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 우리 자신은 물론 외국인들도 한결같이 인정하는 공통점은 ‘신명’이 넘친다는 점이다. 2002년 월드컵 붉은 악마 응원 모습에서 여실히 보여줬다. 요즘에는 K팝 한류를 신명문화의 표출로 보는 이들도 있다. 우리의 정신문화 속에 신명문화가 있는 것은 확실한데 그게 큰 사건이나 이벤트를 만났을 때 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우리는 그동안 신명문화를 그냥 방치하고 있다고 할까. 지하에서 솟아나오는 원유를 잘 정제해서 유용한 에너지로 쓰지 않고 노천에 흘러나오는 대로 보고만 있다고 할까.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던 신명 정신이라면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경제문제도 단번에 풀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의 신명문화에 주목한 학자들은 더러 있으나 하나의 일관된 구슬로 꿰어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신명문화의 연원, 역사적 변천, 노장사상과 도가, 도교와의 관계, 오늘날의 의미 등을 정리해냄으로써 신명문화의 막연한 추상성과 모호성을 걷어낸 역작이 올해 출간됐다. 강릉원주대 철학과 김백현 교수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펴낸 ‘신명문화와 21세기 새로운 도학’은 신명문화를 집대성했다. 김백현 교수를 만나 한민족의 신명문화의 기원에 관해 들어봤다.
Q. 신명문화는 언제 비롯됐습니까?
김백현 동아시아의 인류는 후기 구석기시대가 되면 흑요석으로 만든 세석기를 사용하게 됩니다. 큼지막한 타제석기에서 작고 단단한 세석기의 사용은 도구의 큰 발전인데요. 이 무렵에 샤머니즘이 나타납니다. 세석기 유적을 보면 몽골과 만주, 산동 반도, 한반도, 그리고 티벳 지역에 있습니다. 세석기를 사용하고 샤머니즘을 신봉한 지역은 바이칼 호를 중심으로 마치 컵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모양의 지역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소위 화하족의 활동지역에선 세석기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학계는 홍산 문화를 비롯해 중요한 유적들이 1970년대이래 발굴됨에 따라 상고 시대 동방문화를 세 가지 문화원류로 나누게 됐다고 김 교수는 밝혔다. 시기적으로는 7000년전으로, 첫 번째 원류는 중국 동남 연해 지방 및 호수와 늪지를 중심으로 한 평원지역이다. 이 지역은 쌀농사를 특징으로한다. 청련강(강소성), 용규장(강소성), 하모도(절강성), 대문구(산동성) 유적이 발굴된 곳이다. 양자강과 회수 지역에서 번성한 원시 도작문화는 북쪽으로 산동 반도와 요동반도, 한반도, 일본으로 전해졌다.
두 번째 원류는 중국 서북 황토 고원의 하천과 계곡 지대를 중심으로 태동했다. 이곳은 밭농사중심 지역으로 앙소 유적이 대표적이다. 세 번째는 오르도스(내몽골의 쑤이위안 지역)와 초원을 중심으로 유목을 특징으로 하는 북방 세석기 문화다. 홍산 문화 유적과 요동에서 송화강 일대에 나타난 신락 문화 유적이 대표적이다. 김백현 교수는 한민족의 신명문화는 홍산 문화의 천손 신화와 그리고 대문구문화와 양저문화(절강성)의난생설화, 태양신 문화의 융화를 통해 형성된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Q. ‘신명’이란 말은 많이 쓰이기는 하지만 정의 내리기가 무척 어려운 것 같은데요.
