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나라가 후진국 단계에서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발전 하려면 한국경제 발전사를 비추어 볼 때 4개 그룹의 인적 자원이 필요한 것 같다.
첫째, 시대를 꿰뚫어 보고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대통령과 같은 최고 정치지도자가 필요하다. 둘째, 대통령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고 창조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유능한 관료들이 있어야 한다. 셋째, 실용적 사고를 가진 열정적 과학기술인들이 존재해야 한다. 넷째, 우수한 기능인력이다.
오늘날 한국이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제조업 기술력이 탄탄한 것은 안정적 대통령제 아래서 유능한 경 제관료들과 과학기술인, 우수한 기능인력 등 4부문에서 골고루 인적 자원을 유지해 온 덕분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최고 정치지도자의 리더십이고 가장 양성 하기도 힘들고 유지하기 어려운 인적 자원은 기능인력이다.
이 기능인력들은 1970년대부터 양성되기 시작했으며 기능자들은 기술자로도 발전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1980년대 후반 이후 민주화 바람과 노조 운동이 결합되면서 정치화되는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한국의 기능인력 들은 산업 자체를 파괴할 정도로까지 극단적인 국면은 피하면서 오늘날 제조 강국의 근본적 자원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이들 기능 자원이 꽃을 피우는 시기는 외환위기를 거친 이후 2천년대 이후로 여겨진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은 이 기능인력이 거의 사라졌다. 일본과 독일은 선진국이면서 기능인력을 잘 유지하고 있는 나라로 평가된다. 중국의 기능인력이 아직 한국과 일본의 기능인력 수준까지 도달하 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이며, 한국의 기능인력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1970년대 치열했던 한국의 기능인력 양성 과정을 보면 이해할 수 있 다.
보통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 해서 우수한 과학기술인만 많이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다. 이것은 매 우 잘못된 인식이다. 과학 박사는 현장 일을 할 수 없고, 대학 기계과를 나왔다고 해도 현장 기능인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 설계도와 특정 작업의 기술만 가지고는 건 물을 짓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 수 없고 공장을 돌릴 수 없다.
기술은 지식과 관련된 비중이 크고, 기능은 숙련성이 요체를 이룬다. 이 숙련성은 상당한 기간의 집중적인 훈련 과 경험이 필요하며 인내심이 없어서는 숙련성을 얻을 수 없다. 단순 노동자들은 숙련성을 습득하는 과정은 거치지 않은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숙련성은 손과 몸에 무의식 적으로 장착되는 것이므로 같은 분야의 기술자도 숙련성을 가지지 못하면 고도의 제품을 재현해 낼 수 없다. 바로 이 부분이 기능공의 존재 이유이며, 대체 불가능한 인적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제조업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능인력들은 중진국 이상의 단계로 접어들면 그런 일자리를 피한다는데 가 장 큰 애로점이 있다. 선진국 단계에서 시간이 점차 지나가면 기능인력이 사라지고 그 다음 순서로 과학기술 인력이 줄어들게 된다.
현재 미국의 기능인력은 사라진지 오래됐고 과학기술 인력도 외국인 기술자들의 비중이 다수를 점 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중국과 인도, 한국 인력을 빼고 게다가 유럽계와 중남미계 인력까지 제외하면 순수 미국인 기술자들이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 대학의 과학인력도 외국 유학생 출신들이 없으면 학과를 지탱할 수 없을 지경으로 알려져 있다. 이게 현실이고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는 한국이 현장의 기능인력을 중시해야 하는 이유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창적이고 철저한 기능인력 육성 방식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로 결심한다. 중화학공업 육성의 일차적 목표는 북한의 남침에 대비해 방위산업을 육성시키는 것이었다. 또 1960년대 경공업 수출로는 경제성장에 한계를 느끼고 중화학공업 제품의 수출만이 경제를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화학공업 육성 계획을 입안 하면서 가장 부족한 것이 과학기술인과 기능인력임을 절감한다.
과학자들의 부족은 해외유치 과학자로 메울 수 있다고 생 각해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적극 추진했다. 당시 기술자들도 경공업 기술자들에 치우쳐 있었고 중화학공업 기술자들은 매우 적었다. 중화학공업 자체가 거의 없었는데, 그 방면의 기술자와 기능자들이 부족했던 것은 당연했다.
박정희 정부는 1973년 1월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는데, 1972년을 기준으로 10년 후에 필요 인력을 예측해 보면 과 학기술자는 5만 명이 초과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기술 공은 16만 명, 기능공은 134만 명이 부족한 것으로 추정 됐다. 여기서 주로 전문대 출신이 담당하는 기술공 부족 도 문제이지만 공고 출신의 기능공 부족은 중화학공업 육 성이 성공할 수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임을 인식하게 됐다.
박정희 정부는 기능인력 양성 제도의 본격적 시행에 앞서 당시 명문 중·고등학교 입시를 통한 명문대학 경로를 없애 는 획기적 조처했다. 1968년 중학교 평준화 정책과 1974년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을 실시해 인문계 명문 중·고등학의 기득권을 폐지시켜 버림으로써 초등학교부터 입시 열풍에 휩싸이는 사회적 관습을 일소해 버렸다.
