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9세기 조선 유학자들 사이의 논쟁 …‘오랑캐’ 청나라 인정 문제가 가장 큰 고민
- 점차 정치권력 다툼으로 변질…내부 반성 통해 실학(實學) 산파 역할도
- 낙론 출신 ‘홍대용’, 조선 철학의 정점 평가
- 낙론, 세도정치로 호락논쟁 마침표…호론, 위정척사(衛正斥邪)로 이어져
<M이코노미 문장원 기자> ‘호락논쟁(湖洛論爭)’은 조선 후기 18세기 초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이어진 유학자들의 논쟁이다. 역사철학자 이경구 한림대 인문 한국(HK) 교수는 지난해 펴낸 ‘조선, 철학의 왕국 : 호락논쟁 이야기’에서 이 호락논쟁의 시작과 끝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조선 후기 100년 가까이 이어진 호락논쟁을 지금 주목하는 이유는 이 논쟁이 결국 타자(他者)를 어떻게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도 되기 때문이다.
조선의 3대 논쟁
호락논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이보다 앞서 일어난 두 번의 유학 논쟁을 살펴보자. 16세기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등이 주도한 ‘사단 칠정(四端七情)’과 17세기 후반 왕실의 복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예송 논쟁(禮訟論爭)’ 등이 그것이다. 학계는 호락논쟁과 함께 이 세 논쟁을 조선의 3대 논쟁으로 꼽는다. 저자는 책에서 “모든 철학 논쟁은 정치사회적 배경과 연동하고 있는데, 조선의 논쟁들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단칠정 이후 이황의 제자들이 대개 남인이 되고 이이의 제자들은 서인이 됐다. 즉 사단칠정은 조선 붕당정치의 이념적 토대를 마련한 논쟁이었다. 이후 서인은 남인에게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숙종 재위 중반부터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영조 대에는 소론을 제압한 노론이 호론과 낙론으로 나뉘었다.
청나라를 받아들일 것인가?
호락논쟁의 ‘호(湖)’와 ‘낙(洛)’은 무슨 뜻일까. 호(湖)와 낙 (洛)은 충청도와 서울을 가리키는 말로 당시 학계의 주류였 던 노론 학자들이 주로 충청도와 서울을 기반으로 학파를 형성했다. 이 두 학파 간의 논쟁을 호락논쟁이라 부른 것이다. 당시 충청도 노론 학자들은 호학(湖學), 호론(湖論), 호당 (湖黨), 아니면 그냥 호(湖)로 불렸다. 충청도의 다른 이름이 ‘호서(湖西)’이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속했던 학자들은 낙학 (洛學), 낙론(洛論), 낙당(洛黨), 아니면 낙(洛)으로 불렸다. 서 울이 ‘낙(洛)’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은 중국의 도시 낙양(洛 陽)이 수도의 보통명사처럼 쓰였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사실 ‘논쟁’이란 말도 후대에 붙은 것”이라며 “당시에는 호락시비(湖洛是非), 호락변(湖洛辨), 호락이학(湖洛二 學), 호락본말(湖洛本末) 등으로 불렸다”고 설명했다. 일반적 으로 지방에 근거지를 뒀던 호론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을 추구했고, 외래 문물과 다양한 이론을 접하기 쉬운 서울이 근거지였던 낙론은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호락논쟁의 핵심 주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미발(未發) 때의 마음의 본질’,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서로 같은지 다른지’,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마음은 같은지 다른지’가 그 것이다. 이 가운데 호론과 낙론이 가장 치열했던 주제는 인성과 물성에 관한 논쟁이었다. 즉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해석할 것인지에 따른 충돌이었다. 호론 은 미발, 즉 희로애락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은 마음 상태 안에 기질(氣質)이 섞여 있으므로 기질에 의해 좌우되는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는 주장을 폈다. 반면 낙론은 미발일 때에 는 본연지성만이 있다고 봤다. 본연지성은 개별사물에 속한 기본적인 속성인 ‘리(理)’가 만물에 두루 존재하는 것을 보여 주며, 이에 따라 인성과 물성은 동일하다고 봤다.
문제는 철학 논쟁 너머 현실과 맞닥뜨리면서 발생했다. 당시 중국 대륙은 청나라, 만주족이 점령하고 있었다. 주희(朱熹)가 ‘오랑캐’를 ‘인간과 짐승의 중간’이고 ‘기질이 변하기 어렵다’고 결론 내린 이후 조선은 줄곧 만주족을 오랑캐로 무시 해왔지만, 그런 만주족은 유교 문명의 중심인 명(明)을 무너 뜨렸으며, 병자와 정묘 두 호란(胡亂)으로 조선에 치욕을 선사했다. 이 때문에 호락논쟁 중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 서있는 입장은 필연적으로 청나라 인정 여부로 이어질 수밖 에 없었다.