김백현 신명은 크게 봐 세 가지로 나눠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원초적인 신명은 샤머니즘에서 유래됐습니다. ‘천지신명에게 비나이다’에서 나오는 신명인데요, ‘신명 난다’, ‘신명 넘친다’는 용례로 쓰입니다. 무당이 강신해 신들리면 춤을 추지 않습니까. 그런 상태가 신명이 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제자백가 중의 한 사람인 관자는 무형막측한 정기를 ‘신’으로 보았고 그 정기가 현현해 나오는 작용 및 현상을 ‘명’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또 역전에서는 ‘신’을 오묘한 변화로, ‘명’을 지혜로 해석합니다. 맹자는 신명을 신성이란 의미로 사용했고 순자는 신명을 정신과 심사(心思)로 보았습니다. 이들을 종합하면 신명을 이성화된 주체성, 사변성을 지닌 사유주체로 본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장자가 말하는 신명입니다. 자연과 더불어 일체가 되는 것을 신명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신명은 장자의 유명한 포정해우(庖丁解牛)의 이야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문혜군이 소 잡는 포정의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보고 감탄해 어떻게 그런 경지에 도달한 것인가 하고 묻습니다. 이에 포정이 답했습니다. '제가 즐기는 것은 도이며, 이미 기술을 넘어섰습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에 보이는 것 이라고는 소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삼년이 지난 뒤에는 소가 통째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신(神)으로 만나지 눈으로 보지 않고 감각기관과 심지 활동을 멈추고 신(神)이 하고 자 하는 대로 행합니다.'
여기서 신(神)은 주객합일, 천인합일, 물아쌍망(物我雙亡)의 경지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으로 만나고 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행해 자연스럽게 저절로 되는 경지가 세 번째 신명의 도 입니다. 여기에서는 너와 나라는 구별이 없고 우리가 있을 뿐이며 혼돈스러운 것 같으나 질서가 있는 상태입니다. 장자가 말하는 소요제물의 도를 뜻합니다. 21세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경지가 아닌가 합니다. 신명이 내 안에 있는 것이고 그것은 참된 존재, 또는 최고의 깨우침을 얻은 정신적 경지, 도(道)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도 일본도 천인합일을 이야기합니다만 동학에서 ‘인내천’을 말한 바와 같이 한민족이 가장 신명을 일체적으로 강조했다 고 할 수 있습니다.
Q. 최치원이 말한 풍류도와 신명 정신은 비슷한 것인가요?
김백현 풍류’는 ‘바람 따라 물 따라’라는 뜻입니다. 내가 어떤 욕심이나 바라는 것 없는 자연스런 상태, 즉 마음을 비운 ‘무(無)’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음을 비운 무의 상태에서 신명이 나옵니다. 마음을 비운 상태가 무엇을 행하면 어떤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월드컵 때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응원을 하고서도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지 않았습니까. 무당이 마음을 비운 신명의 상태이기 때문에 작두를 타고도 다치지 않는 겁니다.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 바로 신명의 경지 입니다. 최치원 선생이 말씀 하신 풍류도는 신명 정신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중국의 신선사상과 노장사상은 신명문화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김백현 중국의 신선사상과 노장사상, 도가, 도교의 뿌리는 동이족의 신명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화하족의 유가와는 다른 라인입니다. 단군은 큰 무당이면서 신선이라고 봅니다. 단군에서 유래된 정신이 홍익인간과 신명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홍익인간 정신은 단군이 자손들에게 ‘너희들 서로 싸우지 말고 어울려 잘 살아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조선 유학의 특징이 효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데, 홍익인간 정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단군은 하느님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그 자손인 한민족은 천손이라고 여겼고, 천인합일의 경지인 신명 문화를 가지려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와 같이 조상의 뜻을 받들려고 하는 모습이 바로 ‘효’ 사상의 강조로 나타나게 됐다고 봅니다.
천손 의식에서 한민족 고유의 선(仙), 신선사상이 나왔다고 봅니다. 단군신화에 보면 단군이 나중에 아사달에 돌아와 산신이 됐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산신, 선인, 신선사상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최치원이 난랑비서에 기록한 ‘선사(仙史)’가 신선사상, 풍류도, 또는 선 사상을 밝힌 책이 아니겠는 가 하고 생각합니다. 최치원과 동시대에 살았던 김가기가 선인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김가기는 종남산에서 도교를 배웠다고 전합니다. 최치원도 도교를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신라 말기에 이들에 의해 한민족 고유의 선 사상과 중국 도교가 접합돼 선도로 전해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정신은 세석기를 사용한 동이문화의 특징입니다. 중국의 요동과 만주, 산동 지역은 동이문화권입니다. 이들은 고조선과 동이 계통의 신선사상, 신명 문화를 받아들여 도교와 도가, 신선가 사상으로 체계화 시켰다고 저는 봅니다. 중국의 신선사상은 전국 시대 제나라의 추연을 비조로 삼습니다. 그 후 신선사상은 제나라와 연나라에 널리 퍼졌습니다. 이때 방사들이 200~300년 동안 동쪽으로 가서 불로초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신선사상은 진시황 시대에 절정을 이루는데요, 진시황이 유명한 방사인 서복과 선남선녀 3,000명을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쪽 바다 가운데 삼신산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까. 삼신산은 신선들이 살고 있으며 불로초가 있는 선향(仙鄕)으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삼신산이 있는 곳 은 다름 아닌 한반도를 말합니다. 한무제도 불로초를 찾습니다. 한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한 것도 불로초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한무제 이후에는 불로초를 포기하고 불사약을 만드는 쪽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Q. 신명문화가 오늘날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요?
