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 복귀하고, 전세계를 상대로 관세 전쟁을 시작하면서 세계는 다시 한 번 예측 불가능한 트럼프식 통상 전략의 진면목을 경험하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기치로 내건 그의 정책은 명분상 자국 산업 보호지만, 실제로는 동맹국과 주요 교역 상대국을 압박해 양보를 받아내려는 저급한 협상술에 가깝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기 행정부 시기와 마찬가지로 관세를 가장 강력한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그는 이를 통해 상대국으로부터 금전적·정책적 양보를 얻어내고, 동시에 미국 내 정치적 성과로 치환해 지지층에게 강조한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미 국경을 접한 이웃 국가인 멕시코와 캐나다는 트럼프의 관세 공격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중국 역시 미국의 집중 공세에 맞서 자국 산업 보호와 외교적 반격을 동시에 시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이미 철강, 자동차, 전자제품 등 주요 수출품에 대한 관세 인상 압박이 가시화되고 있고, 트럼프 대통령의 직접 공격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그는 언제든 정치적 필요에 따라 한국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는 인물이다. 대한민국이 최근 수십년동안 접해본 다양한 국가적 도전 중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야만적인 공세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유감스럽게도, 지금 한국은 전략적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정치 공백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 확정 이후 아직 차기 대통령이 취임하지 않았고, 이주호 대통령 권한대행이 국정을 임시로 수행 중이다. 국민의 신임을 받지 않은 권한대행 체제는 외교적 위기 상황에서 전략적 결단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특히 국회와의 협력 없이 어떤 외교 방안도 실행에 옮기기 어렵다. 이러한 비상 상황일수록 외교 전략의 방향성과 국내 정치의 통합이 절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고려 초기인 993년 거란이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해 침공해왔을 때 서희 장군이 보여준 태도를 또 한번 새길 필요가 있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거란의 군사력이 워낙 강력한 만큼 전쟁을 하면 반드시 패배할 것이라면서 평양을 포기하고 항복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서희 장군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알지도 못한 채 겁을 먹고 항복할 수는 없다”며 상대방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선결 과제라고 강조했다.
당시 고려 국왕인 6대왕 성종이 서희 장군의 주장에 동조했으나,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려면 직접 협상에 나설 사람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거란 진영에 특사로 파견된다는 것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임무였다. 결국 서희 장군 스스로 특사로 나섰고, 거란 장수 소손령과의 담판을 통해 거란의 침공 목적이 거란의 송나라 전면 침공에 앞서 고려의 후방 공격 가능성 차단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서희 장군은 거란을 뒤에서 공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하고, 오히려 상국으로 예우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음으로써 침략을 무마하고 영토까지 확장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처럼 외교의 핵심은 상대방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꿰뚫는 능력이 선결 과제다. 지금의 트럼프를 보면 한국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 유권자에게 자신이 ‘성과를 거둔 협상가’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주요 관심사로 보인다. 그는 한국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내고 그것을 과장해 미국 국민에게 보여주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국이 ‘그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인상’을 심어주면서도 실질적 국익을 지키는 외교술이 필요하다. 이른바 ‘정치적 명분을 주되, 실리는 우리가 챙기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권한대행 체제 혼자만으로는 수행하기 어렵다.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큰 양보를 받아냈다는 선전을 하게 되면 한국에서는 과도한 양보를 했다는 비난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1당과 제2당이 모두 과도 내각에 대해 협조하는 자세를 보인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미국에 양보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질적으로 한국의 국가 이익을 침해한 것은 없다는 설명을 할 수 있고, 이에 대한 국민적 공감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제1당과 제2당이 내각의 사전 설명을 받았기 때문에 정부의 설명에 공감하는 입장을 보일 수 있다. 이처럼 초당적 협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초당적 협력이 이뤄지려면 대통령 권한 대행 체제에서는 국회 중심의 외교 대응 체제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제1당인 민주당과 제2당인 국민의힘, 그리고 과도 내각이 참여하는 '국정운영협의위원회' 같은 협의체를 구성해 공동 대응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 이 위원회는 미국과의 통상 협상에서 발생하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차기 정부 출범 이후 신속한 인수인계를 보장할 수 있는 구조를 제공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원하는 바를 스스로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개발도상국' 또는 ‘후진국’이라는 인식 속에 외교를 해왔고, 한미동맹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왔다. 그 결과,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바라는지조차 모른 채 외교의 수동적 객체로 남은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조건에서 어떻게 전략적 협상을 전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정리하고, 그 위에서 미국이 원하는 것을 파악해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실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외교가 가능해진다.
정리하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바라는 것은 자국 내 정치적 승리를 선언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한국이 거기에 이용당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이용당하는 것이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한미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우리가 무엇을 줄 수 있고, 무엇을 줄 수 없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하고, 그런 입장을 일관성있게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이 태도는 정부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회와 정당, 나아가 국민의 동의와 공감 속에서 형성돼야 한다. 지금은 혼란의 시기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질서를 찾고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진정한 외교 역량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첫째,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공세가 내포하고 있는 진짜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단지 액면 그대로 반응하는 것은 미숙한 외교다. 둘째,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 실리를 챙길 것인가, 명분을 세울 것인가. 혹은 그 둘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절충점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셋째, 이를 위해 국회와 내각이 협력하는 구조를 긴급히 구축해야 한다. 지금 당장 결론을 낼 수는 없지만, 협상 준비는 지금부터 시작돼야 한다.
한미관계는 단순히 군사 동맹을 넘어선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발전해왔다. 그런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감정이 아닌 이성, 정치적 계산이 아닌 국익 중심의 전략, 그리고 한국과 미국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트럼프의 관세 공세는 어려운 도전이지만, 우리가 국내적으로 초당적 외교 협력 체제가 구축돼 있고, 통합적 외교 전략 추진 체제가 수립돼 있다면, 위기보다는 기회 요인이 더 클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