앞서 설명한 것을 바탕으로 보면 호론은 인간과 동물(그 중간인 오랑캐)은 같아질 수 없으므로 청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입장을 취한 낙론은 청나라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가졌다. 인간과 동물, 우리와 오랑캐가 같은 존재라면 ‘저들도 이만큼 하는데 우리는 왜 이런가?’라는 내부 반성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었다.
저자는 “18세기 조선의 지역, 학문, 국제정세라는 세 가지 지표는 바야흐로 ‘상황이 바뀌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며 “그러나 호론은 기존의 지향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송시열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했고, 남인과 소론은 배척의 대상이었으며, 청은 오랑캐이자 타도할 적이었다”고 했다. 이어 “그에 비해 낙론은 달라진 상황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다른 학파와 정파의 주장에 귀를 열었고, 청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며 “그 렇게 보면 호락논쟁은 변화된 상황에 대한 원칙론자와 수정론자 사이의 인식과 대응의 차이였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또 “인성과 물성의 동이(同異)라는 논쟁은 따라서 인간·주체의 반성과 성찰, 인간을 둘러싼 외물 ·타자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문제로 귀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호론은 인 간과 동물, 나아가 인간과 오랑캐의 본성이 같다는 주장이 불러올 파장을 우려했다”고 지적했다. 이는 청나라에 대한 기성 인식을 근본부터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 있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공담(空談)으로 변질된 호락논쟁…실학(實學)의 산파 역할
초창기 호락논쟁은 인간의 마음과 세계를 유교적인 관점, 정확히는 ‘성리학’(性理學)의 눈으로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올바르고 주자(朱子)의 뜻에 맞는 것인지를 논하는 성격이 강 했다. 하지만 세대가 지나 학파의 규모도 커지고 논쟁에 참여 하는 학자들이 커지면서 이해타산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울러 ‘숙종-경종-영조-정조’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 지형의 변화는 호락논쟁을 권력을 잡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다. 정치적 희생양이 됐던 자당(自黨)선배 학자의 권위와 명분, 명예를 둘러싸고 충돌하기 시작했다.
갈등이 심해지면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이를 두고 저자는 “극단까지 가면 반환점이 나타나고, 폐단이 극심 하면 새로운 바람을 갈망하기 마련이었다”고 표현했다. 공담 (空談), 즉 쓸데없거나 실행이 불가능한 헛된 이야기로 호락 논쟁이 변질되자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노론과 대립하던 남인이나 소론은 호락논쟁에 서 한 발짝 물러나 비교적 객관적인 관점에서 비판을 가할 수 있었다. 성호 이익의 제자로 남인 학자였던 윤기는 호락논쟁에 대해 ‘위인지학(爲人之學)’, 즉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학문’이라고 비판했다. 윤기는 유교 경전을 해 석하는 사람의 태도에 초점을 맞춰 명예, 자기과시, 승부욕을 동력 삼아 스스로 드러내는 마음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약용 역시 “개와 소와 사람의 성(性)이 기질지성(氣質之 性)을 함께 가지고 있다면 이는 사람을 폄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도의지성(道義之性)을 함께 가지고 있 다고 한다면 그것은 금수를 높이는 것이다. 두 가지 설은 모두 병통이 있다”고 두 학설을 간결하게 꼬집었다. 소론에 속해 있던 정동유는 “제자와 후학이 나뉘면 당파가 나뉘는 것 은 자명하다. 당론이 일어나면 틈이 생기고 상대를 해치기 위해 날마다 싸움거리를 찾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정신을 쏟는 일이라고는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백성과 나라의 이익에 관한 일은 자연히 쓸데없는 게 돼버린다. 병력은 약해지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약해지고, 재용은 빈곤해지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빈곤해진다. 무릇 이런 것들은 모두 이치상 필연적으로 닥쳐오는 일이다”라고 했다.
반성 후에는 대안이 나온다. 바로 ‘실심(實心)’이다. 곧 진실한 마음을 다시 갖추고 새롭게 보는 자세가 필요했다. 학자들은 진실(眞實), 현실(現實), 실천(實踐), 무실(務實) 등 다양하게 말했는데 모두 ‘실(實)’이 들어가 있다. 저자는 “호락논쟁이 성리학의 극단적인 폐해를 드러내고 쇠락하고 있었다면, 그 폐단을 거름 삼아 ‘실의 정신’이 싹트고 있었다”고 진단했다.
