다.

 

이후 6월 민주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 198813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이 노무현과 문재인에게 공천 제안을 했다. 노무현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13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지만 문재인은 이를 거절하고 재야에 남은 변호사들을 모아 노무현과 함께 운영했던 법률사무소를 법무법인 부산으로 바꾸고 대표 변호사로 지내며 인권변호사로서 활약했다.

 

그리고 20024월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확정된 뒤 문재인은 10월부터 노무현 캠프 부산 본부 선거 대책위원장을 맡으며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 대선 이후 노무현은 문재인에게 당신이 나를 정치로 나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라며 문재인에게 책임을 물었고, 문재인은 책임을 지기 위해 민정수석비서관 자리를 맡게 됐다.

 



하지만 녹내장과 고혈압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문재인은 1년 만에 민정수석 자리를 내려놓고 청와대를 떠났다. 청와대를 떠난 그는 아내와 함께 네팔 산행을 하던 중 영자 신문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듣게 됐고, 그 즉시 귀국해 노 대통령 변호인단을 꾸렸다. 탄핵 부결 이후 문재인은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 정무특보를 거쳐 대통령비서실장 자리까지 올랐다.

 

문재인의 청와대 시절 일화는 유명하다. 역대 정권 중 처음으로 민정 수석을 두 번이나 맡은 인물이며, 비서실장 시절에는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가 내기 골프를 쳤다는 소식을 받고 고심하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총리 해임을 촉구하는 원칙주의자의 모습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또한 청와대에 근무하는 모든 직원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고, 왕실잘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명확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 때문에 노무현은 문재인에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했다.

 

정치인으로 다시 태어난 문재인, 혁신의 아이콘

 



노무현 탄핵을 막아내고 노무현 정부와 마지막을 함께한 문재인은 2008년 경남 양산의 본가로 돌아가 칩거생활을 했다. 참여정부시절 민정수석 자리를 받아들일 때도 민정수석으로 끝내고 정치하라고 하지 말라는 조건을 내걸었던 그의 원칙주의자적 모습이었다. 그러던 중 그를 정치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20095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주변에서는 문재인이 정치에 나서주길 희망했다. 하지만 지독한 원칙주의자 문재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노무현에 대한 책이라도 써야하지 않겠느냐라는 회유책에 문재인은 운명을 집필했고 책이 잘 팔리자 자연스레 북 콘서트를 하게 됐다. 1회성으로 시작한 북 콘서트는 대박이 났고 이후 전국순회콘서트로 이어졌다. 전국순회콘서트를 하면서 문재인은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을 느꼈고, 마침내 고집을 꺾고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한 번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문재인의 첫 정치권 도전장은 2012년 제19대 총선이었다. 부산광역시 사상구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한 그는 박근혜를 등에 업은 손수조를 꺾고 55%의 득표를 얻으며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19903당 야합 이래 사상구에서 당선된 첫 민주당 후보였다. 하지만 문재인은 정치적 임무는 국회의원이 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바랬고 그 바램은 문재인을 민주통합당 제18대 대선 후보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대통령이 될 순 없었다. 각축전을 벌인 가운데 박근혜가 제18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문재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대선 이후 문재인은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를 통해 새로운 당대표로 선출됐고, 당의 혁신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혁신으로 가는 길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문재인이 정치판에 등장한 이후 당의 중진 의원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곤 문재인을 향한 공세작전을 펼쳤다. 안철수로 대표되는 당내 비주류 의원들은 문재인의 대표직 사퇴와 혁신위원회의 혁신안 폐기 등을 요구했다.

 

원칙주의자 문재인과의 협상이 원하는 대로 잘 이뤄지지 않자 제20대 총선을 앞두고 비주류 의원들은 대거 탈당을 감행했다. 그러나 문재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당 인재 영입 작업에만 착수했다. 2016119일 문재인은 신년 기자회견을 열어 당의 공천 제도를 시스템 공천(안심번호 국민공천제)’로 새로 도입해 그 간 계파 보스 정치인들이 나눠먹기 했던 국회의원 공천권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고구마 문재인의 마지막 도전, 그가 말하는 대한민국

 



“4년 전, 저는 국민의 선택을 받는 데 실패했습니다. 저의 부족함이 컸습니다. 그 후 박근혜 정부의 과오와 실정을 지켜보면서 뼈아픈 반성을 거듭했습니다. 특히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접하면서는 참담한 심경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정권교체를 이루어내지 못한 저의 부족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에 국민들께 송구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아픈 시간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저는 단단해질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더 많이 고심하며 준비했습니다. 세상을 보는 안목과 비전도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커다란 절박감이 저의 새로운 도전을 지탱하는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꿔야 한다는 절박감입니다. 반드시 정권교체 해야 한다는 절박감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감입니다. 그래서 다시 도전했습니다. 준비된 저 문재인이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든든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방송연설 - 문재인

 

한 때 문제아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문재인은 자신을 고구마라고 부른다. 고구마를 먹으면 목이 메는 것처럼 원리원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조금은 답답하기도 한 원칙주의자인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별명이다. 답답할지 모르지만 원리원칙에 따라 하나씩 차근차근 일을 풀어가는 대통령. 재조산하(再造山河)를 외치는 문재인이 그려낼 새로운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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