김백현 서양에서도 신명과 유사한 게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문화가 신명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데, 그것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로고스 철학에 의해 철저하게 이성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유교도 이성주의에 근거한 사유입니다. 극단적인 이성주의는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는데요, 신명 문화를 오늘날에 맞게 되살린다면 이성주의의 폐해를 치유하고 나아가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명 정신의 핵심은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마음을 비우는 것 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성과주의와 물신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종교가 그걸 완화시켜줘야 하는데 상업화되는 바람에 그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명 문화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과학적인 지식은 발전할수록 편리하기도 하지만 위험은 더 커집니다. 인공지능인 AI가 지금 모든 곳으로 침투하고 있는 데요, AI로 인해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결국 인류가 AI의 노예가 될지도 모릅니다, 또 AI를 컨트롤하는 빅브라더가 나타날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 현실을 놓고 봅시다. 한국이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풍요로워지고 편리해졌다고 하는데, 왜 자살하는 사람들은 많고 사람들의 불평불만은 커져가고 있습니까. 왜 젊은이들이 불안하게 살고 희망을 잃고 있다고 말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 사회가 서구의 영향을 받아 공리주의에 입각한 경쟁주의, 업적주의로 사람들을 내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서로 돕고 어울려서 살아가자는 홍익인간 정신의 가치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또한 마음을 비우는 혼연일체의 신명 문화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신명 문화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외교적인 방향을 제시 해본다면 ‘다양성’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소국은 사대주의 아니면 다양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데요, 오늘날 한국은 사대주의는 적합하지 않고 강대국의 패권주의에 대해 다양성의 가치를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을 예로 들면 일대일로니 중국몽이니 하는 것들이 패권주의적 발상이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해 우리는 중국 내에서 각 성과 소주민족의 고유한 전통과 정체성, 생활적 면에서 다양성을 이해하고 그들과의 교류를 강화해야 합니다. 베이징만 바라보지 말고 지방을 바라보라는 것이죠. 아울러 중국 밖의 아시아, 나아가 세계 각국의 문화와 경제, 정치의 다양성을 강조함으로 써 평화의 가치를 드높여야 합니다.
다양성과 개방성과 포용성이 신명 문화의 정신입니다. 패권을 추구하는 강대국들의목소리에 작은 나라들의 목소리가 묻혀서는 안 됩니다. 작은 나라들도 더불어서 살아갈 수 있는 글로벌 세계가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국은 큰 나라이기 때문에 각 지역마다 언어가 다르고 음식도 다릅니다. 중국의 역사는 한 마디로 통일과 분열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통일의 시대인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분열의 기운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백현 교수는 2015년 1월 한국 선도의 학술적 연구를 위해 관련 학자들과 함께 ‘신명문화연구원’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국외국어대 중국어학과를 졸업하고 대만 보인대학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한국도가철학회장, 중국학연구회장을 지냈으며 「도가철학연구」, 「중국철학사상사」, 「도교 속의 동이문화」, 「신명문화와 21세기 새로운 도학」 등의 저서를 펴냈다. 그는 중국 태극권의 본산인 무당산의 무당대학당에서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초빙교수를 겸하고 있다.
김백현 교수는 지난 해 6월27일 강릉원주대에서 개최된 제 6차 신자학(제자백가학) 국제학술대회를 주도한 바 있다. 그는 한국인의 의식변화와 신명문화 전파를 위해 선향(仙鄕) 조성 사업을 조용히 펼쳐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MeCONOMY magazine January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