‘실’의 강조는 일종의 과거 회귀 담론을 형성했다. 요약하자면 ‘유학이란 본래 일상에서 배우고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용 경세(日用經世)’의 학문이었는데, 시대가 흘러 번쇄해지고 현학적으로 돼 본뜻을 잃었다’는 것이다. 즉 유학의 근본적 정신, 고대의 이상사회로 돌아가자는 의미다. 어떻게 보면 역설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 말기에는 초창기의 생생하고 소박한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 났다. 중세시대 관념과 해석의 거대한 체계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 담론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중세에 대한 거부라는 점에서 급진적이지만, 고대 이상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이다.
저자는 조선 후기 유학의 이상을 회복하고 현실에서 개혁하자는 학풍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이를 ‘실학’이라고 부르는데, 저자는 “실학은 조선 성리학 전체의 반성에 뿌리를 두고 피어난 열매”라고 강조했다.
조선 철학의 정점, ‘홍대용’
많은 유학자가 호락논쟁의 반성으로 ‘실’을 강조했다. 저자는 그 중 홍대용을 ‘조선 철학의 정점’이라 표현하며 호락논쟁을 뛰어넘었다고 평가했다. 노론 명문 출신인 홍대용은 낙론의 영향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소론이나 남인들의 주장도 접하며 노론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홍대용의 학문태도 는 한마디로 ‘공관병수(公觀並受), 공평하게 보고 두루 받아 들인다’였다. 이를 바탕으로 홍대용은 말년에 집필한 ‘의산문답(毉山問答)’에서 성리학을 허자(虛子)와 새로운 사유를 실옹(實翁)에 비유해 자신의 사유를 전개한다. 홍대용은 ‘의산 문답’에서 “사람이 물(物)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물이 천하지만, 물이 사람을 보면 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 하늘이 보면 사람이나 물이 마찬가지다”라며 “‘성인(聖人)은 만물을 스승으로 삼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는 어찌해서 하늘의 입장에서 물을 보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입장에서 물을 보느냐?”라고 지적한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인물성동론’보다 발전한 이른바 ‘인물균(人物均)’의 사고라고 중시했다.
또 홍대용은 실옹을 통해 지구설, 자전·공전설, 대기설, 우주 무한설, 외계인의 존재까지 설파하는데, 결국 이런 주장들은 인간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의 논거로 사용되고 있다. 즉 세계는 절대적인 중심이나 기준이 없는 상대적인 것으로, 그 결과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상대성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오랑캐나 중국이나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저자는 “세계는 중심-주변이 아니라 ‘모두가 중심이고 모두가 주변임’에 다다른 홍대용의 인식은 인간을 둘러싼 외물에 대한 평등과 연대의 정신으로 뻗어 나갔다”며 “그의 사유 의 귀결을 범애(汎愛)와 평등에 초점을 맞춘 연구도 있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공관병수의 자세로 화이관을 극복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범애(汎愛)에 이른 홍대용은 호락논쟁에 서 멀리 떨어진 영역에 도달했다”며 “그곳은 근대적 이성주의 때론 탈근대의 상대주의까지 걸쳐 있다. 시대가 흐르면서 오히려 빛을 발하는 그의 사유는 가희 조선 철학의 정점이라 할만 했다”고 평가했다.
‘타자(他者)의 인정’ 문제, 차별과 배타성의 문제
저자는 호락논쟁에서 더 나아가 타자에 대한 인정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만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동서양에서 고대부터 ‘문명으로 자처하는 자들’은 주변을 ‘야만’으로 정의했다. 동양에서 ‘유학 문명’ 주변을 오랑캐를 ‘피발좌임(被髮左衽),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라고 수식했고, 서양에서도 야만인을 뜻하는 바바리안은 그리스어 바르바 로이(barbaroi), 즉 ‘알 수 없는 말을 쓰는 사람들’에서 기원했다. 주희는 태극과 천리 같은 보편 개념을 통해 신분과 성별, 종족에 따른 차별을 강화했으며, 서양 중세의 스콜라 철학은 신의 보편성을 검증하며 봉건적 신분질서를 지지했다.