박정희 정부는 평준화 정책과 동시에 공고 우대 정책과 기술 기능계 직업훈련원 지원 정책을 실시했다.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의 저서 「박정희는 노동자를 착취했는가」에 당시 상황을 잘 정리했다.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서술한다.
1973년 정부는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에 우수 기능을 공 급하기 위해 기계공고를 만들었다. 기계공고는 1/100밀리 미터 이하의 단위로 기계를 가공할 수 있는 정밀가공사 양성을 목적으로 건립했다. 1973년 금오공고, 성동공고, 국립부산공고, 전남공고를 필두로 지정됐고 1979년에는 19개 기계공고로 확대됐다. 전국 기계공고의 입학정원은 1만 여 명이었다. 이들 학생의 절반 이상은 학비 면제였으며 희망자에 한해 저렴한 기숙사와 싼 이자의 생활비 융자도 제공했다.
기계공고 재학 중에 정밀가공사 2급 자격을 취득하면 연 간 10만 원의 장학금을 지원했으며 대부분 학생이 정밀가 공사 자격증을 따도록 유도한 결과 거의 전원이 자격을 획득했다. 기계 공고생들은 전국 기능대회에 출전하고 우수한 학생들은 국제기능올림픽에도 참가해 메달을 목에 걸고 귀국해 국민들로부터 큰 환대를 받기도 했다. 이들은 졸업 후 전원 취업이 됐다.
중동진출 기능공을 양성하는 목적으로 만든 시범공고도 11개교가 있었다. 기계조립, 판금, 용접, 배관, 전기공사 등 을 배우는 시범공고 졸업생은 일년에 전국적으로 9천 명 배출됐다. 당시 중동 건설 기업인 현대건설과 대림산업이 이들 시범공고들과 산학협동을 맺고 운영비와 실습재료비를 지원했다.
시범공고생들도 졸업 전에 기능사 2급 자격을 대부분 취득했다. 이들은 재학중에 2급 기능사 자격을 획득하면 산학협동 기업으로부터 수당도 받았으며 졸업 생들은 100% 기업에 취업할 수 있었다. 중동 건설 현장에 파견된 직원들은 5년간 근무하면 병역면제 혜택도 받았다.
이들 2개 유형의 공고 외에 특성화 공고가 1977년부터 1979년까지 12개 지정돼 육성됐다. 전자, 건설, 금속, 제철, 화학, 전기, 철도, 광산, 항공 등의 분야를 배우는 공고로서 기계공고, 시범공고와 동일한 특혜를 받았다.
이들 3개 유형의 공고생들은 대부분 시골 출신이거나 도시 영세민 자녀들이 많아 학비 면제와 장학금, 기숙사, 생활비 대출은 커다란 도움이 됐다. 특성화고는 한 해 6천 명 정도 배출됐다. 그밖에 일반 공고도 1979년 전국에 55개교가 있었으며 한해 2만 5천 명의 졸업생들이 나왔다. 일반 공고는 사립학 교로서 3개의 특수 유형의 공고들보다 정부 지원을 상대적으로 받지 못했다. 정부는 이들 학교의 수준을 끌어올 리기 위해 기업의 참여를 권장했다. 일반 공고생의 2급 기능사 자격 합격률도 70% 수준으로 평가됐다.
박정희 정부는 직업훈련원을 통해서도 부족한 기능공을 성공적으로 공급했다. 나라 살림이 어려웠던 1970년대까지 우리 정부는 국제기구와 외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공공직업훈련원을 건립했다. 1968년 유엔개발계획(UNDP) 의 자금으로 지은 중앙직업훈련원, 1971년 독일의 지원으로 세운 한독 부산 직업 공공훈련원, 1976년 일본의 도움 으로 대전직업훈련원과 벨기에의 지원을 받은한 백창원 직업훈련원이 각각 설립됐다. 1973년 미국 하원의원 오토 패스만의 자금으로 정수 직업훈련원이 만들어졌다.
정부는 이들 외에도 아시아개발은행과 세계은행의 차관을 받아 1973년부터 1980년까지 전국에 20개 공공직업훈련원 을 만들었다. 이들 훈련원은 상급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가난한 가정형편의 청소년들이 입소했으며 훈련 기한은 1 년-1년 6개월이었다. 야간 훈련생들도 있었다. 지금은 야간 학교라는 것이 거의 없지만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다.
사업 내 직업훈련원 중에서 노동청의 인정을 받은 곳을 인정 직업훈련기관으로 지정했는데, 정부 인정을 받을 경우 정부의 보조를 받았다. 정부는 사업주가 기능공을 스스로 양성하도록 강제하는 직업훈련 의무제도를 1974년 도입했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72년 제3차 경제개발계획부터 1981년 제4차 경제개발계획이 마무리될 때까지 공고와 직업훈련원을 통해 130여만 명의 기능공을 양성해 현장에 공급된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