저자는 “오랑캐, 동물, 이방인, 과부와 고아, 일천제, 인디오들 을 두고 이른바 문명을 자처한 이들이 벌인 철학적 논쟁을 보면 무엇이 더 고귀하고 무엇이 더 야만인지 종종 회의가 든다”며 “종교, 신화, 인류학, 사회학, 과학 등 이성과 문명이 이룩한 학문들도 타자라는 대상을 마주하면 자신들의 정체성이나 욕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기 십상이었다”고 지 적한다. 이어 “이들이 독선과 이익과 결합하면 결과는 가장 끔찍했다”며 “정말로 ‘야만스러움’이 있다면 그에 진짜 어울리는 이름은 우리 안의 배타성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호락논쟁의 마침표 ‘세도정치’,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
다시 호락논쟁으로 돌아가 보자. 호락논쟁의 결말은 저자가 말한 ‘배타성’의 극단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정조 사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세도정치’의 얼굴로 호락논쟁은 마무리된다. 정조가 죽자 노론 출신인 정순왕후(영조의 계비)는 왕대비로서 나이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1800년 12월 정순왕후는 자신의 정적을 숙청 대상으로 지목하는 하교를 내린다. 그리고 이듬해 사학(邪學), 즉 천주교를 엄금하는 하교를 내리면서 피의 숙청은 시작됐다.
이를 통해 정순왕후를 지지한 노론벽파와 천주교를 반대하는 소론과 일부 남 인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신유박해’로 불리는 이 숙청을 통해 남인 대부분이 죽거나 유배를 가야 했다. 하지만 최종 목표는 정치적 권력 너머 영조와 정조시대 있었던 자유로운 분위기 자체였다는 게 저자의 평가다. 천주교와 관련 있던 서양 학문은 물론이고, 서양과 관련이 없던 자유스런 문학 그룹, 낙론의 한 줄기였던 북학 그룹 역시 활기를 잃었다.
저자는 “공포는 은밀한 영역까지 침투했다. 자기 검열이 진행 됐던 것”이라며 “홍대용의 일부 글에서 ‘서양 설을 참고했다’ 는 대목이 빠지고,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신유박해 이후 서학, 서양 선교사와 관련한 내용이 다시 삭제됐다. 박제가의 저술에서도 ‘서양’이 들어간 단어나 ‘서양인을 초빙하자’는 민감한 주장이 삭제됐다”고 했다.
이후 순조가 죽고 헌종이 즉위했다. 정조는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김조순의 집안이 바로 낙론의 최고 명문가인 안동 김씨였다. 순조의 비순원왕 후는 헌종과 철종 때 두 번이나 수렴청정을 했고, 그 과정에서 안동 김씨 세력이 정국을 이끌어갔다. 저자는 “학문을 방기하고 권력과 손잡은 타락을 묻자면 우리는 낙론의 핵심 가 문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그들만큼 철저하게 독점을 이루었던 전례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보통 ‘세도정치(勢道政治)’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바른 도리이자 원칙’이라는 의미의 ‘세도’(世道)라고 불렀다. 하지만 외척들이 국왕에게 세도를 위임받은 존재처 럼 굴었고 이후 사람들은 ‘세도’(勢道)라고 바꿔 부르기 시작 했다. 즉 세도(勢道)의 탄생은 이념의 시대가 가고 힘과 세력이 좌우하는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셈 이다.
지금 다시, 여기에서 호락논쟁을 되돌아보는 이유
‘조선, 철학의 왕국 : 호락논쟁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우리의 여의도 정치를 떠올리게 된다. 협치가 실종되고, 타당 (他黨)의 발목을 잡는 행태,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판이 호락논쟁의 마지막과 겹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논쟁 처음의 진지함과 열의, 학파의 출현과 논쟁의 과열, 정파와의 결탁과 변질, 조선에서의 논쟁 또한 철학 밖으로 번져나갔다. 동양의 고매한 유학자들 역시 논쟁의 악순환을 벗어날 수 없었던가”라는 저자의 개탄이 호락논쟁을 보면서 한 것인지 지금의 정치를 보며 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굳이 호락논쟁의 최종 승리자를 따지면 세도정치로 정권을 잡은 낙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적 논쟁에서 승리가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권력을 잡아 다른 정치 세력을 숙청한 피의 승리였다. 저자는 “낙론은 유연함을 지녔지만 세파를 따르고 명분을 이용하다 스스로 소멸했다”고 지적한다. 반면 호론은 “차별주의에 사로잡혔지만, 적어도 이중적으로 처신 하지는 않았다.
명분을 체화한 호론의 생존은 보수의 생명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호론의 후예 들은 서세동점의 위기에서 위정척사(衛正斥邪)로 저항했다. 송시열의 후손인 송근수는 을사늑약에 강하게 반발해 음독(飮毒) 순국했다. 또 호론의 후예들은 의병투쟁, 을사늑약 반 대, 3·1운동에 참여에 항일에도 앞장섰다. 지금 우리 정치에서 자칭 보수 세력이라 자임하는 정당들에게 호론의 이러한 언행일치의 자세가 아쉬운 이유다.
MeCONOMY magazine July 2019